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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61)화 (161/292)
  • 161화 

    ‘그땐 눈치라도 보면서 물어봤지, 지금은…….’

    헨리 던로를 함정에 빠트려 보자고 제안했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허물없고 가까워진 모습이었다. 첫 만남 땐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신사와 숙녀의 매너를 엄격하게 지키던 그가 이젠 허락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는다. 슬쩍 기대어 오기도 하고, 감격에 겨워 부둥켜안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더 마음에 든다면.

    ‘나 정말로 라크시스를 의식하고 있나 봐.’

    가슴속에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감정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시아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돼서 차라리 다행이네요.”

    “뭐가 말입니까?”

    “프레디 뮐러도 그렇고, 라크가 미스 헬렌에 대해 조사하는 것에 의욕을 가져주는 것 말이에요. 그것도 저와 함께요.”

    그러자 라크시스가 예의 고고한 고대 마법사의 모습으로 돌아와 거만하게 대꾸했다.

    “카얄과 관련이 있으니 그런 거죠. 저도 마냥 한가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민망한 게 분명했다. 시아는 간만에 깔깔거리며 웃었다.

    “하하, 그렇다고 해줄게요.”

    라크시스에게서 이렇게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그가 이렇게 허물어지는 것도 아마 내 앞뿐일 거다.

    라크시스가 말했다.

    “그나저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로렌 허슬러의 이름으로 탐정 사무소라도 차려두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엊그제였다. 로렌 허슬러의 이름을 사용해도 되냐고 난데없이 물어오더니, 눈앞에서 로렌 허슬러의 명함을 슥슥 만드는 게 아닌가.

    ‘어디에 쓰게요?’

    ‘로렌 허슬러가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볼까 합니다.’

    그러더니 아예 로렌 허슬러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달라 부탁하는 게 아닌가. 그의 요청대로 쓴 건 편지가 아니라 의뢰서였다. 후에 그 편지와 명함이 로드리치가로 향할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시아는 책상 위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로렌 허슬러는 그저 내가 만든 가짜 신분일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일이 커졌을까.

    “탐정 일을 하는 레이디라니, 그것만큼 이목을 끄는 일도 없을 텐데요?”

    “이제 그 정도론 사람들 관심을 못 끌 겁니다. 워낙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라.”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라니. 시아는 흐응, 콧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곤 라크시스를 추궁했다.

    “그래서 슈나이더 경감님에게 책을 내라 부추겼고요? 제가 미래에서 가져온 소설을 보여주면서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아 역시 그에게 더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라크시스가 이렇게 판을 깔아둔 덕에, 지금 그녀가 비교적 관심을 덜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니까.

    이것도 설마 라크시스의 계획에 있었던 일일까. 시아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시아는 몰랐다. 그의 계획에 라크시스 옌과 로렌 허슬러가 연인으로 소문나는 일까지 있었던 것을.

    “진짜 이런 데선 라크를 못 당하겠어요. 시간 여행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라크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렇습니까?”

    “적으로 돌리면 제일 까다로운 사람일걸요. 그래서 대공이 그렇게 라크를 경계하나?”

    시아의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혔다. 라크시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말아요. 난 진지하다고요.”

    “저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당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저라서.”

    정말이지 낯뜨거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할 말을 잃은 시아의 입술이 쏙 말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공기 사이로 묘한 기류가 흘렀다.

    “시아.”

    열린 창으로 봄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물결치듯 날리는 하얀 레이스 커튼에 간질거리는 열기가 묻어난다.

    언제부터인가 그와 단둘이 있으면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고 만다. 예전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라크시스를 의식하게 된 후부터였다. 정확히는 그가 그녀에게 친구로 남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던 그날부터.

    라크시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안 그래도 가까웠던 얼굴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가 잠시 멈춰 섰다.

    “…조금 더 가까이 가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의 긴 속눈썹을 하나하나 다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다를 닮은 짙푸른 눈동자가 용암처럼 뜨겁게 넘실거린다. 그녀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걸까. 조각 같은 얼굴이 천천히 기운다. 그의 숨결이 이마를 타고 느릿하게 궤적을 남기며 내려온다.

    지금 뭐지.

    이거 뭔데.

    그의 말랑한 입술이 시아의 코끝을 스쳤다. 뜨거웠다. 모든 것이 충동적이었다. 시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피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 아까 뭐 먹었더라. 두방망이질 치던 심장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잘들 놀고 계시네요. 누군 눈알 빠지게 서류보다 왔는데, 둘은 그렇게 사람 염장 지르고 있다 이거죠?”

    빈정대는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요르문이었다.

    “요르문!”

    시아가 황급히 떨어져 나갔다. 새빨개진 얼굴을 채 숨기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요르문에게 인사했다.

    라크시스가 그를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노크 하는 법도 모르나?”

    “했거든. 자네가 못 들은 거겠지.”

    요르문이 혀를 날름 내밀곤 곧장 방으로 들어섰다. 성큼성큼 걸어와 시아의 맞은 편에 털썩 앉았다.

    그 뒤를 따라 피골이 상접한 메이슨이 흐릿해진 인상으로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하하, 안녕하세요. 레이디 켈튼.”

    “두, 둘 다 어서 앉아요. 피곤하죠? 사람 만나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요르문은 넓은 자리를 두고 굳이 소파 하나에 나란히 앉아있는 시아와 라크시스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보나 마나 라크 녀석이 또 은근슬쩍 곁에 앉은 걸 테다.

    사실 요르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라크시스가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리며 시아의 입술에 다가가던 순간을 목격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고백을 하고 제대로 연애를 하든가. 하지만 왜인지 라크시스는 시아에게 정식으로 구애하지 않았다.

    시아를 떠본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귀애해, 그녀의 마음이 제게 있단 확신이 들기 전까지 머뭇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라크시스의 원래 성격을 생각한다면 진작 구애부터 고백, 약혼과 결혼까지 밀어붙였어야 하는데.

    매번 저렇게 가슴 졸이는 외줄 타기를 하고 있다. 누님도 라크에게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순전히 라크시스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녀가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봤으면 좋겠다는 욕심. 아마 거절당해 본 게 처음이라 저런 것일 터다.

    중세 이후에 새로이 생겨난 시간선. 그때의 라크시스는 충동적으로 시아에게 고백을 했더란다. 충동적이었지만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레이디 시아 켈튼. 제가 당신과 정식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그때의 시아가 뭐라고 대답을 했던가.

    ‘좋아요. 대신 조금만 더 시간을 줄래요?’

    라크시스는 시아의 머릿속에 그 순간이 존재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다. 요르문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대답은 거절이 아니었다고 설명했지만, 라크시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완벽을 사랑하는 그에게 있어, 시아의 대답은 거절과 다름없었다.

    그때 이후로 멍청이처럼 내내 저러는 것이다. 요르문은 라크시스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지금의 누님을 보면 라크시스의 구애를 받아줄 것 같은데. 라크시스는 뭐가 불안한지 여전히 뜸을 들이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 때문에 헬릭스의 고백을 거절했단 걸 알면 희열로 눈이 뒤집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눈꼴신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던 요르문은 결국 부아가 치밀어 훼방을 놓았다. 열받은 라크 녀석이 이참에 누님께 아예 고백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러다 차이면 진짜 재미있겠네.’

    버림받은 라크시스를 떠올리며 요르문은 속으로 낄낄거렸다. 라크시스 때문에 약 올랐던 게 한 번에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한편 그런 눈치라곤 전혀 없는 메이슨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레이디는 정말 대단하세요. 솔직히 인터뷰는 제가 아니라 레이디께서 하셨어야 되는 건데.”

    “아녜요! 전 그저 힌트만 살짝 준 건데요.”

    “그게 힌트라니, 레이디께선 정말 모르는 게 없으세요. 공학자도 아닌데, 고온 상태에서 액화한 갈리프콜을 엔진 동력으로 쓸 생각을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메이슨은 퀭한 눈으로 열렬한 존경을 표했다. 방금 전까지 모르간 타임즈의 기자와 무려 세 시간이나 인터뷰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요르문과 메이슨, 두 사람이 이렇게 시달리게 된 건 다름 아닌 로렌시아호의 두 번째 동력, 갈리프콜 엔진 때문이었다.

    레이디 로드리치의 자선 파티가 실패로 끝난 이후, 아이러니하게 로렌시아호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저주가 발동되던 날 밤 자정, 비행선의 동력이 잠시 끊어졌던 일 때문이었다.

    당시의 승객들은 만약 엔진이 꺼져 그대로 추락했으면 어쨌을 거냐며 로렌시아호의 결함을 말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누군가가 마정석 엔진 기관에 손을 댔다.

    그 말인즉 비행선의 추락을 유도했다는 뜻이었다. 시아 일행은 그것이 카얄의 짓임을 알아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어둠의 사도가 제국을 활개 치고 다닌다는 사실을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동력이 나가 당장 추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비행선이 아무 탈 없이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땅으로 내려왔다. 바로 비상시를 대비해 장착해 둔 갈리프콜 엔진 때문이었다.

    마정석 없이도 하늘을 나는 방법을 고안해 낸 발명가, 메이슨 비렌체.

    갈리프콜 엔진은 시아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라크시스가 메이슨에게 언질을 준 덕에 발명된 물건이었다.

    “레이디가 아니었음 지금쯤 전 이 세상에 없었을걸요.”

    사실이었다. 로렌시아호가 오로지 마정석 엔진으로만 가동되는 비행선이었다면, 카얄이 저주를 발동하는 순간 추락했을 것이다. 자정이 되기 직전, 발자크를 목격한 요르문이 비상 동력을 가동시키라고 명령한 걸 메이슨이 곧바로 따른 덕에 로렌시아호는 무사할 수 있었다.

    “어떻게 고온 액화 상태의 갈리프콜을 연료로 쓸 생각을 하셨어요? 레이디는 제가 만났던 누구보다 비상한 분이에요. 맨틀러 교수님보다 더요!”

    “그런 칭찬은 부담스러운걸.”

    시아는 멋쩍게 코끝을 긁었다. 라크시스는 여전히 요르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걸음한 걸 보니 편지가 오긴 했나 보군.”

    “그래. 자네가 기다리던 답장이 왔다고.”

    요르문은 라크시스의 살벌한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곤 봉투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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