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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64)화 (164/292)
  • 164화 

    * * *

    로드리치가의 거대한 고택 앞으로 마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도착했습니다.”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켈튼의 마부가 말을 달래곤 마차의 문을 열었다.

    라크시스는 가볍게 뛰어내려 시아를 맞이했다. 그가 내민 팔을 자연스럽게 붙잡고 내려오는 시아는 어느새 마도 시대의 숙녀가 다 되어있었다.

    “요크 부인의 실행력이 대단하긴 하네요. 이 옷을 또 어떻게 구했담?”

    치렁치렁한 드레스에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시아가 치맛자락을 엉성하게 붙잡고 내렸다.

    오늘 그녀의 콘셉트는 다름 아닌 탐정 로렌 허슬러였다. 앨런 어셔의 소설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유백색 드레스에 올망졸망한 꽃장식이 달린 모자와 손가방, 대놓고 허리춤에 매단 리볼버까지.

    로렌 허슬러는 애초에 시아 켈튼이었는데. 어째서 로렌 허슬러를 따라 한 시아에게서 어색함이 묻어나오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 정도 실행력이 있으니 켈튼저의 실세가 되었겠죠. 요르문이 요크 부인에게 꼼짝 못 하는 걸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라크시스가 능청스럽게 답했다. 그의 농담에 긴장이 살짝 풀린다.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밀레이나 돔의 극장주의 초대를 다 받아보고 말예요. 레이디 로드리치도 메이슨 비렌체 못지않게 역사 시간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었는데.”

    육중한 대문이 열린다. 고전적이면서도 마도 시대 양식을 그대로 살린 저택의 모습에 취할 것만 같다. 파이프와 태엽투성이인 켈튼 저택과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주인님께선 정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로렌시아호에서 만났던 노부인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루즈 부인이라 본인을 소개한 노부인은 시아와 라크시스를 저택 뒤편으로 안내했다.

    ‘와아.’

    너른 부지 가득 펼쳐진 푸른 잔디 위로 보랏빛 등나무 가지가 흐드러지게 풍경을 장식한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작은 개울 위로 아치형의 다리가 정원의 일부처럼 놓여있었다. 관리된 듯 관리되지 않은 듯. 자연이 만든 작품을 보존한 것처럼 소박하게 꾸며진 정원은 마도 시대의 자연주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사월의 정원은 사방이 보랏빛이었다. 울창하게 우거진 식물들이 등나무 꽃과 한 몸이 되어 낭창낭창 바람에 흔들렸다. 유화로 그린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정원을 감상하느라 하마터면 루즈 부인을 놓칠 뻔했다. 레이디 로드리치는 그런 시아를 멀리서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오느라 수고했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은 귀부인이 온화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앉게.”

    역사책에서만 보던 사람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게 시간 여행의 묘미인 걸까. 시아는 한 박자 늦게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서면으로 인사를 나눴으니 소개는 생략하지.”

    “먼저 인사드리겠습니다. 탐정 로렌 허슬러라고 합니다.”

    “로드리치가의 밀레이나라고 하네. 만나서 반갑군, 레이디 시아 켈튼.”

    레이디 켈튼이라니, 역시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은 달라도 뭐가 다른가 보다.

    라크시스가 나더러 쓰라고 시킨 이상한 편지를 해석한 게 분명한데. 시아 켈튼의 시, 자도 적은 적이 없었는데 내가 레이디 켈튼인 걸 대체 어떻게 안 걸까?

    “소식은 들었네. 부친께서 주신의 곁으로 돌아가셨다지. 홀로 술란에서 견디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삼가 조의를 표하네.”

    게다가 생면부지인 가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까지 알고 있었다. 요르문 켈튼의 당숙이자, 시아 켈튼의 아버지인 미스터 켈튼의 죽음. 술란에서 살던 레이디 켈튼이 수도에 올라와 있을 구실을 만들기 위해, 라크시스가 꾸민 일이었다.

    라크시스가 눈썹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레이디 로드리치의 명성이 어디 가진 않았군요.”

    “그 정도 정보력도 없으면 클럽 로얄의 위원회장이 될 자격이 없지.”

    홍차로 가볍게 입술을 적시며 밀레이나가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옆에서 찻잔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아는 그제야 밀레이나 옆에 내내 한 소녀가 앉아있었음을 깨달았다. 밀레이나의 기세에 압도당해 주변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로렌시아호에서와는 달리 고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 메이드, 헬렌이었다.

    역시 미스 헬렌에겐 숨겨진 비밀이 있긴 했나 보다. 보통의 귀부인이라면 메이드를 이런 티 파티에, 그것도 저렇게 성장시켜 대동하진 않을 테니까.

    그러나 밀레이나의 입에서 나온 진실은 시아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번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 아이는 내 대녀 레베카 뮐러네.”

    “…레베카, 뮐러요?”

    시아가 황급히 눈알을 굴려 라크시스를 곁눈질했다. 그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그래. 죽은 프레데릭 뮐러의 유일한 딸이네. 그가 죽기 전에 내게 이 아이를 맡겼었지.”

    분명 프레디 뮐러에게 자식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찰나 교차된 시아와 라크시스의 시선에서 수많은 대화가 오갔다.

    “사정이 있어 그동안 대외적으로는 존재를 숨겨왔네. 레이디 켈튼과 옌 경이라면 내 심정을 잘 알 거라고 믿네만.”

    밀레이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고대 마법사를 후견인으로 둔 여인과 그런 그녀를 숨기기 위해 탐정이란 거짓 신분까지 만들어내는 남자. 저 두 사람이라면 레베카를 숨겨야 했던 나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밀레이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정한 음성이 나이가 무색할 만큼 날카롭게 티 테이블을 가로질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가 레이디 켈튼의 샤프롱이 되어주겠네. 하지만 맨입으로 해주겠다는 게 아니야. 레베카의 신변 보호는 물론이고, 이쪽에서도 한 가지 더 의뢰할 것이 있네.”

    밀레이나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건지, 레이디 켈튼과 라크시스 옌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설마 클럽 로얄의 위원회장을 샤프롱으로 대동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 믿었던 건 아니겠지?”

    노련함으로 무장한 귀부인이 은근하게 웃었다. 메이드가 그녀의 잔이 빈 것을 보고 다시 한번 홍차를 따랐다.

    레이디 켈튼이 당황한 게 훤히 보였다. 그러나 라크시스 옌은 이내 몸을 느슨하게 의자에 기댔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 이거지.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까딱까딱 두드렸다. 어느새 피어난 여유가 남자의 만면에 가득했다.

    “물론입니다. 레이디 로드리치. 그래서 이쪽의 탐정에게 의뢰하고 싶은 건 무엇입니까?”

    밀레이나가 레베카에게 눈짓했다. 보아하니 로렌 허슬러에게 의뢰할 것이 있는 사람은 밀레이나가 아닌 레베카였던 모양이었다.

    레베카가 쭈뼛거렸다.

    “…미스 허슬러.”

    “네, 말씀하세요. 미스 레베카 뮐러.”

    소녀는 아직까지도 사흘 전에 겪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무의식중에 공포에 반응해 파르르 떨렸다. 밀레이나는 레베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레베카는 용기 내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니라 살해당하신 거예요. 아버지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주세요.”

    * * *

    로드리치가를 나서는 시아와 라크시스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데요?”

    “모든 게 시아 당신이 말한 대로 되었군요. 헐벗은 동사자에 대한 조사는 그가 왜 헐벗고 죽었느냐보다, 왜 그가 홀로 추운 환경에 남겨져 있었냐에 초점이 맞춰져야 된다고 했다는 것 말입니다.”

    따각따각. 말굽이 울리는 박자에 맞춰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아무리 좋은 마차라고 해도 말이 끄는 마차는 확실히 증기 마차와 달랐다. 곧장 켈튼저로 돌아갈까 하다가 이번 시간 여행에서 땅을 밟아본 일이 드물다는 걸 깨닫곤 시내 구경이나 해보자고 했던 게 화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불편함도 잊은 것처럼 대화에 몰두했다. 로드리치가에서 얻은 뜻밖의 수확 때문이었다.

    “결국 우린 지금 프레디 뮐러가 죽게 된 이유에 대해 조사하게 됐잖습니까?”

    “그렇죠. 결국엔 라크가 궁금해하던 것들에 대해 조사하게 됐네요.”

    마차만큼 옛 귀족들이 밀회의 장소로 선호했던 곳도 없었다. 좁디좁은 마차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라크시스와 그것도 단둘이. 어제 그가 했던 행동이 떠오르고 만다. 요르문이 훼방을 놓지 않았다면 어디까지 갔을까.

    하지만 시아는 이내 그 생각을 지워냈다.

    “그나저나 미스 헬렌이 프레디 뮐러의 숨겨진 딸이었다니. 정말 몰랐어요.”

    “저도 몰랐습니다. 뮐러가의 반지가 아니었더라면 믿기 어려웠을 겁니다.”

    마차가 아르카나 광장의 동상을 빙그르르 돌았다. 아르카나 시내를 한 번에 훑어볼 수 있는 코스 중 하나였다. 분수대에서 솟아오른 물줄기가 용 조각에 알알이 부딪히며 빛을 반사했다.

    거리 곳곳에 사교 시즌을 즐기는 남녀가 눈에 띄었다. 그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역시 사월이었다.

    약 한 시간 전이었다.

    ‘좋아요, 의뢰를 수락하겠어요. 우린 당신을 보호하고, 당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조사해 주면 되는 거고……. 자, 의뢰에 대한 대가는 저의 성공적인 사교계 데뷔로 받는 걸로. 맞죠?’

    이왕 탐정이 된 거, 할 건 확실히 하자고. 시아는 후에 밀레이나가 다른 말이라도 할까 봐 의뢰 계약서를 작성했다.

    ‘여기 아래쪽에 서명해 주겠어요? 네, 좋아요. 다 됐네요.’

    다행히 헬렌, 아니 레베카는 군말 없이 의뢰서에 서명을 했다. 유려한 서체로 남긴 서명을 보니 뮐러가의 영애라는 그녀의 정체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의뢰받은 사건을 조사하기에 앞서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든 물어보세요. 미스 허슬러.’

    시아는 왜 그 당시 경찰에 프레디 뮐러의 재수사를 요청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정황상 범인이 카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그늘에서 법을 피해 저주를 퍼뜨리던 카얄을 무슨 수로 경찰이 잡겠는가. 그의 뒤를 파헤치다가 도리어 애꿎은 경찰들이 죽어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돌아가신 미스터 뮐러가 경비행기 사고 직전에 따로 남긴 말씀은 없으셨나요? 아니면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셨다든가요.’

    단서가 될 만한 건 뭐든 상관없어요. 범인은 언제나 흔적을 남기거든요. 시아는 탐정을 열연하며 카얄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레베카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어릴 적의 기억 한 조각을 끄집어냈다.

    ‘아버지는 별장에 자주 머무르셨어요. 뤼스, 아시죠? 모르간과 브라이던힐 사이에 있는 소도시요. 거기에 뮐러가의 영지가 있거든요. 아버지는 일이 잘 안 풀리실 때마다 뤼스의 별장에 가서 쉬곤 하셨어요. 그게 연구든 회사일이든 말예요.’

    벌써 팔 년도 더 된 일이었다. 프레디는 한적한 시골 영지에 농지를 사서 별장을 짓곤 그곳을 꽤나 자주 찾았다. 하지만 말만 별장이었을 뿐, 프레디는 뤼스에만 다녀오면 언제나 지쳐있었다. 별장이 쉬러 가는 곳임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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