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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54)화 (154/292)
  • 154화 

    문득 중세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사도라기보다는 사특한 술수를 부리는 인간에 가까웠던 발자크 에이클레이. 붉은 심장과 현자의 별이라는, 봉인이 숨겨진 미궁의 열쇠를 얻기 위해 다무스를 멸망으로 몰아갔던 카얄.

    그에게 진정 사도의 힘이 있었더라면 번거롭게 이자벨라를 조종하지 않고도 미궁의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전능한 사도의 힘을 사람들 앞에 내보이고, 에드먼드를 협박하든 회유하든 아니면 억지로 소유권을 앗아버리든 하여 붉은 심장을 손에 넣었을 수도 있다.

    ‘물론 그게 가능했을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종합해 보면 결론은 이러했다.

    카얄은 봉인을 제 손으로 파괴하지 못한다. 적어도 반지 끝에 달려있던 이번 봉인만큼은 그런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봉인 파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저 메이드의 정체는 무엇인가. 카얄이 이렇게까지 대놓고 저주를 그려내면서까지 불러낸 저 메이드에겐 무슨 비밀이 있는 걸까.

    라크시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녀는 시아의 품에 안겨 눈물샘을 쥐어짜듯 울고 있었다. 겉보기엔 마력도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다.

    무엇이 다른 거지. 설마 저쪽도 다무스의 왕이나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처럼 사도의 피를 이은 존재인가.

    그때였다.

    피를 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격렬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라크시스는 자신이 막스 블레어를 치유 중이었다는 걸 뒤늦게 상기했다.

    라크시스는 시아가 위로하고 있는 소녀를 지켜보다, 막스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희대의 바람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만큼 미끈하던 얼굴이 뼈를 따라 푹 꺼져 해쓱했다. 죽을 만큼 고생한 사람의 얼굴이다. 하긴 피를 이렇게나 흘려댔으니 피골이 상접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온몸에 밧줄이 묶였던 흔적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묶인 걸 풀기 위해 발버둥을 쳤는지, 거친 밧줄에 쓸리고 멍이 든 자국이 가득했다. 피를 뽑으려고 낸 손목의 구멍이 라크시스의 치유술로 아물어가고 있었다.

    막스 블레어의 꼴을 보니, 그는 단지 저주의 진을 그리기 위한 재료로 이용된 게 전부인 모양이었다.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기억하나? 제 발로 여기까지 걸어들어와 죽기 직전까지 피를 흘려가며 저주의 진을 그리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저주라는 말을 듣자마자 막스가 사색이 되었다. 본인이 겪었던 일이 하나둘 떠오르는지 손을 덜덜 떨더니, 안색이 파리해져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주라니, 헬렌. 젠장, 헬렌…….”

    뒤늦게 헬렌을 발견했으나 그녀가 시아와 함께 있는 걸 보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술을 물어뜯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블레어가의 둘째는 저쪽의 메이드를 적잖이 의식하는 것 같은데.

    “모두 저 때문입니다, 저 때문에 헬렌이…….”

    아무래도 저주의 과정을 목격한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본인 때문에 저 메이드가 휘말렸다느니 하는 말을 할 순 없겠지. 좋아하는 여자가 저주의 목표물이 되는 걸 지켜봤으니 저렇게 괴로워하는 걸 테다.

    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라크시스는 마법으로 막스의 손을 결박하여 그를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 누워서도 막스는 하염없이 울었다.

    예전엔 이런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봉인을 집어 들고 섬광에 휩싸이던 시아가 떠오른다. 그 순간의 무력감이란. 라크시스는 막스의 기분을 알 것만 같았다.

    “헬렌은… 괜찮습니까? 다친 곳, 은 없습니까.”

    라크시스는 막스를 위로했다.

    “안심해도 괜찮아. 미스터 블레어. 지금 미스 헬렌의 곁엔 유능한 의술사가 곁에 있으니.”

    한편 시아는 주변에 눈 돌릴 틈도 없이 헬렌을 다독이고 있었다.

    “고생했어요. 많이 놀랐죠.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되었으니까.”

    “흑, 흐흐흑, 끄흡! 흐어어어엉―!”

    그녀가 너무 서럽게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바닥의 화상도 잊은 모양이다. 시아는 눈물로 달라붙은 헬렌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그녀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울고 싶은 만큼 울어요. 무섭다는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시원하게 울어버려요.”

    “끄흑, 반지가 갑자기 터졌어요. 절 노린 마폭탄인 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홀려서, 흐으흑.”

    한참을 오열하던 헬렌은 시아의 품에서 안정을 찾았다. 그새 레이디 로드리치를 비롯해 헬렌을 찾아다니던 사람들이 2028호에 도착했지만, 시아와 그녀의 품에 안긴 헬렌을 보고는 헬렌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말없이 바깥에 서있었다.

    “분명 제가 죽길 바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도련님은, 저 때문에…….”

    도련님? 시아는 라크시스가 데려가 치료한 남자를 흘긋거렸다. 퀭해 보이긴 해도 멀쩡해 보였다. 아깐 과다 출혈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고대 마법사의 치유술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도련님은 괜찮아요. 어어, 진짜로 괜찮은데. 거짓말 아닌데.”

    또 울 것 같다. 하지만 헬렌은 잠시 훌쩍이더니 물기 어린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전 이렇게 죽어선 안 돼요. 이렇게 죽어줄 수 없어요. 아버지가, 아버지가……. 뮐러가를 지켜달라고 하셨으니까.”

    뮐러가?

    제국 제일의 다이아몬드 회사를 운영하는 바로 그 뮐러가?

    ‘나 방금 엄청난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헬렌은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이 마주한 사람이 로렌 허슬러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맺었다.

    “…죄송해요. 미스 허슬러. 방금 전에 제가 한 말은 잊어주세요.”

    그러다 문간에 서서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내내 기다리고 있던 레이디 로드리치와 눈이 마주쳤다.

    “헬렌. 얘야.”

    “…주인님.”

    시아에게 의지해서 펑펑 울었던 게 거짓말인 양 헬렌은 몸을 돌려 레이디 로드리치에게로 가버렸다. 시아는 그런 헬렌을 잡을 수가 없었다. 위로받을 때와는 전혀 다른, 순식간에 벽을 치고 남에게 거리를 두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아까는 로렌 허슬러니 뭐니 하면서 서럽게 울었으면서! 시아는 당황했으나 곧 이성을 되찾았다. 소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린 뮐러가.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이후로 그녀의 태도가 돌변했었다.

    ‘뮐러가에 대해서 숨기는 거라도 있나. 애초에 저 메이드와 뮐러가가 무슨 관련이 있었던 거지?’

    그러고 보니 자신을 노린다느니 하는 말도 했었다. 엄청난 빚이 있다거나 남의 부모를 죽인 원수라거나 뭐 이런 스토리인가. 하지만 그런 이유로 표적이 된 사람이 다수의 희생자를 만드는 폭발 사건으로 죽는 것도 흔한 전개는 아니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청부 살인이나 납치 같은 방법으로 상대를 노리지 않나. 물론 이런 과격하고 잔인한 방법도 영화니까 실행하는 방법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죗값을 치르길 바랄 때 상대를 경찰에 신고하거나, 고소하여 법원에 세운다.

    ‘저 메이드가 그런 일에 휘말렸을 것 같진 않지만.’

    한눈에 봐도 보통 귀부인이 아닌 레이디가 두 팔을 벌려 소녀를 맞이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시아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기억을 더듬다, 그녀가 세인트 밀레이나 돔의 로비에 있는 초대 예술감독 흉상과 똑같은 사람인 걸 알아차렸다.

    세상에. 저 사람이 진짜 밀레이나 로드리치란 말이야? 이런 데서 내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단 사실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레이디 로드리치가 소녀를 꼭 끌어안았다. 평범한 메이드와 귀부인의 관계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시아는 아까 소녀에게서 들었던 뮐러가라는 말을 계속 되뇌었다.

    나야 뮐러가를 뮐러 다이아몬드라는 회사의 전신으로만 알고 있지만.

    ‘제국 귀족 계보에 통달한 라크시스라면.’

    분명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터다. 그렇게 생각하며 라크시스를 돌아보았을 때.

    “시아.”

    떨떠름하게 웃고 있는 라크시스와 잔뜩 화가 난 요르문, 저 멀리 문간에서 마침내 사냥에 성공한 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차탈을 발견하고 말았다.

    * * *

    “누님!”

    “왜 그래애.”

    시아는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지금 그녀와 요르문, 라크시스와 차탈은 별관 이 층의 테라스에 있었다. 어떻게 알고 차탈이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공을 피와 저주로 엉망이 된 방에서 맞을 순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요르문, 미안해. 그렇지만 그게…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단 말이야.”

    차탈이 곁에 있어서 봉인을 봉인이라 부르지도 못한다. 나와 함께 대놓고 연회장을 가로질렀던 라크시스도 침묵으로 변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리 그러셔도 안 봐줄 거예요. 제가 누님을 저 스토커에게서 숨기려고 얼마나…….”

    하.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요르문이 한숨을 쉬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든 차탈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삼 년 전에 뵙고는 처음이죠?”

    삼 년 전이라. 지금이 3520년이니 아마 3517년, 그러니까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의 인부 쉼터에 떨어졌던 그날을 말하는 것일 터다. 라크시스와 처음으로 만났던 날, 노든 대공 그러니까 차탈은 나를 라크시스가 몰래 숨어 만나는 애인으로 착각해서 자리를 피해주겠다며 사라졌었지.

    차탈과 마주친 순간은 그때 고작 몇 분이 전부였다.

    ‘와, 그걸 용케도 기억하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내게 알은체를 해오는 것이다. 누가 보면 오랜 친구를 만난 줄 알겠어.

    “그런 것 같네요. 이 정도면 초면 같은데요?”

    “하하, 그렇습니까? 전 그렇지 않은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는 여전했다. 표정만 그렇지 혀에 독을 품었는지 칼을 품었는지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레이디 켈튼, 아니 미스 로렌 허슬러. 만나서 정말로 반갑습니다.”

    잠시만, 이 사람이 로렌 허슬러를 어떻게 알아? 그건 그저 내가 재키 레이븐을 잡을 때 잠시 사용했던 이름인데. 아직 앨런 어셔의 연작이 출간되려면 한참 멀었는데.

    ‘그러고 보니 아까 그 메이드도 나한테…….’

    불길한 기운이 엄습한다. 설마 슈나이더 경감님의 소설이 벌써 나온 걸까? 원래 출간될 시기보다 몇 년이나 빠른 이 시기에?

    그때 차탈이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시아는 움찔 뒷걸음을 치다 멈춰 섰다. 악수라니. 그것도 제국의 대공씩이나 되는 남자가. 보수적인 제국의, 그것도 마도 시대의 일반적인 통념을 생각한다면 정말로 의외의 반응이었다.

    라크시스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무례하긴. 소개도 없이 내 피후견인에게 손을 덥석 내밀다니.”

    “하하, 우리가 소개가 필요한 사이던가?”

    “적어도 내 피후견인에겐 소개가 필요하겠지. 물론 그쪽을 소개해 줄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라크시스가 기다란 지팡이로 차탈을 막아섰다. 그의 걸음을 저지하려는 듯 구두코에 버티고 선 지팡이에서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확 찍어버릴 거다, 하는 무언의 협박이 느껴진다. 그건 그렇고 대체 지팡이는 또 언제 소환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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