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여러모로 사람 놀라게 하는 자였군그래.”
밀레이나는 다 비운 찻잔을 내려놓았다. 목이 말랐는지 저도 모르게 벌컥벌컥 들이켰던 모양이다.
하긴, 겉모습만 젊지 속은 저보다 곱절은 늙은 능구렁이나 다름없는 남자인데. 사교계가 아니더라도 노련한 화법을 쌓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이쪽에서 연락을 주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 되었지. 헬렌이 누군지 알고 있는 자라면 얘기도 빠르겠어.”
밀레이나는 헬렌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로렌 허슬러에게 이걸 주고 싶어요.’
몸이 다 회복되지도 않은 헬렌이 밀레이나를 찾아와서 제일 처음 한 말이었다. 그녀가 로렌 허슬러에게 주고 싶다고 한 건 다름 아닌 그녀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응접실로 모실까요?”
괘종시계의 바늘이 어느덧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밀레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곧바로 정원으로 오라고 전해주게.”
“예, 주인님.”
메이드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누군가가 생각난 밀레이나가 물었다.
“아, 헬렌은 지금 어디 있나?”
잠시 대답을 미루던 메이드가 이렇게 답했다.
“아가씨도 정원으로 모실까요?”
아가씨. 하루아침에 메이드에서 소공녀로 신분이 상승해 버린 그 아이를 칭하는 말일 터다. 따로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호칭을 바꿔 부르는 사용인이 괘씸하긴 했으나, 밀레이나는 고개 숙인 메이드를 꾸짖지 않았다.
“그래 주면 고맙겠군. 어서 나가보게.”
【 괴짜 가주의 별장 】
한편, 로드리치 저택 이 층의 손님방에선 때아닌 훈기가 돌았다.
“진짜로 로렌 허슬러가 편지를 보냈다고?”
“응, 진짜로.”
침대에 앉은 헬렌이 어안이 벙벙하여 대답했다. 로렌 허슬러가 정말로 온다니. 그녀 앞에선 깨끗한 메이드복을 입은 에밀리가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다.
“그럼 오늘 오는 손님이 로렌 허슬러란 말이야?”
“그렇겠지……?”
와, 하는 감탄사가 터진다. 앨런 어셔의 소설을 독파한 에밀리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열린 창문으로 아직은 쌀쌀한 봄바람이 불었다. 헬렌은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당겼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구름처럼 부드러운, 좋은 이불이었다.
로렌시아호가 사고로 급하게 착륙한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그 짧은 사흘 동안 헬렌을 향한 대우는 하늘과 땅이 뒤바뀌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오랫동안 야, 너 하며 허물없이 굴던 동료들이 자신을 아가씨라고 불렀다. 창 하나 겨우 나있던 비좁은 잠자리도 대뜸 하늘하늘한 캐노피가 드리워진 이 층의 손님방으로 바뀌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모두 이 저택에 오기 전 누렸던 것과 비슷한 것들로 준비되었다. 사방에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인력이 깔렸다. 그러나 헬렌은 이런 변화가 기껍지 않았다.
자신의 신변이 달라졌다는 건, 분명 뮐러가와 관련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신문엔 온통 제 얘기뿐이었다. 이젠 지면을 가득 메운 활자를 보기가 두려웠다.
추운 건지 긴장된 건지, 손끝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낯선 가운데, 그녀에게 안정을 주는 건 유일하게 자신을 전처럼 대해 주는 건 에밀리뿐이었다.
“너 추워?”
“응, 조금.”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불 좀 키워줄게.”
“아냐, 에밀리! 나 괜찮…….”
그녀를 채 말리기도 전이었다. 에밀리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부지깽이로 벽난로를 쑤셨다. 새 장작을 낑낑거리며 던져 넣곤 톱밥 묻은 팔을 자랑스럽게 펼쳐 보인다.
“어때? 좀 괜찮아?”
“으응. 고마워. 이제 좀 따뜻하다.”
거짓말이었다. 장작을 넣었다고 해서 한순간에 방이 따뜻해질 리가. 하지만 헬렌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이따 네 옆에서 슬쩍 구경하면 안 될까? 로렌 허슬러 말이야.”
“주인님이 허락하지 않으실걸.”
“하지만 네가 허락하면 되잖아, 헬렌.”
“…내가 뭐라고 그런 걸 허락하겠어.”
“와, 이제 와서 발뺌하기야? 레베카 아가씨?”
에밀리가 연신 레베카라는 이름을 부르며 볼멘소리를 했다. 헬렌은 고개를 떨궜다.
레베카 뮐러.
죽은 프레데릭 뮐러의 하나뿐인 핏줄이자, 뮐러가의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상속자.
그녀는 남대륙 가멜에 방문한 프레디가 하룻밤을 보낸 식민지 여인에게서 태어났다. 제국에선 검은 피부의 사람들을 제국민으로도, 같은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았던 탓에 그녀의 어머니는 프레디와 정식으로 혼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프레디를 찾지 않았다. 제국민 남자와 밤을 보낸 식민지 여인이 으레 그러하듯 홀로 그녀를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룻밤 불장난으로 제 핏줄이 생긴 것을 뒤늦게 깨달은 프레디가 남대륙에 찾아왔다. 그는 가멜을 이 잡듯이 뒤져 두 모녀를 찾아냈으나,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병으로 사망한 후였다.
‘레베카, 네 이름은 이제부터 레베카란다.’
주문을 외듯 레베카라는 이름을 연신 입술에 꾹꾹 눌러 담던 프레디는 곧 어린 딸을 데리고 제국으로 돌아왔다. 딸로 인정하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던 듯, 그녀에게 뮐러의 성을 허락하고 귀족 영애들이 받는 교육을 똑같이 받게 하여 레베카를 어엿한 아가씨로 길러냈다.
레베카는 어느새 가멜에서 어머니와 지내던 시절을 잊었다. 대부호의 딸 레베카 뮐러에겐 부족한 것이 없었고, 그런 레베카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이들이 주변에 넘쳤기 때문이었다.
이름 모를 약혼자가 생긴 것도, 짝사랑 상대가 생긴 것도 그녀가 열 살 생일을 며칠 앞둔 그날 즈음이었다.
‘레베카, 당장 여기서 떠나야 한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레베카, 우리 딸. 사랑한다.’
레베카는 영문도 모른 채 저택을 떠나야만 했다. 이제 와 가멜인 혼혈의 자식이 부끄러워 버리는 거냐며, 집사의 품에 안겨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로드리치 저택에 도착해 메이드 숙소에 웅크려 지낸 지 며칠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세상에, 프레디 뮐러가 죽었다고?’
‘그가 타고 있던 경비행기가 추락했대! 북부 지르가나에서 말이야!’
레베카는 아버지의 부고를 신문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워낙에 유명한 사람이라 그의 죽음은 제국에 생중계되다시피 했다. 대부호의 급작스러운 의문사. 사방에서 들려오는 프레디 뮐러의 사망 소식에 레베카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을 떠나보내기 전 보였던 모습을 문득 떠올렸다.
아버지는 분명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스토킹이 아니라 살해 협박이었다. 아버지의 눈은 늘 충혈되어 있었고, 집에 돌아오는 날도 드물었다.
초조와 불안. 공포에 잠식된 프레디는 발작적으로 잠에서 깨어나 알 수 없는 말을 반복했다.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고 계속 중얼거렸었다.
‘그런 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일한 물건이.’
레베카는 낡은 로켓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헬렌, 또 그런다. 너 우울할 때마다 그거만 계속 손에 쥐고 있잖아.”
“아.”
에밀리의 말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헬렌은 반쯤 초점이 나간 눈으로 로켓에 붙들린 시선을 떼어냈다.
“너 괜찮아? 아직도 힘들어?”
에밀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럼, 괜찮아. 정말이라니까. 나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게 대답하는 헬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에밀리는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치는 헬렌을 못 본 척해주었다. 자신을 노린 저주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데, 심지어 헬렌은 함께 있던 수백의 승객을 희생양으로 삼은 저주의 타깃이 되었다.
죄책감이 크겠지. 그녀의 잘못이 아님에도 말이다. 에밀리는 헬렌의 등을 말없이 토닥여 주었다.
헬렌의 울음이 잦아든 후였다.
“오래전부터 물어보고 싶긴 했는데, 대체 그 로켓 안엔 뭐가 들었어? 약혼자 머리카락? 아님 애인 눈 그림?”
“이건 아버지의 유품이야. 안엔 내 어린 시절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엄마야. 로켓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나 차라리 모르던 때가 나았을 뻔했다. 에밀리는 입을 다물었다. 헬렌이 로켓을 열어 보여준 건 아니었지만, 왠지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실수로 봐버린 기분이었다.
“아……. 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동안 계속 캐물어 왔는데.”
“미안하긴. 내가 일부러 말 안 했던 건데 뭐.”
헬렌은 멋쩍게 웃었다. 사실 로켓 안에 있는 건 그녀의 초상화 같은 게 아니었다. 실수로라도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될,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지켜달라고 당부한 뮐러가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로렌시아호에서 반지의 보석이 터지던 날.
‘로렌 허슬러는 평범한 존재가 아니야.’
보석을 낚아채던 로렌 허슬러. 그녀는 고대 마법사라는 라크시스 옌보다 경이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간. 마법사. 아니, 그 이상의 존재.
헬렌은 직감했다. 로렌에게라면 뮐러가의 비밀을 믿고 맡길 수 있을지도 몰라.
에밀리는 민망해서 벌렁 드러누웠다.
“그나저나 네가 귀한 아가씨라는 걸 짐작하긴 했는데, 뮐러가의 상속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얘. 이제 다이아몬드로 목욕하는 거야?”
“…아무리 다이아몬드 광산을 가졌다고 해도 그렇게는 못 해, 에밀리.”
짧은 사흘 동안 벌어진 일은 또 있었다. 바로 저택을 드나들던 수많은 변호사들이었다. 레이디 로드리치는 이번 기회에 아예 자신의 존재를 공고히 하려고 결심한 모양이었다.
간단한 서명 하나에, 뮐러가의 막대한 재산과 다이아몬드 광산의 소유권이 넘어갔다. 이제 헬렌은 문자 그대로 남부럽지 않은 재력의 아가씨가 되었다.
“헬렌, 아니 레베카 아가씨. 진짜 나 데리고 가줄 거지? 이제 이런 잡일은 그만하고 싶다구.”
에밀리의 포부를 들은 헬렌은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내 전담 메이드가 되어 유모 자리까지 꿰차기로 했다니. 그녀가 귀한 집 아가씨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했을 때부터 세워온 야심 찬 계획이라고 했다.
“하하, 네가 원한다면 그럴 순 있지만……. 내가 로드리치 저택에서 안 나갈 수도 있는걸?”
“뭐어? 대체 왜?”
실망한 에밀리가 빼액 소리쳤다. 아니, 뮐러 저택의 주인 되실 분이 왜 계속 여기에 있겠다는 거냐구! 에밀리의 투정에 두 소녀는 한참을 함께 깔깔거렸다. 방 안에 울려 퍼지던 웃음소리를 끊어낸 건, 레베카 뮐러를 찾아온 메이드였다.
“아가씨, 손님이 도착하셨으니 정원으로 모시겠습니다.”
메이드의 뒤로 중무장한 남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헬렌은 다시금 제 처지를 깨달으며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