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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56)화 (156/292)

156화 

시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메이덜린을 돌아다니면서 절 본 사람이 많았을 거예요. 절 계속 숨기려 드니까 대공이 저렇게 혈안인 거고요.”

“…찰나에 이 모든 걸 고려하고 대공 앞에 나선 당신이 정말 놀랍긴 하군요.”

라크시스가 맥없이 긍정했다.

슈나이더가 거하게 사고를 친 후, 안 그래도 내 뒷조사를 해오던 대공이 더욱 내 정체를 파헤치는 데에 집착했다고 한다. 처음엔 나한테 왜 그렇게까지 집착하나 싶었는데.

‘차탈 세페란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 이상 이쪽에 간섭하려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어.’

‘난 두 번 말하지 않아. 재키 레이븐을 잡은 건 메이덜린 경찰이고, 시아 켈튼의 뒷조사를 하는 인간을 내버려 두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대공씩이나 되는 사람이 라크시스가 이렇게 한마디 했다고 지금까지 날 고대 마법사의 약점이라 생각해 왔단다.

시아는 피식 웃었다.

“절 고대 마법사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게 좀 웃기긴 하네요.”

내가 라크의 약점이라니. 라크시스 옌이 뭐가 아쉬워서 날 약점으로 여기겠냐마는.

“그게 우스우십니까.”

어라.

비상 상황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벌어졌다.

“당신이 제 약점이라는 게, 당신에겐 아무렇지 않은 일인가 봅니다.”

정색하던 라크시스가 이내 울적하게 속눈썹을 늘어뜨린 것이다. 그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시아를 쳐다봤다. 워낙 우아하게 생긴 탓에 강아지보단 은여우에 가까운 모습이긴 하지만. 여하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러다 착각하겠어.’

이럴 때마다 내가 정말 그에게 중요한 뭐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라크시스는 왜 내게 이러는 걸까. 이러면 나도 그를 욕심내게 되잖아.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니까 안 웃기긴 하네요.”

일단은 라크시스를 달랬다.

참 감개무량하네. 내가 고대 마법사를 달래줄 날이 오다니. 그것도 저렇게 내게 자꾸만 기대오는 고대 마법사를 말이야.

“어쨌든요. 로드 젤마니도 제 정체를 추리해 냈는데 대공 같은 사람이 제가 누군지 모른다는 게 말도 안 되죠. 로드 젤마니는 메이덜린 경찰의 인맥을 통해 켈튼가의 거주민 명부를 확인했다면서요.”

시아는 팔짱을 끼며 찻잔을 들었다. 티 테이블에 놓여있던 건 레이디 마거릿이었다. 습관처럼 각설탕 두 개를 넣어 휘휘 저었다. 라크시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대공이라면 3587년의 비스크화를 보고 제가 미래에서 온 것도 짐작하고 있을걸요?”

“…대공의 성격이라면 당신이 미래에서 왔다는 것까진 믿지 않았을 겁니다. 허무맹랑한 소리를 극도로 싫어하는 작자라.”

적당한 단 맛에 홍차 향이 기분 좋게 풍겨 올라온다. 이것도 시간 여행이 만들어낸 산물이지. 시간 여행이 시작되기 전엔 커피만 마셨던 게 새삼 떠오른다. 내게 처음으로 홍차를 즐기는 법을 알려준 사람도 라크시스였다.

시아는 차를 홀짝이다,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라크시스에게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라크가 수사를 멈춘 거예요? 칠십 년 후의 화폐가 로튼데일에서 발견됐을 때 말이에요.”

제가 미래에서 가져와서 스크롤 사는데 써버린 바로 그 비스크화요. 로드 젤마니가 그것 때문에 미래인의 존재를 믿었다고 했었잖아요?

라크시스가 움찔 놀랐다. 정말로 오랜만에 기억 속에서 꺼낸 일이었다. 라크시스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대 마법사라는 게 참 대단하긴 하단 말이야. 황제를 움직여 수사를 멈추는 사람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뿐일 거다.

라크시스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시아, 정말로 대중 앞에 나설 겁니까?”

“숨기기엔 이미 늦었는걸요. 연회장에서 절 본 사람만 이백 명이 넘는다면서요.”

“소문으로만 존재하는 것과 실존을 공공연히 증명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사람들은 확실치 않은 정보는 진실이 아니라 믿거든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숨어있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차탈이 그녀를 라크시스의 약점이라 여긴 것도, 자신이 계속 대공의 눈을 피해 숨어서 그런 게 아닌가.

라크시스가 애원하듯 매달렸다.

“대공은 위험한 자입니다. 본인의 즉위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에요. 당신이 미래에서 온 걸 알면,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추궁해 멋대로 미래를 바꿔버릴 겁니다.”

“어차피 제가 아니어도 차탈은 황제가 되는걸요.”

“그뿐일까요. 당신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은 후엔 틀림없이 제거하려 들 겁니다. 본인이 가진 정보를 남들과 공유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요. 분명 시간 여행자라는 정보를 악용해 당신을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힌 사기꾼으로 몰아가 처리할 겁니다.”

듣고 보니 살벌하네. 실제로 역사 속엔 그런 지배자가 존재하긴 했다.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위해 남을 이용하고 버리는 사람들.

하지만 시아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못하게 하면 되잖아요?”

“시아.”

시아는 라크시스를 향해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저도 아무 생각 없이 대공 앞에 나선 건 아니었어요.”

라크시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납득시키기 위해 시아는 생각을 정리해 말로 모았다.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귀를 잡아끄는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라크, 언제까지고 대공을 피해 다니기만 할 순 없잖아요?”

처음으로 라크시스의 말문이 막혔다.

그가 시아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회피였다. 집요한 차탈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라크시스로서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터다. 어차피 그녀는 애초에 마도 시대의 사람이 아니었고, 그녀가 시간 여행을 와 있을 때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시아의 생각은 달랐다.

“차라리 절 건드릴 수 없게 만들자는 말이에요. 라크 말마따나 전 시간 여행자이니까요. 제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바로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대공의 미래까지 포함해서요.”

시아는 라크시스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창백했다. 조심히 손등을 쓸며 온기를 전한다. 내 믿음이 전달되길 바라며 손가락을 천천히 얽어 그의 손을 단단히 붙들었다.

어차피 내 존재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 시간 여행자란 것만 빼면, 요르문 켈튼의 친척으로든 탐정 로렌 허슬러로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단 소리다.

괜히 그늘에 숨어 이런저런 헛소문이 부풀게 두는 것보단, 내가 먼저 나서서 그런 소문들을 일축시키는 게 나았다. 차탈이 벌써 내게 초대장을 보내겠노라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나.

역사 속의 대공에게 사감은 없지만, 어쨌든 지금의 난 누가 뭐래도 라크시스의 편이었다. 나의 여행 파트너이자, 내가 만난 가장 완벽한 신사.

차탈이 날 이용해 그에게 해를 끼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이쪽에서 먼저 움직이겠다 이거야.

“전 라크의 약점이 되긴 싫은걸요. 당신의 파트너니까. 이왕이면 강점이 되는 게 좋잖아요?”

시아는 생긋 웃었다.

“그리고 라크에겐 절 그렇게 만들어줄 능력이 충분하잖아요.”

라크시스는 숨을 멈췄다.

시아가 나비 같은 눈매를 살며시 접어 미소를 그려냈기 때문이다. 기다란 속눈썹 밑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눈동자엔 확신이 가득했다.

그녀의 확신은 근거 없는 믿음이 아니었다. 시아는 라크시스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방향을 제안하면서 마땅한 이유를 설명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미소를 마주하자마자 그녀에게 설득당했다.

“라크가 만들어준 가짜 신분. 그거면 전면에 나서기 충분할 것 같은데요?”

술란의 거대 무역회사 사장의 외동딸. 켈튼의 방계. 캘커티 남작. 갈리프도흐 의학 박사 및 회복학과 박사.

그래, 기껏 만들어둔 가짜 신분을 고작 차탈의 뒷조사를 방어하는 데에만 쓰긴 아깝지. 이 상황을 가장 확실하게 타개할 방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마도 시대가 어떤 시대냐. 비단 마도 문명이 절정을 이룩하기만 했던 시기가 아니다.

마도 시대는 보수와 관습을 기반으로 한, 제국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도 소란스러운 시대였다.

눈과 귀. 소문과 진실. 왕과 귀족. 신사와 숙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교계의 소식과 정제되지 않은 언론이 만들어내는 가십이 지배하는 시대란 말이었다.

그런 마도 시대에서 라크시스가 오래전부터 만들어둔 시아 켈튼의 신분은 분명 큰 무기가 될 터였다.

‘원래 시대에서도 드나들지 않던 사교계를 여기서 드나들게 생겼지만.’

으, 무도회라니. 시아는 피식 한숨을 쉬었다.

라크시스는 그런 그녀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또다.

의지를 담고 선명하게 빛나는 눈. 그녀의 결심이 설 때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눈이다.

라크시스는 그녀의 눈이 빛나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아무리 철저히 계획을 세워 원하는 바를 이룩할 수 있다 한들, 그에게는 그녀와 같은 반짝임이 없었다.

고난에 부딪히고, 시련을 넘어서며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라크시스는 그녀의 생동하는 삶을 사랑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공을 피해 다니기보단, 그와 직접 마주하기를 선택하지 않았는가.

그녀의 방법이 틀린 것도 아니다. 어쩌면 라크시스가 몇 년간 짜놓은 판이 무색할 만큼 대공에게 선방할 수도 있다.

시아 켈튼은 라크시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라크시스는 한숨을 쉬면서도 부드럽게 웃었다.

“…일단 요르문의 당숙부터 사망 처리 합시다. 그것부터 시작하죠.”

* * *

레이디 로드리치의 자선 파티는 결국 망했다.

보통 망한 게 아니라, 제국 사교계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정도로 아주 대차게 망해버렸다.

파티에 저주가 나타났기 때문이요, 둘째는 블레어가의 둘째가 빈사 상태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거기다 불미스러운 일로 예정된 일주일의 파티 기간을 모두 채우지 못하고 비행선을 착륙시켰으니, 로렌시아호를 띄워 파티를 열었던 것보다 더 거대한 가십이 후폭풍처럼 몰아쳤다.

개중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사랑스러운 검은 피부의 그녀! - 대 로드리치가와 블레어가의 사랑을 받는 여인의 정체는?]

[피투성이 저주로 뒤덮인 파티! 암살 위협을 받은 메이드의 비밀은?]

몇 년 동안 두문불출하던 로렌 허슬러가 모습을 드러낸 것보다 제국을 더 떠들썩하게 만든 주인공은 다름 아닌 헬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렌 허슬러의 정체에 대한 추측은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앨런 어셔의 소설이 대박을 친 이후 실제 로렌 허슬러에 대한 대중의 흥미가 살짝 식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자극은 새로울수록 효과적이다.

예절과 명예를 극도로 중요하게 여기는 레이디 로드리치가 파티 도중에 헐레벌떡 뛰쳐나간 것부터, 그녀가 일하던 고용인까지 모조리 불러 모아 찾은 게 고작 나이 어린 메이드라는 사실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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