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아무튼 이놈을 얼른 가져가 주십시오. 이제 이 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니.]
그래, 울리아트가 이렇게 말했었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말이야.
‘광룡의 어둠이 지나치게 강한 힘이었던 거죠. 그러니 봉인도 약해진 거고요. 카얄이 인간과 다름없는 상태인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어요.’
시아가 헉헉거리며 말을 마쳤다. 그녀의 마지막 말에 담긴 뜻을 깨달은 라크시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카얄도 원랜 갈리프의 사도였으니까요.’
갈리프의 아홉 사도. 카얄과 봉인들이 지닌 공통점이었다.
‘파괴되지 않은 봉인도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게 되죠. 비행선 보일러실에서 찾았던 이번 봉인도 마찬가지예요. 카얄이 손대지 않았는데도 불안정해진 거잖아요?’
시아의 추리는 그럴싸했다. 불안정해져야만 존재가 드러나는 봉인. 인간과 다름없는 사도 카얄. 라크시스는 시아의 말에서 단서를 얻었다.
애초에 카얄은 고대 마도 시대에 광룡이 되었다가 한 번 실패했다. 신화서 원전에 나와있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카얄은 조각난 봉인의 힘이 아닌, 온전한 어둠을 받아들였던 전적이 있죠. 그의 몸은 그때 이후 줄곧 약해져 있었던 겁니다.’
라크의 말에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간다. 당장이라도 다무스의 몸을 뚫고 나올 것 같던 어둠. 카얄이 회수해간 힘이 그런 거라면, 그도 다무스 못지않게 광룡의 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라크시스가 가라앉은 눈으로 시아를 바라보았다.
‘사도는 역시 인간과 다른 존재이긴 한가 보군요. 그런 힘을 몸에 품고 이렇게나 긴 세월을 버틸 수 있다니.’
그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시아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렇지만 라크도 고대 마법사잖아요.’
‘이젠 알지 않습니까? 제가 사도가 아니란 걸요. 신화 속 아홉 사도 중에 제 이름은 없습니다. 전 우연히 방대한 마력을 타고 난 마법사에 불과합니다.’
‘그건 그렇지만…….’
루드윅 젤마니를 통해 얻은 갈리프 신화 원전의 사도 중엔 라크시스라는 이름이 없었다. 루드윅은 라크시스 옌이라는 이름이 인간 사회에서 위장을 위해 만든 신분일 거라고 박박 우겼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별수 있나.
‘제가 진짜 사도였다면 이렇게 당신을 만날 수 있었을 리가 없죠. 당구공만 한 돌덩어리가 되어 당신이 절 구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당구공만 한 돌덩어리라니. 라크시스의 농담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하긴 그가 사도였다면 지금쯤 불안정해진 봉인이 되어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라크. 정말로 옛날 기억은 안나요?’
‘…….’
어라. 웬일로 라크가 대답을 피했다. 과거에 대해 아무 기억이 안 난다곤 했지만, 혹시 몰라서 물어본 건데.
그의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그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설마, 내게서 또 초상화 속 은발 여인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시아는 라크시스의 양어깨를 붙들어 제게 돌렸다.
‘한눈 팔지 말아요. 그게 얼마나 사람 기분을……’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그를 붙잡았으나, 할 말을 잃은 건 도리어 이쪽이었다.
그의 팔이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싼다. 마치 왈츠를 추던 그 순간처럼. 당당하게 라크시스 앞에 나서던 땐 언제고, 시아는 순식간에 움츠러들었다. 도망치듯 떨어져 나가는 시아의 손을, 라크시스가 붙들어 그의 목에 둘렀다.
‘한눈 팔다뇨. 제가 당신을 두고 한눈을 팔았단 말씀이십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졸지에 그에게 안긴 꼴이 되었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라크시스의 얼굴을 피할 길이 없다. 이번엔 시아가 눈알을 굴려 애먼 벽지 무늬를 세고 있는데, 정수리에 그의 무거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어둑한 밤이, 가냘픈 가스등이 고요한 방을 묘한 분위기로 물들인다.
‘당신만큼 제 시선을 빼앗아가는 존재도 없을 겁니다. 시아.’
【 뮐러가의 비밀 】
낮게 들끓던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맴도는 것 같았다. 카얄에 대해 열띠게 토론하던 걸 되새기다, 지난 밤의 일까지 떠올려버리고 만 시아가 제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떠는 걸 보니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의심 가득한 라크시스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돌아왔다. 그가 긴 다리를 느슨하게 꼬며 흐응, 하고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곱게 접어둔 신문이 어느새 구겨져 있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다 당신 때문이잖아. 라크시스 옌.
라크시스는 여전히 자신을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 내게 열기 어린 목소리를 들려주던 사람은 어디 가고 말이야. 하지만 시아의 귀는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나저나 카얄이 이렇게 대놓고 나오니, 앞으로 할 일은 명료하네요.”
시아는 원론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그녀와 라크시스가 광룡의 봉인을 찾아다니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 봉인 그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다. 물론 불안정한 봉인이 스스로 폭발하여 사고를 일으키는 것도 문제이긴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카얄이 봉인을 찾아 광룡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광룡의 부활로 수십만 명이 죽고 마도 시대가 종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지금껏 봉인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녔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만약 부활할 광룡이 존재하지 않다면. 봉인이 파괴되어도, 그 안의 힘을 이용하려 드는 자가 없다면.
시아는 말했다.
“카얄을 찾아내어 미리 처리하자고 했던 거 기억나죠? 사람 살리는 걸 업으로 삼은 입장에서 하기는 좀 그런 말이긴 하지만…….”
“카얄을 제거하자, 라는 말이죠.”
“…네, 그거요.”
차마 죽이자, 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한 시아가 말을 맺지 못하고 라크시스에게 대답을 넘겼다.
어젯밤 황혼 국교회와 카얄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한 후 내린 결론이었다.
현재의 카얄은 ‘인간’과 다름없다. 중세의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가 아스타의 창에 숨이 한 번 끊어졌던 걸 생각해 본다면,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별것 아닌 이유로도 죽어버릴 수 있는 연약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금의 카얄이라면 없애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광룡이 되기 전에 그를 미리 없애버리면, 광룡의 부활도 마도 시대의 종말도 영원히 오지 않을 테니까.
“발자크 로스를 찾아내서 우리가 먼저 어떻게 해버린다면 카얄이 봉인을 손에 넣는 일도, 광룡으로 부활하는 일도 없겠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봉인을 찾지 말자는 뜻은 절대 아니지만요. 시아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카얄을 저지하면 황혼 국교회가 앞으로 저지를 범죄도 막을 수 있어요. 광룡의 부활로 죽는 사람들만 카얄의 희생자인 건 아니잖아요? 그의 마력을 위해 이렇게 죽어나가는 사람도 희생자인 건 마찬가지라고요.”
헉헉거리면서 말을 마쳤는데, 라크시스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그 표정은 뭐야.
“…왜요. 뭐 묻었어요?”
“아닙니다. 계속하시죠.”
계속하라니까 계속하긴 할 건데. 시아는 찜찜한 기분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그런 카얄이 지금 발자크 로스라는 다무스의 귀족 행세를 하면서 사교계를 돌아다니고 있어요. 요르문이 로렌시아호에서 그를 봤다고 얘기했잖아요. 다무스 출신 귀족 발자크 로스에게 접근하려면 그에게 다가갈 수 있을 만한 신분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라크시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한 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래서 시아 켈튼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 긍정하는지 부정하는지 알 길이 없다.
마도 시대에서 그녀는 이방인이었다. 라크시스의 도움 없인 스크롤 하나 사기도 힘들 정도였으니까. 하물며 레이디 켈튼의 존재 증명이라. 이건 라크시스의 도움이 꼭 필요한 문제였다.
‘로렌시아호에선 분명 내가 전면에 나서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하지만 시아의 안위가 걸린 문제에선 라크시스도 갈대나 다름없었다. 최근 이틀 사이에 그녀의 사교계 진출을 번복한 게 대체 몇 번이던가. 시아도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소중한 존재를 세상에 내보여 공격받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다만 시아는 같은 마음으로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녀의 존재로 인해 라크시스가 대공에게 약점이 잡히는 게 싫었다. 예전이었다면 오만하고 세상 다 가진 듯 구는 고대 마법사에게 약점이 어디 있겠냐며 콧방귀를 뀌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라크시스는 소중했으니까.
시아는 긴장해서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크시스는 여전히 먼저 입을 여는 법 없이 명화처럼 가만히 앉아있었다. 수천 년을 살아온 고대 마법사가 작정하고 만들어낸 무표정의 가면이다. 고작 스물여덟 해를 산 게 전부인 그녀가 벗겨내는 건 쉽지 않았다.
아직도 설득이 더 필요한가. 시아는 힘이 빠져 소파에 푹 파묻혔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발자크는 금발이랬죠. 라크는 발자크 로스를 본 적 있어요?”
“아뇨. 다무스발 아르카나행 열차에서 로드 젤마니와 요르문이 그를 만난 게 전부였습니다. 일부러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쪽엔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군요.”
의외였다. 아니, 의외가 아닌가. 카얄 입장에서는 제 정체를 알지도 모를 자들을 피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인데 어떻게 알고 피하는 걸까. 중세에서도 시아 일행은 발자크와 직접 대면해보지 못하고 마도 시대로 되돌아왔다. 그뿐이랴. 지금까지의 시간 여행에서도 시아 일행은 단 한 번도 카얄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마주하면 차라리 다행이지, 애초에 시아는 발자크의 얼굴도 알지 못했다. 이를 바꿔말하자면, 발자크 역시 우리에 대해 잘 몰라야 정상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이런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 그녀가 없는 새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유심히 살피며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로드 젤마니에게는요? 애초에 그 둘은 브라이던힐 동기였잖아요.”
“그래서인지 사람이 많이 모인 곳, 그러니까 기수 모임이라든지 사교 클럽에만 모습을 비치면서 로드 젤마니와 만나는 모양입니다. 남들 앞에선 여전히 친한 친구이자 괴담 수집가 행세를 하는 모양이더군요.”
“그런 곳에 슬쩍 끼면 발자크를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시아의 말에 라크시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