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어둠은 이죽이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시아에게 칭얼거렸다.
[어휴, 말을 말자. 야, 아무튼 얼른 날 천칭에 올려줘. 나도 나에게로 돌아가고 싶으니까.]
‘잠깐, 궁금한 게 있어. 지난번에도 널 천칭에 올렸다가 엄청난 빛이 쏟아졌는데 그건 대체…….’
[넌 이제 네 정체를 알잖아? 시아 켈튼.]
시아가 우뚝 멈춰 섰다.
[본능을 따라. 이제 권능을 사용해 보라고. 네 창조물들을 구해야지.]
토끼 같은 눈망울에 새카만 어둠이 휘몰아친다. 태고의 어둠을 품은 우주가 흰자와 검은자가 구분되지 않는 조그마한 눈구멍에 가득 들어찬다. 맨들거리는 눈알에 담긴 건 거대한 소멸, 어둠의 배 속 그 자체였다.
어둠은 본체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굳어있는 시아를 다독이며 그녀의 손을 발판 삼아 천칭 위로 뛰어올랐다.
[겁내지 마. 시아 켈튼. 별들은 네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줄 테니까.]
동시에 새하얀 빛이 쏟아졌다. 우주에서 가장 밝은 별, 그보다도 강렬하고 거대한 에너지가 천칭을 통해 떠올라 시아에게 돌진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아가 무어라 외쳤지만, 이미 어둠은 사라진 후였다.
후련한 표정의 울리아트가 손을 흔든다. 시아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별의 잔해와 그 속에 남은, 삶을 다해 빛이 바랜 점이었다.
라크시스의 외침이 상념을 깨운다.
“당신이 다치는 건 괜찮고요? 아뇨, 전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이토록 완강하게 날 말리는 건 아마 그가 직접 봉인의 폭발을 겪어봤기 때문일 터다. 그러나 시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봉인, 즉 사도의 육신과 그 속의 어둠은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절 믿어봐요, 라크. 아까 봉인을 찾고 난 후에 벌어진 일을 봤잖아요?”
“그건 아직 파괴되지 않은 봉인이었잖습니까.”
“괜찮을 거예요. 제가 장담할게요.”
시아는 라크시스의 두 손을 모아 그러쥐었다. 길쭉하여 다 쥐어지지도 않는 그의 손가락이 움찔 놀라는 게 느껴진다. 기도하듯 양손이 붙잡힌 라크시스가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렇지만…….”
“날 한 번만 믿어봐요. 저도 자신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고집부리지 않았을걸요?”
내리깐 눈꺼풀 밑으로 푸른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린다. 시아는 여전히 마법사의 손을 속박한 채로, 고개를 기울여 라크시스의 눈동자를 찾아냈다.
이런 표정은 처음이다.
‘아니, 처음이 아닌가.’
은발의 마법사가 칠흑의 머리칼을 지닌 남자와 문득 겹쳐 보였다.
‘라크, 오늘도 다쳐서 온 거니.’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 나와 똑같은 음성.
이것도 갈리프의 기억일까.
그새 허리께까지 차오른 이상 마류가 몽롱한 기운과 함께 사방에서 넘실거린다. 근원지는 승강기 반대편, 복도 끝 어딘가. 불길하게 열린 문으로 중세에서 경험했던 저주의 기운이 풍겼다. 이젠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손을 가운데에 두고 샌드위치처럼 박수를 치며 환기시켰다.
“라크, 이럴 시간 없는 거 알죠?”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사이.
“먼저 갈게요!”
시아는 라크시스를 지나쳐 복도 끝의 2028호를 향해 달렸다. 라크시스의 눈이 커졌다. 그의 시선이 바람처럼 스쳐 간 새벽빛 드레스 자락을 한발 늦게 뒤따른다.
시아는 이미 앞서가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필사적으로 시아의 뒷모습을 쫓았다. 2028호의 문간에 멈춰 선 시아가 다급하게 소리친다.
“당장 그걸 이리 던져요!”
길쭉한 광선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조그마한 물체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다. 그가 분명 본 적 있는 광경이다. 터지기 직전의 오토마톤의 심장. 시아의 손에 정확히 들어온 봉인이 광룡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섬광에 휩싸였다.
라크시스가 손을 뻗었다.
“시아!”
그러나 남자의 손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아찔한 빛에 손마디를 감싼 피부가 붉게 비친다. 내가 늦었나. 내가, 내가 늦은 건가…….
바짝 쪼그라든 폐부에 라크시스가 숨조차 들이키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서 서있을 때.
“…시아. 당신 지금…….”
“하하. 성공한 것 같지 않아요?”
하얀 빛이 사라진 자리엔 은하수에 둘러싸인 시아가 실없이 웃고 있었다.
* * *
라크시스는 시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으아, 숨 막혀요.”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 하지 말아요. 내가, 방금 얼마나…….”
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숨을 멈췄다. 그의 몸이 뜨거웠다.
그가 이렇게나 타인을 뜨겁게 껴안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처음 알았다. 에스코트를 받거나 공간이동을 할 때 가벼이 닿던 것과는 온도가 달랐다. 라크시스의 어깨며 가슴이 그녀를 뒤덮는다.
쿵쿵쿵. 절박했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울림이 그의 전신을 타고 그녀에게 흘러들어 왔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얽어놓은 팔에서도, 어깨에 묻어버린 얼굴에서도, 맞닿은 가슴에서도, 목덜미에서도.
쿵. 쿵쿵.
지금껏 알고 있던 오만한 마법사는 온데간데없었다. 여유로움이 한 꺼풀 벗겨진 남자에게서는 격랑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라크시스답지 않다.
그리고 그가 그답지 않아지는 순간은 오직 그녀의 앞에서뿐이었다.
시아는 가만히 라크시스의 등을 도닥였다.
“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는걸요. 라크, 봐요. 멀쩡하잖아요.”
“그건 다행이지만, 하…….”
“이럴 줄 알았으면 오토마톤의 심장도 제가 가지고 있을걸 그랬어요. 라크도 그때 심하게 다쳤었는데.”
그러자 내내 시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라크시스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시아!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다쳐도 제가 다칠 겁니다.”
라크시스가 시아의 양팔을 붙들고 이리저리 돌렸다. 하지만 시아는 문자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겠지만, 정말로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하다 이거야.
손바닥에 느껴지는 동그란 감촉을 보아하니, 이번 봉인은 아마 반지에 달린 보석이었나 보다. 봉인이 떨어져 나가 발물림만 남은 반지가 따갑다.
시아는 천천히 주먹 쥔 손을 폈다. 예상대로 검게 그을린 반지가 알록달록하고도 희뿌연 파편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 드디어 막내 탈출인가 했는데,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갈리프여. 배신자 형제를 조심하십시오. 그는 이제 오로지 당신에게 복수하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봉인을 잡는 순간, 울리아트만큼의 형체조차 갖추지 못한 별이 눈앞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이미 파괴된 봉인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슬아슬하게 타이밍이 맞았는지 다행히도 봉인은 유지되어 있었다. 눈을 떴을 땐, 봉인 속에 갇혀있었던 동그란 어둠만이 손바닥에 남아있었다.
[운 한번 기가 막히네. 다음번엔 좀 더 빨리 오라구.]
종알종알 잔소리를 해댄 어둠은 시아를 재촉하여 천칭에 올라갔다. 그러곤 또 다시 빛이 쏟아졌다.
우주에 남은 별의 파편이 사도의 죽음을 알리며 울었다. 제대로 인사조차 해보지 못하고 떠나보낸 별. 그 역시 갈리프의 사도일 테지.
‘이름도 못 들었네.’
시아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라크시스에게 내밀었다.
“라크. 여기요.”
그가 잠시 고장 난 것처럼 멈춰있다가 한 박자 늦게 눈을 굴렸다.
“보일러실에서 찾은 봉인은 사도 울리아트였어요. 이번 봉인의 사도는 누군지 모르겠지만요.”
“이번에도 사도를 만났습니까?”
“음, 울리아트는 다무스를 만났을 때와 비슷했어요. 다무스보다 더 약해져 있었고, 형체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요.”
이 반지의 사도는 마주하자마자 사라져 버렸고요. 시아가 덧붙였다.
라크시스가 반지를 집어 들었다.
심한 폭발을 경험한 것치고 반지의 틀은 의외로 멀쩡했다. 희미하게 감도는 마력에서 봉인의 이상 마류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봉인을 보호하기 위해 또 다른 마법을 둘러놓은 것 같달까.
저주받은 보석이라 불리던 인어의 눈물, 즉 요르문이 경매장까지 가서 구해온 봉인(그때까지만 해도 광룡의 봉인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과는 다른 전철을 밟아온 게 틀림없다.
그 말인즉 이 반지의 주인은 봉인을 보석으로 착각하고 가공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봉인의 존재를 알고 그것을 반지의 형태로 보관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생김새를 보니 가문의 반지 같습니다. 예컨대 가주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상징적인 보물이랄까요.”
“어, 그러고 보니 여기에 글씨가 적혀있네요.”
반지의 안쪽을 따라 음각으로 글귀가 파여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글귀인데.
“시그무트 아 함 나타……?”
시아가 더듬더듬 글자를 읽어나갔다. 소리 내어 읽고 나서야 뒤늦게 글귀가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중세의 다무스 제례 의식에서 사도들의 이름을 외치던 사람들.
시그무트 아 함 나타.
위대하신 나타여.
“이번 사도는 나타, 라는 사도였나 봐요.”
그러나 라크시스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냐고 맞장구를 쳐줄 법도 한데. 민망해서 그를 바라보니 매끈한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마치 화창하던 하늘에서 뜬금없는 먹구름을 발견한 것처럼 그녀를 관찰하듯 훑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시아. 이 문자들이 읽히십니까?”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라크시스는 그녀를 추궁하고 있었다. 추궁이라기보단 진실을 알아내고 싶어 하는 눈치에 가까웠다.
“제국어는 아니긴 하죠……. 하하, 어쩌다 보니 읽을 수가 있게 됐네요. 아하하…….”
아마도 갈리프가 읽을 수 있는 문자일 테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형태의 문자를 어디서 봤었는데.
‘아, 다무스 신전의 제단에서…….’
그때 라크시스가 제단에 새겨진 글귀를 보고 이렇게 말했지.
“이거 고대어잖아요. 이젠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얼마 없다고 들었지만.”
얼버무리면서 대충 넘어가려 했는데. 라크시스가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래, 그때도 궁금하긴 했습니다. 시아, 고대어를 할 줄 아십니까? 누구에게 배운 거죠? 람다스 교수? 아니면 미래에도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남아있습니까?”
구체적으로 허점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에 시아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누구에게 배웠냐니.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 없다더니, 설마 내 스승이 누군지 알아보려 하는 건 아니겠지?
어째 처음 시간 여행을 할 때로 돌아간 것 같다. 그녀가 요르문의 친척 누님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그가 시아의 거짓말을 파헤치기 위해 요르문과의 삼자대면이라는 함정을 팠던 오래전 그날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