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제가 그 생각을 안 해봤겠습니까. 그가 자주 출몰한다는 사교 클럽에도 가보고, 로드 젤마니를 따라 발자크가 나타날 법한 곳에도 가보았는데 일부러 피하기라도 하는 듯 제가 갈 때마다 없더군요.”
일부러 피한다고.
“…라크를 피하는 것 같네요?”
“그것도 카얄이 ‘인간’과 다름없는 상태와 관련 있을지 모르죠. 제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라크시스가 한숨을 쉬며 말을 맺었다. 결국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물어보면 대답이야 해주겠지만, 왜인지 지금의 라크시스에게는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 많은 곳만 다니는 걸까요? 보는 눈이 많은 데에서 발자크를 죽이면, 라크는 광룡을 처단한 영웅이 아니라 그저 살인자가 되니까요.”
“아, 그건 생각해 보지 못했군요.”
“잠깐 인간 행세를 하는 카얄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으면서, 그 뒤처리는 생각 안 해봤어요?”
그러자 라크시스가 품 안에서 귀하게 생긴 두루마리를 꺼냈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요.”
라크시스가 내민 건 황제의 서명이 있는 특별 수사 허가권과 면책 특권 증명서였다.
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새삼 그가 고대 마법사라는 걸 떠올리게 된다. 제국에서 유일하게 황제랑 맞먹을 수 있는 존재, 아니 엄밀히 따지면 황제보다도 더 무서울 수 있는 존재.
사람을 죽여도 벌받지 않을 수 있는 존재라니. 물론 사회적으로는 매장당하겠지만 말이다.
“오해하진 마시죠. 저도 상식이라는 게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오해는 하기도 싫어요!”
시아는 빼액 소리 질렀다. 가끔가다 보이는 저런 모습이 무서운 걸 본인은 알까 몰라. 이럴 때마다 그가 스스로를 오래 살아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고 표현하던 게 이해되곤 한다.
라크시스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니 발자크의 뒤를 쫓은 것 때문에 대공의 오해가 심해진 것도 있겠군요. 제가 클럽에 발걸음을 한 것을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하려고 그런 것이라고 여길 만도 합니다.”
“별걸 다 오해하네요. 제 발 저린 도둑이 따로 없네.”
시아가 입을 삐죽 내밀자, 라크시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내 무표정이던 남자가 처음으로 보인 감정이었다.
시아는 이때다 싶어 어필했다.
“아무튼 그런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라도 제가 정체를 드러내는 게 편할 거예요. 카얄이 신사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제국을 활보하니, 저 역시 숙녀가 되어야 그를 쫓을 수 있겠죠. 대공의 문제도 문제겠고요.”
“당신은 정말이지 못 말리겠군요.”
“이번 미스 헬렌 사건도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봉인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카얄은 그 사실을 알고 헬렌을 함정에 몰아넣었고요.”
봉인을 파괴하지 못하는 카얄. 그런 그가 저 대신 봉인을 열어줄 존재로 선택한 것이 바로 미스 헬렌이었다.
왜 그녀였을까? 그녀는 어째서 봉인의 이상 마류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걸까?
“이번 시간 여행에서 봉인을 두 개나 찾았으니 쉬어도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라크도 알잖아요. 미스 헬렌이 사도 나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요.”
“압니다. 그래서 저도 미스 헬렌에 대해서는 조사할 생각이었습니다.”
라크시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시아는 차분하게 제 주장을 펼쳐나갔다.
“우린 미스 헬렌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 조사를 하더라도 가지고 있는 단서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쪽이 가진 단서는 봉인이 달려있던 반지와 헬렌이 말했던 뮐러가가 전부였다. 사실 그 두 단서가 어린 메이드와 무슨 관계인지도 전혀 모르는 데다가, 뜬금없이 등장한 뮐러가가 봉인과 관련이 있는 단서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0과 1의 차이는 천지 차이라고. 단서가 아예 없는 것과 조금이라도 있는 건 다르다.
“우리가 가진 단서는 뮐러가와 미지의 반지가 전부죠. 그런데 그 단서를 쥔 미스 헬렌이 지금 로드리치가에 있잖아요? 그녀에 대해 조사하려면 제겐 로드리치가에도 접근할 수 있는 신분이 필요해요.”
심지 곧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의사를 전달한다. 시아는 머릿속에서 세운 논리대로 라크시스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반짝였다. 라크시스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 마도 시대에 레이디 켈튼의 존재를 드러낼 결심이 섰어요. 예전 같으면 과거가 바뀌어 제가 살고 있던 원래 시대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부터 했겠지만.”
장식처럼 일렁이던 벽난로의 불빛이 시아의 뺨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시아에게서 머뭇거리는 기색이 보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라크시스가 방심하던 찰나였다.
“이젠 제 원래 시대만큼이나 라크도 제게 소중해졌거든요.”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라크시스의 푸른 눈이 커졌다.
“…방금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말을 라크시스는 황급히 붙잡았다. 고요하던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그토록 시간 여행으로 모든 게 엉망이 될까 두려워하던 그녀가 이런 말을 하다니.
라크시스는 입술을 억지로 다물었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 귀가 뜨끈해지는 것도 몰랐다.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시아가 화들짝 소리쳤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요! 라크는 제 시간 여행 파트너잖아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크시스는 차를 홀짝이며 창가에 앉은 새를 구경하는 척했고, 시아는 벽난로에서 발갛게 익어가는 장작에 고개를 돌리곤 곁눈질로 라크시스를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거리의 대화, 마차 바퀴 소리, 호외를 외치는 소년의 목소리 따위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결국 입을 먼저 연 건 시아였다.
“…어쨌든 전 이제 마음 단단히 먹었어요. 이런 가십 따위 라크와 같이 있으면 괜찮다고요.”
라크시스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입술 새로 가늘고도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까의 간질거리던 공기는 어디로 가고, 금세 불퉁한 표정으로 돌아온 라크시스가 길쭉한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뭐지. 무슨 뜻이지. 시아는 그의 속내를 알 길이 없어 애꿎은 찻잔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슬쩍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그가 돌연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들었다.
“제가 당신 뜻에 반기를 들 리가.”
뭐, 뭐야. 당황한 시아가 말을 멈췄다. 라크시스를 설득하기로 결심한 것도 잊고 소파 등받이와 하나가 된 것처럼 주춤주춤 물러났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걸 막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사교계 데뷔든 뭐든 다 해줄 겁니다.”
“갑자기 왜 이래요? 아까까진 그렇게 삐딱했으면서.”
시아는 당황하면서도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주장에 따라 말을 번복하기는 했어도, 라크시스의 진심이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 말대로 전 맹목적이고, 제가 원하는 바를 반드시 실행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이젠 반대 안 하겠다는 거죠?”
“제 목적은 이제 시아 켈튼뿐이니까요. 당신이 원하는 바가 제 목적입니다, 시아.”
그의 푸른 눈동자에 자신이 갇혀있었다. 그녀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라크시스는 온몸으로 맹목적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사람 같았다. 시아는 그의 시선을 황급히 회피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귀 끝이 달아올라 있었다는 것을.
시아가 빼액 소리 질렀다.
“부끄럽게 그런 소릴 잘도 하네요, 정말!”
아하하! 청량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라크시스였다. 예전엔 이렇게 소리 내어 웃는 일이 드물었는데. 홍조로 물든 그의 뺨이 입꼬리를 따라 휘어 보조개를 폭 찍어낸다.
“보여줄 게 있는데.”
“됐어요.”
“보고 싶을 걸요?”
토라져 있으면서도 라크시스가 은근하게 구니까 궁금한 모양이다. 등 돌리고 있던 시아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뭔데요?”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고양이 같다. 그래, 저 모습이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 못해 미칠 지경이다.
“미스 헬렌이 당신에게 던졌던 반지 말입니다. 제가 거기서도 단서를 좀 찾았는데.”
그녀가 꿈틀거리면서도 애써 자신을 모른 척한다. 궁금하긴 하지만 여기서 홱 고개를 돌리긴 자존심이 상한다 이거다.
라크시스는 일단 숙이고 들어갔다. 숙이고 들어간다는 말이 거창하긴 했지만, 라크시스 옌이 황제에게조차 쉽게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란 걸 생각한다면 정말로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니까 화 풀고 날 봐줘요.”
“…제가 언제 화났다고 그래요.”
“시아, 응?”
결국 백기를 든 건 시아였다.
“그래서, 반지는 어디 있는데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라크시스가 품에서 반지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요.”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서는 머리를 맞대고 반지를 살핀다. 사방에 널린 의자를 두고, 굳이 시아와 나란히 앉아서는 구태여 속삭이듯 말했다.
“이 자국이 보이십니까?”
“어… 글자 같은데요?”
보석(사실은 광룡의 봉인이었지만)이 사라진 발물림 가운데 자리에는 음각으로 파인 문양이 있었다. 반지라는 게 애초에 작은 물건이다 보니, 새겨진 문양도 굉장히 작았다. 시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반지를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구불거리는 뱀과 장미 덩굴에 휘감긴 이니셜 M. 폭발의 여파로 잔뜩 그을려 여기저기 상처가 나있었다. 기울여 빛에 비춰보지 않았더라면 보이지도 않았을 자국이었다.
아마 광룡의 봉인이 파괴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보지 못했을 흔적이겠지.
“N, 아니다, M인 것 같은데. 맞나요?”
“잘 보셨군요. 이건 뮐러가의 문장이에요, 시아.”
“뭐라고요?”
엄청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라크시스 때문에 두 번 놀랐다. 정확히는 초대 뮐러 가주가 사용했던 문장이라고 한다. 방계가 자리를 차지하면서 지금은 쓰지 않게 된 문장이라나. 장황한 귀족 계보를 곁들여 설명을 마친 라크시스의 표정이 뿌듯해 보였다.
“당신이 한 얘기가 맞는 것 같더군요. 미스 헬렌이 죽은 프레디 뮐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란 것 말입니다.”
라크시스는 시아가 제게 전해주었던 헬렌의 말을 떠올렸다.
‘전 이렇게 죽어선 안 돼요. 이렇게 죽어줄 수 없어요. 아버지가, 아버지가……. 뮐러가를 지켜달라고 하셨으니까.’
“그녀가 분명 뮐러가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었죠?”
“네, 그건 똑똑히 들었어요.”
라크시스는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했다. 기억 어딘가에 묻혀있던 오래된 사건의 자락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뮐러가의 마지막 가주인 프레데릭 뮐러의 죽음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