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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57)화 (157/292)

157화 

게다가 메이드가 발견된 장소는 끔찍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저주가 걸려있는 객실이었다. 별관 2028호. 객실을 뒤덮은 피의 주인이 블레어가의 둘째라는 사실도, 저주의 목표가 된 것이 일개 메이드라는 것도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한때 한창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단 황혼 국교회의 짓이 아니냐는 말이 은연중에 돌기 시작했다. 재키 레이븐을 부추기고 빈민 구제원 원장을 살인마로 만든 바로 그 이단.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이웃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 사람도 이단의 신도일지 몰라.

민심은 삭막해지고, 거리는 흉흉해졌다. 황혼 국교회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생겨난 불안감 때문이었다.

한편 로렌시아호에 탑승한 연예잡지 기자들은 별관 2028호에서 레이디 로드리치가 메이드에게 담요를 조심히 덮어 사라진 장면을 포착했다. 기력이 쇠한 막스 블레어가 제 몸보다 그녀를 먼저 살피다, 레이디 로드리치에게 퇴짜를 맞고 객실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 이도 한둘이 아니었다.

분명 뭔가 있다. 그것도 로드리치가와 막스 블레어 모두 쩔쩔맬 수밖에 없는 비밀이!

[로렌 허슬러, 무명의 메이드에게 자리를 빼앗기다! - 제국이 가장 궁금해하는 여인, 로드리치가의 메이드는 누구인가?]

그리하여 모르간 타임즈를 비롯해 제국의 신문이란 신문엔 온통 헬렌과 저주 이야기뿐이었다.

“와, 정말 살벌하네요.”

시아는 신문을 장식한 헤드라인과 헬렌의 실루엣을 보며 조심스럽게 신문을 덮었다. 로렌시아호에서 내린 지 벌써 이틀이 다 되어가는데도 신문은 여전히 요란했다.

“제가 왜 당신을 숨기려 했는지 이젠 아시겠습니까.”

“미안해요. 그땐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진짜로 이 정도인 줄 몰랐다. 태연한 척했지만 두피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혀있었다. 로렌 허슬러도 몇 달이나 이렇게 신문에 실렸댔지. 시아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었다.

사고를 거하게 친 것 같은데. 나 잘할 수 있을까?

라크시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라도 무르고 싶으면 말해요. 남의 머릿속에 들어가는 게 번거롭긴 해도 아주 못 할 짓은 아니니까.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이 사교계에 나가는 걸 계속 반대하고 싶지만요.”

하지만 시아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녜요. 이왕 나서기로 한 거, 제대로 해봐야죠.”

최종적으로 레이디 켈튼의 존재를 마도 시대에 드러내기로 한 건, 비단 차탈 때문만은 아니었다.

광룡의 봉인을 파괴시켜 로렌시아호에 버젓이 가져다 놓은 범인.

발자크 로스.

그가 배신자 미옌이자, 사도 카얄이라는 건 여러 정황 증거로 알고 있었다. 다무스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검은 마법사의 정체가 황혼 국교회의 사제이자 저주를 사용하는 발자크 에이클레이였다는 건 진작 들었으니까.

사도는 사도인 걸까. 카얄은 창자가 꿰뚫리고 화형까지 당했음에도 버젓이 살아있었다. 발자크 로스라는 새로운 신분을 뒤집어쓰고, 괴담 수집가 루드윅 젤마니에게 접근하기까지 하면서 광룡의 부활이라는 제 목표를 위해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중세에서 그가 저지른 짓을 보건대, 마도 시대에 벌어진 수많은 황혼 국교회의 범죄 행위도 아마 카얄의 명령 하에 자행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어젯밤, 시아는 칠십 년 후의 갈리프도흐 기록관에서 찾아두었던 신문 자료들을 손가방에서 꺼냈다. 그녀가 손수 일기장 뒷장에 베껴둔 것들이었다.

자료들을 라크시스에게 보여주자, 그가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제 예상이 맞았군요. 지금의 카얄은 ‘인간’과 다름없는 상태가 분명합니다.’

인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놀랐던 것도 잠시, 이어진 라크시스의 설명은 정말이지 상상을 벗어나는 내용들이었다.

‘황혼 국교회의 목적이 살인, 이라고요?’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록관에서 옛 신문들을 살펴보던 당시엔 사이비 특유의 교주 신격화나 교주 숭배도 없이 그저 신의 뜻이라며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 황혼 국교회의 신도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카얄이 의도한 것이었다니.

‘그럼 헨리 던로를 부추겨 죄 없는 사람들을 죽게 만든 이유가…….’

‘아마 온전한 마력을 쓸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이 대지는 태고룡 갈리프의 창조물이죠. 갈리프를 배신하고 빛의 권능을 내다 버린 미옌이, 갈리프의 산물인 마력을 쓸 수 있을 리가 없겠죠.’

아, 최근에 새롭게 발굴되고 있다던 신화 원전에 따라 추측한 겁니다. 루드윅 젤마니가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더군요. 라크시스가 말을 덧붙였다.

‘예전에 저주는 마력이 아닌 다른 것을 대가로 사용하는 마법이라고 말씀드렸던 걸 기억하십니까? 그중 인간의 영혼이 가장 효율이 좋다고 알려져 있단 것도요.’

‘세상에, 그래서…….’

‘시아, 이걸 보시죠. 당신이 없는 사이 조사해 둔 겁니다.’

일기장 뒤편에 베껴온 자료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방대한 자료들이었다. 라크시스가 꺼낸 두꺼운 서류 더미엔 황혼 국교회가 배후로 지목된 사건들이 시기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시아가 기록관에서 조사한 것들도 더러 있었고, 경찰이 눈치채지 못한 사건도 세세하게 적혀있었다.

라크시스는 이외에도 황혼 국교회와 관련된 사건들이 더 많을 거라 말했다. 어쩐 일인지 황혼 국교회와 관련된 사건들은 대부분 제대로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고, 모든 사건들을 라크시스 혼자 조사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황혼 국교회는 중세의 다무스에도 존재했죠. 역사가 유구해서 그런지, 현재 세력이 상당하더군요. 경찰 간부 중에도 황혼 국교회를 믿는 자가 존재했으니 말입니다.’

시아는 차마 그 사건들을 모두 읽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 사건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미제로 끝난 데다, 피해자의 수가 상당한.

‘…대체, 이게.’

‘과거와 달리 이젠 멋대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자연 현상을 이용한 대량 학살을 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종교의 그늘에서 사람들을 죽여왔단 말이에요? 그것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만들면서?’

시아는 이제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있었다. 그녀의 심정이 지금 어떤지는 라크시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황혼 국교회에서 자행해 온 살인 사건을 조사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똑똑해졌기 때문이죠.’

라크시스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젠 중세에서처럼 멋대로 나섰다간 정체를 금방 들키게 될 테니까요. 카얄도 알게 된 겁니다. 더 이상 살인이 쉽지 않다는 걸요.’

이번 로렌시아호의 사건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로렌시아호가 착륙한 후, 라크시스와 요르문은 꼬박 날을 새며 별관 2028호에 남은 저주의 진을 연구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카얄이 라크시스에게도 생소한 수식과 언어로 교묘하게 저주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카얄은 미스 헬렌을 이용해 저주를 발동시킨 뒤 봉인의 파괴력을 이용해 로렌시아호에 탑승한 모든 승객을 저주의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제물을 통해 얻게 된 마력은 저주의 시전자, 그러니까 카얄의 신체를 보강하는 데에 사용되었고요.’

‘…그래서 로렌시아호를 추락시키려고 했던 건가요? 저주와 살인의 증거가 남지 않게 하려고?’

조사 결과, 별관 2028호뿐 아니라 연료통 곳곳에도 저주의 진이 그려져 있었다. 비행 중 연료통에 이상이 생겼었다는 기장의 보고도 뒤늦게 받았다.

비행선 추락 사고만큼이나 흔적이 남지 않는 참사도 없다. 제아무리 경찰이 유능하다 해도 산산조각이 난 잔해 더미에서 저주의 흔적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손발이 떨렸다. 카얄의 계획은 참으로 잔인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카얄은 이미 오토마톤의 심장을 손에 넣었잖아요. 봉인 하나에 갇혀있던 어둠만으로도 고대 마법사 수준의 힘을 되찾았을 텐데, 뭐 하러 사람을 계속 죽이냐고요. 봉인만 파괴하고 다녀도 상관없는걸, 고작 마력을 위해서 죄 없는 사람들을 계속 휘말리도록…….’

만약 카얄이 악인이라서 그랬다는 답을 들었다면. 그가 욕망에 휩싸여 끝을 모르고 힘을 탐닉하는 자라서 그랬다는 답을 들었다면, 그래서 봉인의 힘을 손에 넣었음에도 계속해서 저주로 사람을 죽여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는 답을 들었다면 시아는 그대로 절규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크시스는 뜻밖의 답을 들려주었다.

‘…현재 카얄은 광룡의 힘을 회수해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기껏 봉인을 빼앗아 가고도 사용하지 못한다니.

‘직접 파괴하지도 못해서 미스 헬렌을 이용했다면서요. 그렇다면 카얄은 봉인을 스스로 파괴하지도, 봉인의 힘을 사용하지도 못한다는 뜻인가요?’

‘네. …아마도 모든 건 그가 ‘인간’과 다름없는 상태인 것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아는 미궁에 빠졌다. 침묵하는 라크시스를 보니, 그도 카얄의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 확신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상식적으로 힘을 되찾았는데 쓰지 못하는 게 말이 되지 않긴 하지. 지갑에 돈이 있는데 꺼내 쓰질 못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지 않나.

하지만 카얄이 되찾은 힘은 지폐 쪼가리와는 다르다. 시아는 자신이 봉인을 손에 넣었을 때 경험했던 일들을 가만히 되짚어 보았다. 자그마한 어둠을 천칭에 올리자마자 쏟아지던 거대한 빛. 천칭이란 자고로 좌우의 무게를 달아주는 도구가 아니던가.

그녀가 접시에 올렸던 솜뭉치 같은 어둠이 거대한 빛과 맞먹는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에, 라크.’

‘왜 그러십니까?’

시아는 벌떡 일어났다.

‘마류 탐지기예요. 라크, 마류 탐지기가 봉인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억나죠?’

‘기억은 납니다만.’

‘예전에 라크가 봉인이 지닌 마력 자체가 대단한 건 아니라고 말했었잖아요. 복잡하고 정교한 금고이지만 그 금고를 여는 열쇠는 작고 긴 쇠막대에 불과하다고 했던 거요.’

‘그렇게 말하긴 했었죠. 그런데 그게 왜…….’

‘이유야 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화에 따르면 봉인은 갈리프의 사도들이 그들의 신체를 매개로 어둠을 가둔 거라고 했었죠. 그리고 사도의 신체로 만들어진 봉인의 특징은 모두 같단 말이에요.’

‘봉인 자체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거의 없다는 것 말이군요.’

태양을 가둘 수 있는 주머니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제아무리 튼튼한 주머니라도 강렬한 열기에 머지않아 타버릴 테니까.

그렇다면 태양과 맞먹는 어둠을 가둔 주머니는 어떨까. 광룡의 힘을 가둔 사도의 육체가 바로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사도의 몸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어둠을 품고 있으니 약해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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