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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49)화 (149/292)
  • 149화 

    메이슨은 빨개진 얼굴을 달래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화려한 생활은 물론이요, 남의 칭찬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요르문은 어리숙한 그 모습이 못마땅했으나 그저 한숨만 쉴 뿐 더는 그를 타박하진 않았다.

    그때였다.

    “하하, 운이 좋은 건 미스터 비렌체가 아니라 로드 켈튼인 것 같습니다만.”

    호쾌한 목소리가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요르문의 눈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붉은 머리의 황자. 노든의 대공.

    호감을 주는 외모와 뛰어난 언변, 꾸준한 선행과 미담으로 제국민의 사랑을 차지해 온, 촉망받던 차기 황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제의 유일한 혈육이었으나 황제가 아들을 낳는 바람에 황위 계승 순위에서 밀려난 남자.

    차탈 디아우스 세페란테였다.

    【 기습 】

    “…대공 전하.”

    “대공 전하라고요?”

    소곤거리며 화들짝 놀란 메이슨이 망가진 오토마톤처럼 뚝딱거렸다. 당장이라도 엎드려 절이라도 할 것처럼 굴기까지 한다.

    대체 어떻게 레이디 로드리치에게서 빠져나온 거지?

    이럴 때면 라크시스나 차탈이 정말로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다. 요르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도회에서 춤을 거절하고도 구설수에 오르지 않는 법을 따로 연구하기라도 하나.

    메이슨의 팔을 꽉 붙든 요르문은 턱에 힘을 주고 중얼거렸다.

    “대충 인사해. 재수 없는 스토커 녀석이니까.”

    그러나 차탈이 한발 더 빨랐다.

    “이게 누구신가! 소문의 천재 발명가 아니십니까. 반갑습니다, 미스터 비렌체. 노든의 차탈 디아우스 세페란테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메이슨 비렌체입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대공 전하!”

    제국민에게 사랑받는 황자답게 차탈은 보기 좋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손을 내밀었다. 메이슨은 얼떨결에 덥석 손을 마주 잡곤 상체를 숙였다.

    “하하.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야말로 켈튼 코퍼레이션의 수석 연구원을 만나게 되어 영광인 걸요.”

    “…과찬이세요.”

    메이슨이 돌연 파르르 떨며 악수를 멈췄다.

    “죄송해요! 손에 땀이 나서 어쩌죠.”

    “괜찮습니다. 미스터 비렌체가 로렌시아호를 개발하며 흘리던 노력이라 생각하면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지요. 자, 손수건 받으세요.”

    “이런 귀한 걸 제가 받아도 될까요?”

    “귀하긴요. 미스터 비렌체가 제 손수건을 받아주는 것이야말로 귀한 일입니다.”

    사양과 권유가 오가는 대화가 사뭇 화목하다. 그 와중에 차탈의 손수건을 받아 든 메이슨의 눈이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초롱초롱했다.

    ‘아주 둘이 연애를 해라, 연애를.’

    뒷골이 당긴다. 요르문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 내가 대충 인사하랬는데. 이래서야 차탈에게 말려드는 것 같잖아.

    결국 요르문은 메이슨을 제치고 나섰다.

    “무슨 일로 이 구석진 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로드 켈튼, 그렇게까지 날 경계한다니 서운한데. 난 그저 이 대단한 발명가를 발굴해 내게 된 경위가 궁금하여 찾아온 것뿐이네.”

    메이슨에게 보이던 호의가 돌연 거두어진다. 요르문을 향해 몸을 돌린 차탈은 가식이 한 꺼풀 벗겨진 낯으로 손을 내밀었다.

    “듣자 하니 미스 로렌 허슬러가 미스터 비렌체를 구했다지?”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고작 그런 것이라니. 전에도 느꼈지만 로드 켈튼은 친척 누이에게 너무 박하게 구는 경향이 있어.”

    아, 성가신 자식. 요르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친척 누이라니요. 제게 로렌 허슬러라는 누이가 없단 건 온 제국민이 알 텐데요.”

    “오, 자네 누이가 들으면 서운해할 소리를 하는군. 난 단지 그동안 경찰도 못 잡았던 희대의 살인마를, 그것도 스스로를 미끼 삼아가면서 검거한 사람에게 아무런 포상도 못 해준 게 내무장관으로서 계속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차탈의 눈은 웃고 있었으나 그 속의 시선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겉으로는 상식적인 말을 내뱉고 있으나 그 속은 진작 문드러져 불바다가 되어있을 터다.

    ‘일부러 내 앞에서 계속 누님을 언급하는 거겠지. 듣는 귀가 많은 곳에서 말이야.’

    요르문의 추측은 정확했다. 차탈이 로렌 허슬러의 이름을 입에서 꺼내는 순간 벌써 수십의 눈동자와 귀가 이쪽을 향해있었다.

    ‘질기긴.’

    차탈이 로렌 허슬러를 몇 년이나 찾아다녔다는 건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차탈이 오랫동안 라크시스 옌을 견제해 왔고, 평생 약점 하나 없을 것 같던 라크시스가 유독 로렌 허슬러라는 여인을 이상하리만치 감싸고 돌았기 때문이다.

    와중에 재키 레이븐을 검거하던 날 이후로 로렌 허슬러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녀를 둘러싼 무수한 소문과 추측만이 거리에 나돌 뿐이었다.

    예컨대 로렌 허슬러가 라크시스 옌의 숨겨진 연인이라든가, 켈튼가의 영애라든가 혹은 요르문 켈튼의 유일한 혈연이라든가 하는 이야기 말이다.

    “라크시스 옌이 참석한 파티에서라면 로렌 허슬러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닌가?”

    듣는 귀가 늘어났군. 요르문은 주변을 재빨리 훑었다. 평화로운 웅성임은 아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으나 묘하게 사람들이 많았다. 냄새를 맡은 모르간 타임즈의 편집국장은 티 푸드를 집어먹는 척하며 어느새 은근슬쩍 몸을 기울여 왔다.

    차탈은 여전히 손을 내민 채로 서있었다.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 사람들의 눈과 귀를 무기 삼은 지금을 기회라고 여기는 듯했다.

    내가 당황해서 무방비하게 대답해 버리면 누님의 정체를 계속 캐물을 생각인가 본데.

    그렇게 쉽게는 안 되지.

    요르문은 차탈의 악수를 받아들이며 빈정거렸다.

    “저도 대공 각하께서 소설 속 인물을 줄곤 실존 인물이라고 믿어오셨다는 사실이 심히 마음에 걸리는군요.”

    “…아하.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어쩌겠습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될 때도 있는 법이죠. 그런 걸 집착이라고 합니다만.”

    그때였다.

    풋.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딱 한 번뿐이었고, 그마저도 제게 화가 미칠까 허둥지둥 입을 막는 것 같았지만 차탈과 요르문은 그 소리를 듣고 말았다. 아마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도 들었을 것이다.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이런, 안색이 별로 좋지 않으신 것 같군요. 눈도 충혈되셨고, 열도 좀 있으신 것 같고요.”

    “…요르문 켈튼.”

    “과한 집착은 정신 건강에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대공 전하.”

    차탈의 턱이 파들파들 떨리는 게 보인다. 요르문은 비릿하게 웃었다. 당장이라도 악수하던 손을 내치고 내 뺨을 때리고 싶을 텐데. 보는 눈이 많아 차마 그러지 못하는 꼴이 우스웠다.

    요르문은 저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차탈의 보좌관을 턱짓으로 불렀다.

    “거기, 제프리였던가? 자네는 상관이 이런 상태인데 곁에서 제대로 보좌하지 않고 뭘 했지?”

    “…예? 예, 예에. 대공 전하. 잠시 자리를 피하시는 건 어떠실지…….”

    차탈의 보좌관이 허둥지둥 다가와 차탈의 주변을 맴돈다. 그러나 차탈은 악수하던 손을 천천히 빼냈다. 잔뜩 힘주었던 턱도, 실금이 갔던 미간도 어느새 평평해져 있었다.

    마치 단 한 번도 평정을 잃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 모습이다. 자존심이 상해 화를 낼 법도 하건만 차탈의 얼굴에는 일말의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가면이었다. 감정을 절제하고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신사의 가면. 그러나 그 가면이 지나치게 완벽해서 도리어 섬뜩해 보인다면 어떨까.

    차탈은 이내 아쉬움을 잔뜩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드 켈튼. 나는 내무장관으로서 제국의 치안과 안전에 힘써준 자에게 마땅한 보상을 해줄 의무가 있는 사람이네. 자네가 내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건 안타깝지만, 어쩌겠나.”

    그가 속삭였다.

    “앞으로 더 노력해 보지. 가여운 보좌관에게 상관의 건강 상태까지 살피라고 명령하는 것도, 로렌 허슬러라는 이름 뒤에 숨은 영웅을 찾는 일도 말이야.”

    곳곳에서 작은 탄식이 터져 나오다 재빨리 자취를 감춘다. 이번엔 요르문의 눈치를 보며 숨는 모양새였다.

    ‘젠장.’

    그럼 이따 또 보지. 요르문의 어깨를 툭툭 치고 떠나는 차탈의 손길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처럼 가벼웠다. 요르문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차탈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졌다. 내가 말렸어.’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잘 상대했다고 생각했는데 황좌를 노리는 놈은 달라도 뭐가 다르긴 한 모양이다. 도발에 걸려들어서 버럭 소리라도 칠 줄 알았는데.

    “후…….”

    “로드 켈튼, 괜찮으세요?”

    메이슨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차탈이 준 손수건을 등 뒤로 숨기는 것을 보니 요르문과 차탈의 사이가 영 좋지 않다는 건 용케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요르문은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쓸어넘기며 불퉁하게 대꾸했다.

    “그러게 내가 대충 인사하랬잖아. 누가 보면 내 사람이 아니라 대공의 사람인 줄 알겠어?”

    “…제가, 로드 켈튼의 사람인가요?”

    “그럼 아니야?”

    “아, 아녜요. 그냥…….”

    갑자기 메이슨의 두 귀가 붉어졌다. 차탈에게 바보처럼 굽신거렸다고 타박한 건데, 뭐가 또 좋은지 헤실거린다. 혼나는 게 적성에 맞는 거야?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나저나 아까 완전 살벌하던데요. 저였다면 당황해서 레이디 켈튼의 정체를 말해버렸을 거예요.”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랬지. 나도 대공 상대하는 건 힘들어.”

    “믿는 구석이요?”

    “어, 그런 게 있어.”

    한동안 로렌 허슬러를 둘러싼 가십으로 제국이 떠들썩했으나 앨런 어셔의 연작이 히트를 친 후, 그녀의 실존을 믿는 사람은 상당수 사라졌다. 영악한 작가가 재키 레이븐 검거 사건을 제 작품 홍보에 이용했다는 의견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소설이 유명세를 탈수록 로렌 허슬러가 허구 속 인물이라는 주장 또한 주류가 되었다. 이윽고 사람들은 점차 로렌 허슬러에 대한 관심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 모든 여론 몰이의 물밑에는 라크가 있었지.’

    라크시스가 미리 손을 써두지 않았더라면 방금처럼 차탈에게 맞설 수 없었을 것이다. 소설과 실제는 구분하셔야지요, 라고 비꼬면서 말이다.

    다시금 클럽으로 향하려던 때였다.

    “아, 전하께선 여기 계셨군요.”

    불길하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발길을 사로잡는다.

    “오, 발자크! 그대도 로렌시아호에 있었지. 내내 안 보여서 하마터면 그대가 있는 것도 잊어버릴 뻔했지 뭐야.”

    “그리 말씀하시면 서운합니다, 대공 전하. 워낙 인기가 많으시니 다가갈 틈이 있어야지요.”

    ‘발자크?’

    호탕한 음성 사이로, 이곳에서 들려선 안 될 이름이 들린다. 차탈이 걸음을 멈추고 누군가와 마주 섰다. 찬란한 금발에 천사 같은 음성. 그러나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살인자의 얼굴.

    ‘제기랄!’

    이자벨라를 조종하던 사제. 아스타를 죽이고 에드먼드에게서 붉은 심장을 빼앗으려 했던 검은 마법사.

    갈리프의 첫 번째 사도이자 광룡의 진짜 정체.

    카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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