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두 사람의 반응을 보니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갔다. 차탈이 그간 계속 그녀를 찾아다니고, 라크시스가 그를 줄곧 막아왔던 모양이었다.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 때의 첫 만남을 생각하면 날 라크시스의 애인으로 착각하고 가십을 캐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고작 그 가십 때문에 내 뒤를 쫓았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마도 시대의 고대 마법사란 황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위치의 존재라고 했는데. 나 하나를 어찌저찌해 버린다 한들 라크시스의 명성엔 티끌만 한 흠도 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아는 까맣게 몰랐다. 차탈이 황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과, 그 사실에서 비롯된 라크시스와 차탈의 감정의 골이 생각보다 깊어져 있었다는 것을.
시아는 라크시스와 차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호기로운 맹수처럼 희번득하게 웃고 있는 대공과 그를 짜증 나고 성가신 벌레 보듯 노려보고 있는 고고한 마법사가 눈에 들어온다.
보아하니 둘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그게 나 때문이란 말이지?’
시아의 뇌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티끌만 한 단서를 모아 퍼즐의 윤곽을 맞춰나간다. 상황을 보아하니 대공은 지금 시아 켈튼이 아닌 로렌 허슬러를 쫓고 있다. 로렌 허슬러는 재키 레이븐이라는 희대의 살인마를 검거한 탐정이고.
오래전 라크시스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황제에겐 아직 자식이 없고, 대공은 지지자가 많거든요.’
차탈은 야심가였다.
주변의 모든 이목이 이쪽을 향해있다. 차탈은 여전히 제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시아는 잠시 고민하다 그 손을 잡았다.
“뭐, 레이디에게 악수를 청하는 남자를 거절할 이유는 없죠. 맞아요, 제가 로렌 허슬러이고 시아 켈튼이에요. 당신은 차탈 세페란테, 노든의 대공 맞죠?”
순간 정적이 흘렀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 경악한 요르문.
서서히 일그러지는 표정의 라크시스.
마지막으로 당황하여 할 말을 잃은 차탈까지.
“…하.”
아하하하! 폭소에 가까운 웃음이 정적을 깨고 터져 나왔다. 차탈이었다.
차탈은 간만에 속 시원히 웃었다. 요르문과 라크시스가 자신을 죽일 듯이 쳐다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 상황이 예상 밖이다 못해 기꺼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라크시스가 애지중지 감싸고 도는 데다가 재키 레이븐을 잡았다고 해서 라크시스 옌과 동류의, 속을 알 수 없고 기가 드센 여인일 줄 알았는데.
실제로 만난 시아 켈튼은 제멋대로 구는 고양이나 다름없었다. 제 손에 갇힌 보드랍고 하얀 손은 힘만 주면 부러질 것같이 가냘팠다. 게다가 멍청하게도 제 발로 함정에 들어오기까지 하다니.
고대 마법사의 똥 씹은 얼굴을 보아하니, 대공과 라크시스 옌의 관계가 본인 때문에 비틀린 걸 모르는 눈치다.
“이리 당돌한 여인이니 옌 경이 숨겼지!”
차탈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시아의 손을 꽉 쥐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고리타분한 마법사와 함께하는지 모르겠군요.”
“저도 똑같이 고리타분한 사람이기 때문에 라크와 어울리는 게 아닐까요?”
“아니, 전혀요. 레이디 켈튼은 뭐랄까, 정말이지 제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이군요.”
그렇게 말하며 차탈은 라크시스를 흘긋거렸다.
안 그래도 온통 하얀 마법사가 사색이 되어 창백해져 있었다. 삼 년 전 그가 보좌관 제프리의 머리를 헤집어 재키 레이븐 검거와 관련된 언론을 조작했다는 걸 알았을 때, 차탈의 얼굴도 딱 저렇게 질려있었더란다.
이 여잔 지금 자기가 라크시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건 알까?
‘라크시스가 이 여잘 숨겨왔던 이유를 알겠어. 이렇게 눈치 없고 멍청해서야!’
어디서 굴러먹던 여자인진 모르겠지만, 라크시스 옌이 만들어준 거짓 신분이 아까울 정도다. 이런 여자가 켈튼가의 레이디라고? 어림도 없지.
“생각 외로 당신과 난 좋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겠어요. 잘 부탁합니다. 레이디 켈튼.”
“그쪽 하는 거 봐서요. 전 아무하고나 파트너 안 하거든요.”
하! 차탈은 기가 막혀 웃었다.
“좋습니다. 그 말 꼭 기억하지요.”
마침내 차탈이 떨어져 나갔다. 악수하던 손이 자유로워졌으나, 차탈이 꽉 쥐고 있던 자리에 벌건 자국이 남았다.
시아는 웃는 눈으로 차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조만간 댁으로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정식으로 황궁에 초대받고 나면 아마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차탈은 마지막으로 시아에게 다가갔다. 라크시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일부러 지켜보며, 시아에게 속삭였다.
“누가 당신 파트너로 더 적합한지 말이죠.”
그럼 이만. 떠나는 차탈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뒤늦게 달려온 블레어가의 두 남매가 막스 블레어를 허겁지겁 살피고, 고용인들이 피를 보고 놀라 뒷걸음질 치느라 소란스러운 가운데 시아와 요르문, 라크시스가 서있는 자리에만 유난히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라크시스가 말문을 열었다.
“시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공 앞에 나선 건가요. 저 자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시긴 합니까?”
결이 예쁜 눈썹이 삐딱하게 기울어있었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내가 그의 계획과 다르게 멋대로 움직여서 그런가 본데.
평소였다면 말로 살살 해결해 보려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할 말이 있었다.
“그보다 먼저 제가 물어볼 게 있는데요.”
시아는 라크시스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지금 이 시대에 앨런 어셔, 아니 슈나이더 경감님의 소설이 출간되어 있나요?”
* * *
요목조목 따져 묻는 소리가 넓은 객실을 울린다.
“슈나이더 경감님에게 책을 내보라 권했다고요? 그것도 제가 미래에서 가져온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을 보여주면서요?”
로렌시아호의 최상층. 수영장부터 승마장, 뱃놀이용 인공 호수까지 없는 게 없는 초호화 놀이터를 두고 시아 일행은 객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심각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으나 이를 구경하는 요르문은 웃음을 참느라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로렌시아호를 만든 것도 그렇고, 나한테 붉은 드레스를 입혀서 헨리 던로를 떠보게 한 것도 그렇고. 가만 보면 은근히 맹목적이란 말예요. 라크는 단 한 번도 본인의 계획대로 안 된 적 없었죠?”
“그건 그렇지만, 시아. 저는 당신을…….”
“이번에도 그래요. 제가 라크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적도 없는데 어떻게 라크의 계획대로 움직여 주겠어요? 입을 맞춰 놓은 적도 없는데.”
“…제가 잘못했습니다, 시아.”
라크시스가 면목 없는 얼굴로 고개를 늘어뜨렸다. 요르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정말로 둘도 없는 희귀한 구경거리다. 끅끅거리던 요르문은 이내 실실 웃기 시작했다.
“와, 누님. 지금 누님이 ‘라크시스 옌’을 혼내는 거예요? 라크, 그러게 누님에게 잘했어야지. 난 하나밖에 없는 누님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는 남자는 허락해 주지 않을 거니까.”
“그 입 다물지, 꼬맹이.”
“예예, 꼬맹이는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비행선의 창밖으로 긴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예정보다 이르게 끝나버린 파티로 인해, 로렌시아호는 급히 활주로를 찾으며 제국의 하늘을 배회하고 있었다.
수만 피트 상공에서 감상하는 노을은 지상의 붉은 광경과 사뭇 달랐다. 끝없는 구름이 바닥에 깔리고, 지평선을 따라 번지는 새빨간 빛이 검푸른 하늘을 주홍색으로 적신다.
이 시대까지만 해도 하늘에서 노을을 본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비행선이 존재하긴 했으나 여객용으로 상용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치형으로 큼직하게 낸 유리창 밑에서 메이슨은 멍하니 노을을 구경했다. 함께 객실에 들어와 있는 레이디 켈튼과 로드 켈튼, 고대 마법사님의 대화에 도무지 끼어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혼낸다니, 내가 언제……! 그보다 요르문 너도 마찬가지야. 이런 계획이 있었다면 말해줬어야지. 내가 마도 시대의 대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냐구.”
“말할 틈이 있었어야죠. 누님이야말로 봉인을 찾고 나면 매번 훌쩍 떠나버리셨으면서.”
“…그렇게 나오니까 할 말이 없네.”
요르문은 섭섭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할 말을 다 했다. 시아에게 한 소리를 듣고선 입을 다문 라크시스와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차탈이 떠나간 후, 시아 일행은 별관 2028호를 그대로 폐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현장을 보존하여 2028호에 걸린 저주를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중간에 내무장관의 자격으로 이번 사건을 수사해야겠다고 돌아온 차탈 때문에 살짝 애먹었지만 말이다.
저주의 규모가 워낙에 컸던 데다가 자칫하면 비행선이 추락할 수도 있었던 위험한 상황이었기에 로렌시아호는 예정보다 이른 착륙을 결정하게 되었다. 와중에 착륙 후 경찰이 개입할 것에 대비해 봉인의 존재를 철저히 지우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2028호에 있던 메이드를 제외하곤 반지 형태의 봉인을 본 사람이 없기에, 경찰에서 조사가 들어올 경우 반지가 아닌 초소형 마폭탄이 2028호에 있었다고 대답하기로 그녀와 입을 맞추어두었다.
‘이름이 헬렌이었나.’
시아는 자꾸만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라크시스를 바라보았다.
시그무트 아 함 나타. 정황상 이 반지는 갈리프의 아홉 번째 사도인 나타의 봉인을 품고 있었다. 라크시스의 말에 따르면, 헬렌이라는 메이드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타와 관련이 있는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는 불안정한 봉인이 가까이 있었는데도 헬렌이 제정신을 유지한 채 반지를 손에 낀 것도 신기한 일이라며, 후에 마류학적으로 헬렌을 조사해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를 실험체로 사용했던 예전의 그 일이 잠시 떠올랐지만, 아무튼 그 일은 그 일이고 이 일은 이 일이었다.
“아무튼 말예요. 라크.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알았어요.”
라크시스에게서 전해 들은 전말은 정말로 놀라웠다. 재키 레이븐을 검거한 후 제국은 베일에 싸인 탐정 로렌 허슬러 때문에 난리가 났다. 라크시스는 시간 여행자인 데다가 거취도 불분명한 내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슈나이더 경감이 터뜨린 이 발언 때문에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했다.
‘사실 재키 레이븐은 저 혼자서는 절대 잡을 수 없는 최악의 살인마였습니다.’
‘제게 도움을 주신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살인마와 함께, 살인마가 죽인 시체를 수습하며 범인을 찾고 있었겠지요.’
‘이 자리를 빌려 라크시스 옌 경과 미스 로렌 허슬러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이상입니다.’
거기다 슈나이더는 역사에 기록된 것보다 일찍 추리 소설가로 데뷔하기까지 했다. 출간하자마자 대박 친 그의 첫 작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 때문에 이젠 제국엔 로렌 허슬러를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