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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53)화 (153/292)
  • 153화 

    진실과 거짓, 사건의 인과, 논리적인 흐름과 사실. 헨리 던로가 재키 레이븐이란 걸 알아챈 것도 이런 쪽으로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서 그랬지. 그동안 자신에게 무른 모습을 보여줘서 잊고 있었다. 라크시스가 이런 데에선 철저한 성격이었다는걸.

    “시아. 제게 숨기는 게 있군요.”

    “아뇨?”

    저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진실을 밝히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내가 갈리프예요! 이 한마디면 지금까지 시간 여행 중에 벌어졌던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라크시스는 그녀와 같은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말하자면 시간 여행의 파트너였다. 수국관에서 시아가 겪은 일, 그녀가 만난 존재에 대해 알려준다면 라크시스는 그걸 단서 삼아 앞으로의 봉인 찾기 계획을 또다시 성공적으로 세워둘 터다.

    그렇게 된다면 예정된 종말에서 조금 더 확실하게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자신과 라크시스의 목표는 봉인을 카얄보다 먼저 찾아서 광룡의 부활을 저지하는 것이지 않았나.

    그런데 얼떨결에 방어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왜인지는 몰랐다.

    ‘왜 그랬지?’

    주변에 듣는 귀가 있어서? 평행 세계의 자신이니, 태고룡이니 하는 엄청난 이야기를 하려니 입술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아서?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기묘한 감정에 심장이 쿵쾅거린다. 가슴이 따끔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라크시스의 시선이 정수리에 집요하리만치 달라붙었다. 시아는 쭈뼛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저기, 라크.”

    “네. 말씀하세요.”

    동시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몸이 움찔거렸다.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에는 그녀가 동그랗게 담겨있었다.

    시아가 잠시 머뭇거리자 언제 추궁했냐는 듯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본다. 눈치가 빠르달지 타인의 감정을 살피는 데 예민하달지.

    문득 그가 릴리 알펜이나 다른 사람에게 했던 행동을 되짚어보게 된다. 라크시스는 애초에 온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첫 시간 여행 때 날 곤경에 빠뜨려 실험체로 쓰려고 했던 걸 생각하면 말 다 했지.

    그렇게 생각하니 얼음 성처럼 고고한 그가 내게만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에 묘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쿵쾅거리던 심장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에게서 확신을 받은 기분이다. 내게 보이는 관심도 애정도 오롯이 나를 향한 것이라는 확신. 이런 확신이 왜 필요했던 건진 모르겠지만, 마음이 한결 편해지자 내내 다물려 있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떨어졌다.

    “제가 사실은 이번 시간 여행 전에 만난 사람이…….”

    그때였다.

    바스락, 인기척이 났다. 라크시스와 동시에 고개를 돌리니 깊은 어둠 속에 녹초가 된 인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 반지를 던진 사람이 있겠구나. 바보 아냐. 봉인이 폭발하는 위기를 겪고도 라크시스에게 홀린 듯이 안겨있다가, 저쪽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음. 거기 미스, 음. 네. 괜찮으세요?”

    뒤늦게 피비린내가 확 풍겨온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라크시스 생각만 했던 걸까. 민망해서 더듬거리며 방 안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곳엔 혼절한 남자와 넋이 나간 여자가 덩그러니 있었다.

    “많이 놀라셨죠. 그, 음. 그쪽이랑 거기 누워계시는 분 모두 치료와 안정이 필요하실 것 같은데.”

    “시아, 저주는 파훼됐어요.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먼저 2028호에 발을 들인 라크시스가 문간에 서선 안심하라는 듯 손을 내민다. 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서다 찰박, 하는 소리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바닥에 다 피야?’

    점도 높은 시커먼 액체가 구두에 달라붙는다. 어스름한 달빛에 의지해 주변을 살피니 사방에 피로 그린 이상한 문양들이 가득했다. 말로만 듣던 저주의 진이 이건가 보다.

    행여 드레스가 피로 푹 젖을까 바짝 쥐어 들었는데, 풍성한 자락이 바닥에 닿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요르문 님이 사주신 건데. 피 묻은 드레스를 입고 원래 시대의 연회장으로 돌아가게 되면 무슨 변명을 해야 하려나.

    저주의 진 한가운데 앉아있는 여자는 비행선에서 일하는 메이드였다. 하얗던 앞치마가 피범벅이 되어있었고, 아까의 폭발로 큰 충격을 받았는지 눈에 초점이 없었다.

    굉음은 없었는데. 빛이 번쩍여서 눈에 문제가 생겼을까? 혹시 모르니 청력과 시력을 검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사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건 안정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 곁엔 어느새 라크시스가 앉아있었다. 남자의 손목을 잡고 있는 라크시스의 손바닥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왔다. 치유술이었다.

    라크시스는 연미복 자락이 피에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남자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릴리 알펜 사건 이후로 깨달은 바가 있다더니, 정말로 그가 나보다 먼저 나서서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눈썹을 한 번 까딱이더니, 다시 남자를 살핀다.

    시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파트너가 된 것 같다. 파트너라. 사실 그것보단 조금 더 끈끈한 것 같지만.

    라크시스가 쓰러진 남자에게 집중한 사이, 시아는 여자에게 손을 뻗었다. 자세히 보니 앳된 얼굴의, 옛날의 릴리 알펜을 떠오르게 하는 나이대의 소녀였다. 악수하듯 내민 손에 소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위로하려는 찰나.

    “…로렌, 허슬러.”

    소녀가 뜻밖의 이름을 꺼내며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뒤늦게 복도를 뛰어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소녀를 찾아다녔던 건지, 애타는 음성이 사방에 울려 퍼지며 점점 가까워졌다.

    시아는 소녀의 등을 가만히 문질러주었다. 바짝 긴장했던 근육들이 그제야 풀린다. 그녀가 가짜 탐정 신분의 로렌 허슬러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소녀가 펑펑 울었다. 화상에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속에 있던 공포를 모두 털어내며 서럽게 울었다.

    “방금 폭발이, 저를 노리고, 으흑. 으흐흑……. 도련님도 죽을 뻔했고, 대체 누가, 흑…….”

    그 모습이 오래전 재키 레이븐에게서 구해주었던 릴리 알펜과 겹쳐 보였다. 이 소녀도 조금만 늦었더라면 봉인의 폭발에 휘말려 죽었을 테지.

    시아는 눈물범벅이 된 소녀의 뺨을 닦아주었다. 따스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요. 이렇게 탐정 로렌 허슬러가 왔잖아요. 제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오랜만에 로렌 허슬러가 되는 순간이었다.

    【 탐정 로렌 허슬러의 등장 】

    막스는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왔다. 태어나서 이런 기운은 처음이었다. 치유술을 받을 만큼 아팠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치유사가 왜 몸값이 비싼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몸에 흘러들어 오는 마력은 차원이 달랐다. 그때의 기적 같던 경험이 무색할 만큼 압도적인 마력이 죽어가는 몸뚱이에 숨을 불어넣고, 전신의 혈관에 살아있는 피를 흐르게 만들었다.

    대체 내게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이 누구지?

    가물거리는 시야가 점점 맑아지는 가운데, 옆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채자마자 막스는 치유술을 받던 것도 잊고 본능적으로 물었다.

    “…헬, 렌은 괜찮습니까?”

    그러자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일단 그쪽부터 신경 쓰는 건 어떤가? 죽을 뻔한 건 미스 헬렌이 아니라 당신인 것 같은데. 미스터 블레어.”

    천천히 고개를 든 막스는 기절할 뻔했다.

    “라, 라크시스 옌?”

    유니콘보다 더 보기 힘들다는 순백의 마법사가 눈앞에 있다. 그것도 자신을 치료하면서.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내가 황족으로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건가?

    “언제부터 그쪽이 날 이름으로 부를 만큼 가까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죄송합니다. 옌 경.”

    “여기 있는 피는 모두 당신 건가? 용케도 살아있었군.”

    막스가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자 라크시스는 치유를 멈췄다. 그를 일으켜 세우곤 침대에 걸터앉게 해서는 후들거리는 막스의 다리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사이 방을 둘러본 라크시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곳에 발을 디딜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방에 걸린 저주는 보통 저주가 아니었다.

    마력을 갈취하는 저주.

    이건 단순히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저주가 아니었다. 라크시스는 저주의 중심부에 있던 것을 떠올렸다. 풀어 헤쳐진 냅킨이 놓여있던 티 테이블. 아마도 봉인이 달린 반지는 냅킨 링 따위로 위장되어 티 테이블에 놓여있었을 것이다.

    마력은 생명과 직결되는 요소 중 하나다. 마법사들이 마법사가 아닌 자들보다 수명이 긴 것도, 별다른 의학적 처치 없이 치유사들이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마력이 인간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간도 그러할진대. 라크시스는 심장처럼 박동하던 광룡의 봉인을 떠올렸다. 봉인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이유를, 한때 사도들이 그들의 육체를 매개로 광룡의 힘을 봉인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 적이 있었다.

    ‘시아는 실제로 사도를 만났다고 했었지.’

    온전한 봉인을 손에 넣을 때마다 시아는 정체불명의 차원의 세계를 경험한다. 물론 우주니 왕좌니 하는 것들은 그녀에게만 보일 뿐, 시아의 바로 앞에 있었던 라크시스는 그녀가 보았다던 사도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사도는 신기하게도 라크시스가 추측했던 봉인의 정체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은 힘을 품은 사도. 시아는 그들의 육신이 광룡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렸다고 했다.

    일련의 단서를 종합해 보자면 저주가 노렸던 마력은 다름 아닌 사도의 육신을 이루고 있는 광활한 마력이었다. 카얄은 저주를 통해 봉인을 파괴하고, 나아가 봉인에 남은 마력까지 흡수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다만 저주의 진에서 언뜻 보이는 술식이 의외였는데.

    ‘…저주의 시전자는 카얄이 아니라 저쪽의 메이드였나.’

    특정한 조건을 갖추었을 때 저주가 발현이 되도록 술식이 설계되어 있었다. 자세한 건 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대로만 술식을 해석해 보자면 이러했다.

    [주인이 문을 열게 하라.]

    정황상 주인은 반지를 갖고 있었던 메이드일 것이고 문은 봉인일 가능성이 크다. 그 말인즉, 저쪽의 메이드로 하여금 봉인을 파훼하도록 했다는 뜻인데.

    ‘…카얄은 제 손으로 봉인을 파괴하지 못하는 것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저주의 진에 드러난 대로라면, 이 정도 규모의 저주를 만들어놓고도 카얄은 봉인을 어찌하지 못해 남의 손을 빌렸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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