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편지는 총 두 개. 라크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서로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블레어가와 로드리치가.
라크시스는 페이퍼 나이프를 들어 블레어가에서 온 봉투를 먼저 열었다.
깔끔하게 꾸며진 블레어가의 편지엔 잉크가 번져 떨리는 글씨로 짤막한 답신이 적혀있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이 정리된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 막스 블레어.]
“아직까진 준비가 안됐나 보지. 하긴 그런 일을 겪었으니 계속 몸이 떨릴 만도 해.”
시아가 슬쩍 끼어들었다.
“미스터 블레어는 뭐라고 하던가요?”
“그게, 누님. 막스 블레어는 아쉽지만 다음에 만나봐야겠어요.”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었다. 파티 중에 난데없이 납치되어, 온몸의 피를 모두 쏟아내는 경험이 쉽게 잊힐 리가 없다. 게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저주로 인해 함정에 빠지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겠는가. 요르문은 편지를 곁눈질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로드리치가에서 온 것도 열어보도록 하죠.”
블레어가와는 또 다른 느낌의 봉투였다. 고급지로 만들어진 편지 봉투에선 고상한 분위기의 향수 냄새가 났다.
라크시스는 이번에도 페이퍼 나이프를 들어 우아하게 봉투를 갈랐다. 말린 꽃을 붙여 장식한 두터운 종이에는 단 세 문장만이 적혀있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다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의뢰를 마무리 지었으면 좋겠군. 내일 오후 세 시에 손님 맞을 준비를 해두지.
- 밀레이나 로드리치]
라크시스가 눈썹을 밀어 올렸다.
“성공이네요.”
그 광경을 곁눈질하던 시아도 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녀의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이게 진짜로 된 거예요?”
급하게 만든 명함과 편지를 보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라크시스가 보내자는 대로 편지를 보내긴 했는데 그게 먹혔다니. 긍정적인 답이 왔으니 좋긴 했으나, 여전히 모든 게 의문이었다.
솔직히 그의 편지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그 편지를 받았다면 무슨 소리냐며 불쏘시개로 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가 세운 계획인데, 실패할 리가.”
“예에. 그러시겠어요.”
또 재수 없지. 시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어쨌든 레이디 로드리치가 우리더러 만나자고 했으니 계획은 성공이었다.
애초에 내 목표는 미스 헬렌을 만나는 것이었으니까.
“이대로라면 당신이 원하는 바도, 내가 원하는 바도 모두 이루게 되겠군요.”
“저와 라크가 원하는 바요?”
“밀레이나 로드리치라면 당신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테죠. 저와 요르문, 밀레이나 이 셋이 곁에 버티고 있다면 대공도 쉽사리 당신을 어쩌지 못할 겁니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기 두려우면 그만둬도 된다고 했으면서, 사실은 이렇게 모든 준비를 해두고 있었던 거다. 그녀가 원하는 건 언제든 이루어줄 준비.
시아는 허탈한 한숨을 쉬면서도 기분 좋게 웃었다.
“정말이지 라크는 못 당하겠어요.”
“제가 말씀드렸죠. 이제 제 목표는 당신뿐이라고. 당신이 원하는 건 제가 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시아를 바라보는 라크시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으웩. 요르문이 못 볼 꼴을 봤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진짜 시작이군요. 시아, 각오는 됐겠죠?”
“그럼요. 이번에도 잘 부탁해요.”
시아가 상기된 낯으로 손을 내밀었다. 라크시스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물론입니다, 로렌.”
* * *
[…하여 뮐러가의 여인이 신변에 위협을 느껴 도움을 청한바, 탐정 로렌 허슬러는 귀하의 의뢰를 수락하여 의뢰인을 보호하기로 하였습니다.
의뢰를 위한 만남은 로드리치 저택 혹은 켈튼 저택에서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의뢰에 대한 대가는 의뢰비가 아닌 레이디 밀레이나 로드리치의 드높은 명성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원하는 일시와 장소를 적어 답신을 보내주십시오.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탐정 로렌 허슬러]
밀레이나는 편지를 도로 접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사무용 황색 편지 봉투에는 허슬러 탐정 사무소라는 발신인이 떡하니 적혀있었다. 밀레이나는 바싹 마른 목을 차로 축였다. 라크시스 옌은 정말이지 비상하고도 영악한 자였다.
사교계의 중심으로 군림하면서 돌려 말하는 화법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라크시스 옌이 보내온 편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탐정 로렌 허슬러라니. 밀레이나는 코웃음을 쳤다.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이었던가. 워낙 유명하여 통속소설 따윈 거들떠보지 않는 밀레이나마저 짬을 내어 읽었던 소설이었다. 그 소설이 나오고 나서, 사람들이 실제와 허구를 헷갈리며 로렌 허슬러의 정체를 점점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인물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 로렌 허슬러의 이름을 빌려 편지를 보냈다. 그것도 소설에서처럼 의뢰를 받은 탐정이 답신을 보내는 형식으로 말이다.
게다가 명함까지 떡하니 보냈다. 있지도 않은 탐정 사무소의 주소까지 적혀있는 것을 보니 헛웃음이 났다.
‘애초에 이쪽에선 의뢰를 보낸 적도 없건만.’
기상천외한 방식이었다. 밀레이나는 켈튼이나 옌과 교류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지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사교계와 내내 연을 끊고 중립을 지키던 그들의 연락을 받는다는 건 사교계 너머 정치판의 이목까지 집중시키는 일이었다.
제위에 혈안이 된 노든 대공이 라크시스 옌과 요르문 켈튼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가 새의 몸을 빌려 가면서까지 켈튼 저택을 들여다보는 건 몰랐지만, 밀레이나는 차탈이 여러 사람을 통해 라크시스와 요르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근엔 로렌 허슬러의 정체를 파헤치느라 정신이 없다고 들었다. 밀레이나는 알 만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헛된 곳에 힘을 빼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지도자가 되는 경우는 본적이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공이 이렇게까지 라크시스 옌에게 집착하진 않았는데 말이야.’
아마 라크시스가 보내는 편지 내용도 알게 모르게 대공의 귀에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라크시스 옌은 그런 대공을 보란 듯이 약 올리기 위해 일부러 의뢰서 형식의, 존재하지도 않는 탐정 사무소의 주소로 밀레이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기서 대공이 조금이라도 잘못 처신했다간 곧바로 체면을 구기고 말 것이다. 그가 마음 넓은 황자가 아닌 치졸한 스토커라는 게 밝혀지면 황위 승계는 단번에 물 건너갈 터다.
‘하여간 참 대단한 사람이야.’
밀레이나는 동봉된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주름진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로렌시아호에서 헬렌을 노린 사건이 벌어진 이후부터 밀레이나는 줄곧 초조해했다. 라크시스 옌은 그런 그녀의 상태를 꿰뚫고 있었다.
그는 헬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편지에 쓰인 ‘뮐러가의 여인.’ 그건 분명 헬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라크시스 옌은 헬렌의 정체를 인질로 잡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뮐러가의 여인이 신변에 위협을 느껴 도움을 청했다, 라. 헬렌의 신변에 위협이 될 일은 오로지 뮐러가를 선혈로 물들인 살인마가 헬렌 앞에 나타나는 일뿐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살인마가 나타나기는 했지. 그것도 그 애를 노리고.’
그날의 일이 여전히 눈에 선명하다. 루즈 부인이 헬렌이 없어졌다고 했을 때,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던가.
‘제가 뭐에 홀리기라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아이에게 홀로, 별관 청소를 하라고 했는데, 그 이후로 아, 무도 헬렌을 본 적이 없어서…….’
그때 무도회장엔 기이하고도 몽롱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밀레이나는 직감했다. 뮐러가를 몰살시킨 살인마가 결국엔 헬렌을 찾아냈구나.
주신 디아우스가 도우셨을까. 헬렌은 기적적으로 살아서 그녀의 품으로 돌아왔다.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크게 다친 곳은 없었고, 화상을 입은 손은 치료를 받아 붕대에 곱게 싸여있었다. 헬렌은 계속 울면서 같은 말만 되뇌었다.
‘로렌, 끄흐어업, 허슬러가 저를, 끅, 구해줬어요.’
처음엔 헬렌이 큰 충격을 받아 헛소리를 하는 줄 알았다. 로렌 허슬러라니, 그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탐정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튿날, 로렌시아호에서 내려 저택으로 돌아온 지 꼬박 하루 만에 로렌 허슬러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것도 의뢰를 받은 탐정 행세를 하면서.
그제야 밀레이나는 별관 2028호에서 마주쳤던 여자가 로렌 허슬러이자, 라크시스 옌이 그렇게나 싸고도는 시아 켈튼이란 걸 알아챘다.
“로렌 허슬러라…….”
밀레이나는 명함에 보기 좋게 음각된 그녀의 이름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라크시스 옌이 로렌시아호의 탑승객 명단에 레이디 시아 켈튼을 버젓이 실어놓았던 것이 기억난다. 어디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유명한 레이디.
바로 탐정 로렌 허슬러의 진짜 정체로 알려진, 켈튼가의 방계 여식이었다.
하지만 그건 추측이었을 뿐, 실제론 그 누구도 로렌 허슬러나 시아 켈튼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그 둘을 동일 인물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밀레이나는 로렌 허슬러와 시아 켈튼이 같은 사람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세상 혼자 살 것처럼 구는 그 마법사가 애지중지 여기는 여인이 그 둘이었으니까.’
그렇게 혼자 숨겨두고 보려던 여인을 내보이려니 이리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밀레이나는 편지의 다음 구절로 눈길을 주었다.
라크시스 옌은 헬렌의 신변을 보호해 주겠노라 말했다. 대신 그는 밀레이나에게 제안을 해왔다.
‘레이디 켈튼의 샤프롱이 되어줄 것.’
귀족가의 여인들이 사교계에 발을 들이기 위해 필수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샤프롱이었다. 정숙과 조신을 최고로 치는 제국에서 무도회에 홀로 참석하는 여인은 용납되지 않았다.
라크시스 옌은 의뢰비 대신 밀레이나의 명성을 원했다. 밀레이나 로드리치가 누구인가. 사교계의 대모요, 클럽 로얄의 위원회장 되시는 몸이다. 최고의 신랑감을 찾기 위해 그녀의 티 파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레이디들이 수두룩한 걸 생각해 본다면, 밀레이나의 명성이란 다름 아닌 현재 레이디 켈튼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일 가능성이 컸다.
부, 명예, 작위 무엇하나 빠지는 것 없는 레이디 켈튼에게 유일하게 없는 건 나이 지긋한 집안의 어른이었다.
샤프롱이 필요한 대상이 레이디 켈튼이란 건 어떻게 알았냐고? 그것이야말로 노련한 감이었다. 라크시스가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샤프롱을 구해줄 레이디가 그의 연인이란 소문이 도는 로렌 허슬러, 그러니까 레이디 켈튼을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느냔 말이다.
아마도 편지에 직접적으로 쓸 수 없었겠지. 로렌 허슬러의 정체를 그토록 숨기고 싶어 하던 라크시스 옌이라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