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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48)화 (148/292)

148화 

* * *

“저렇게 두고 나와도 괜찮은 거 맞아요?”

성큼성큼 걷는 요르문을 메이슨이 헐레벌떡 뒤쫓았다. 어찌나 빠른지 보폭이 그리 차이 나지 않는데도, 요르문은 벌써 연회장 가장자리까지 다다라 있었다.

“헉, 허억. 같이 가요, 로드 켈튼! 와하, 어떻게 그렇게, 헉, 빨라요?”

“대공이 오고 있었잖아. 저거랑 안 마주치려고 내가 얼마나 애썼는데.”

요르문은 몸서리를 치며 중얼거렸다.

이번 파티에서 요르문에게 주어진 특명은 다음과 같았다.

[시아의 출현을 대공에게 들키지 말 것.]

라크시스가 신신당부했던 것이었다. 요르문만큼은 아니어도 차탈 역시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였다. 지금까진 차탈이 시아가 시간을 건너오는 것을 직접 목격한 적이 없으니 요르문의 친척이라든가 술란 출신 무역상의 딸이라든가 하는 말로 얼버무릴 수 있었지만, 그가 하늘에서 등장하는 시아를 발견하는 건 문제가 달랐다.

‘틀림없이 단순한 공간이동이 아닌 걸 알아차릴 거야.’

시간 여행자. 황위에 혈안이 된 차탈에게 미래에서 온 시아는 황좌를 확실하게 손에 넣게 해줄 도구가 될 터다. 누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지, 미래에 자신이 진짜로 황제가 되는지. 차탈이 칠십 년 후의 미래를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황실엔 분명 전에 없던 피바람이 불 것이다.

‘거기다 광룡의 존재를 알아서도 안 되고.’

광룡의 부활이라니. 제국의 멸망이 예정된 것을 알게 되면 차탈은 틀림없이 고대 마법사인 라크시스를 압박하여 정치의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다. 황좌를 갈망하던 것과 별개로 차탈은 제 나라를 진심으로 아꼈고, 아마 제국의 안전을 위해 라크시스의 목숨 같은 건 광룡 앞에 내몰아 버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그렇다고 파티 내내 차탈 저놈과 붙어있는 건 더더욱 싫단 말이지.’

요르문은 진저리를 쳤다. 원래부터도 음침하고 간사한 놈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까마귀에 행인들의 눈을 빌려 정적들을 감시하는 게 말이 좋아 견제지, 사생활 침해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모르간 광역 경찰청의 꼭대기에 있는 내무장관이 이렇게 불법을 저질러도 되냔 말이다.

심지어 라크시스와 요르문은 정치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일부러 선언까지 했던 중립 세력이었다. 그랬음에도 차탈은 끊임없이 까마귀들을 보내왔다. 켈튼 저택에 쳐둔 마력장에 부딪혀 떨어진 새가 한두 마리가 아니다. 헤이든이 울상 지으며 집어온 까마귀가 한 무더기였다.

어쨌든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차탈과 최대한 떨어져 있되, 그가 시야 안에 있도록 맴돈다. 그러곤 차탈의 정신은 빼놓는 것이다. 그가 창밖을 볼 일이 없도록 계속해서 사람들을 보내고, 마폭탄으로 불꽃놀이를 벌여 시아가 나타나면서 흔들릴 마력 파장을 불꽃놀이의 잔상으로 가리는 것이다.

요르문의 계획은 대부분 성공했다.

단 한 가지, 시아의 행방에 눈이 뒤집힌 차탈이 요르문의 뒤를 계속 쫓아다니는 것을 빼면 말이다.

“하지만 아까 레이디들이 정말로 상처받은 표정이었는걸요.”

“어차피 결혼하지도 않을 거, 괜히 춤추면 나만 피곤해져. 너야말로 하루 종일 붙잡혀서 춤이라도 추려고? 결혼하고 싶은 레이디라도 있나?”

“아뇨! 설마요! 저는…….”

대번에 얼굴이 토마토가 되어선 손을 내젓는다. 당황한 메이슨이 어버버거렸다. 요르문은 낄낄거렸다.

“왜, 아까 저들이 한 말 못 들었어? 너더러 괜찮은 신랑감이라고 하던데. 네가 춤 추다가 발을 밟아도 좋다고 할걸.”

“안 돼요! 릴리에게 오해받는 건 싫단 말예요…….”

한때 메이슨이 시아를 마음에 둔 줄 알고 기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메이슨의 그녀가 누군지 알게 되고 난 후부터는 그를 놀리기에 바빴다.

때마침 차탈에게 레이디 로드리치와 병아리들이 달라붙었다. 그들의 소개를 받고, 한 명씩 모두 춤을 춰주려면 차탈은 아마 한참 후에나 재잘대는 아가씨들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티 룸 근처에 잠시 몸을 숨긴 요르문이 얇은 버터가 발린 빵을 슬쩍 집어 들었다.

“그래서 소원대로 무도회에 참석해 보니 어때?”

“…생각보다는 힘드네요.”

“생각보다 힘들어? 죽을 만큼 힘든 것도 아니고?”

“그야 전 요르문 님이 곁에 있으니까요.”

메이슨이 배시시 웃었다. 요르문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며 메이슨에게 다무스산 클라레를 건넸다.

“라크 녀석은 이런 무도회를 잘만 다닌단 말이지. 천 쪼가리를 둘둘 두른 여자와 목 끝까지 단추를 꽉꽉 잠근 머저리 천지인데 말이야.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어.”

“고대 마법사님도 짝을 찾으러 다니시는 건가요?”

“…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했다간 라크 손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

메이슨을 위한 요르문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그냥 레이디 켈튼께 청혼하시면 될 텐데.”

“그러질 않고 있으니 우리가 미치는 거야.”

요르문은 답답한 크라바트를 대충 잡아 풀곤 차가운 홍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늘도 봐. 우릴 야생의 먹잇감으로 내던지고 자기 혼자 홀랑 내빼지 않았겠냐고. 누님만 아니었으면 내가 라크의 발을 진작 연회장 바닥에 붙여버렸을걸.”

메이슨이 키득거렸다.

티 룸 다과를 거덜 내다시피 한 요르문이 새 접시를 들고 들어오는 풋맨을 보며 슬쩍 물러섰다. 종일 먹고 서있기만 했더니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휘스트나 하면서 오가는 풋맨에게 차탈의 거취를 알려달라 해야겠다.

“클럽이나 가 있자고. 여기보단 나을 테니까.”

“사교 클럽이요? 우와, 저 엄청 궁금해요.”

“적어도 춤추자고 달려드는 사람은 없지. 대신 머저리 소굴이라는 건 똑같지만 말이야.”

“저, 다른 곳도 구경시켜 주시면 안 돼요?”

요르문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보다 네가 여길 더 잘 알 텐데? 켈튼 코퍼레이션의 수석 연구원님.”

“하지만 제가 만든 건 하늘에 뜨는 쇳덩이지, 이런 대저택이 아니었다고요…….”

또 무엇에 겁먹었는지 잔뜩 움츠러든다. 따뜻한 곳에서 잠들고, 배불리 먹고, 엄청난 부를 거머쥔 데다 좋아하던 발명도 원 없이 하게 되었으면서도 메이슨은 종종 이랬다. 귀족을 무서워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알았으니까 그만 울상 지어. 못생겨진다.”

요르문은 메이슨의 미간을 꾹 눌러 폈다.

시아의 두 번째 시간 여행에서 시작된 인연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괴한에게 공격받은 무명의 발명가 따위. 솔직히 치유 마정석까지 사용해 가며 돌봐줄 이유는 없었다.

돈이 아깝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넘쳐나는 돈을 손님에게 쓰는 건 상관없었지만, 얼굴도 모르는 외부인을 자신만의 공간에 들이는 게 싫었을 뿐이다.

‘누님만 아니었다면.’

요르문은 간절하게 제게 부탁하던 시아를 떠올렸다.

‘메이슨 비렌체를 돌봐줘. 그 사람, 평생 빛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비운의 천재 발명가야.’

시아가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사람을 천재 발명가라고 지목한 사실이 요르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마도 공학의 정수, 로튼데일의 전성기를 가져온 게 누군지 알고서 그러시는 걸까?

요르문은 저보다 자존심이 강한 라크시스가 제 편을 들어 같이 누님에게 반박해 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시아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미스터 비렌체를 후원해 줘.’

‘역시 자네도……. 잠깐, 라크. 나더러 그 남자를 후원하라고?’

‘미스터 비렌체는 네게 좋은 파트너가 될 거라 생각하는데. 연구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게 둘이 서로 닮았거든.’

‘라크!’

결국 시아의 부탁과 라크시스의 반협박으로 메이슨 비렌체를 거두게 됐다. 천재 발명가라는 명성답게 메이슨은 곧잘 요르문을 따라 그의 연구실에 기웃거렸고, 처음에는 메이슨을 귀찮아하던 요르문도 어느새 그의 공학 실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봐, 메이슨. 내 밑에서 일해볼 생각 없나?’

‘…제가 감히 그래도 될까요?’

‘거절 한 번을 안 하네. 뭐, 좋아. 사실 내가 최근에 작은 회사 하나를 세웠는데 말이야. 그대 같은 사람이 연구원으로 일해주면 좋겠어.’

‘발명이든 연구든 원하는 대로 해도 좋아. 사고 쳐서 몇천만 비스크든 몇억 비스크든 날려도 상관없고. 단, 내가 요구하는 한 가지는 만들어줘야 해. 그런 조건이면 어때, 일해보겠어?’

‘…감사합니다. 로드 켈튼, 아니 사장님.’

그때의 메이슨은 감격에 젖다 못해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요르문은 문득 만감이 교차했다. 메이슨이 천재라는 시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메이슨은 입사 후 얼마 안 가 켈튼 코퍼레이션의 수석 연구원 자리에 올랐다.

부유 마정석 없이도 하늘을 날 수 있는 비행선을 만들어달라고 했던 요르문의 요구는 가볍게 해결했고, 나아가 화물기며 전투기에 어마어마한 무게로 창공을 나는 로렌시아호까지 만들어내며 제국의 하늘을 단숨에 장악했다.

이제 메이슨은 요르문의 후원이 필요 없을 정도의 거물이었다. 오죽하면 경쟁사에서 현 연봉에 웃돈을 줄 테니 이직하라고 꼬드겼을까.

그러나 메이슨은 요르문을 떠나지 않았다.

‘전 로드 켈튼께 평생 갚아도 모자랄 은혜를 입었는걸요.’

넌 이젠 그 은혜 따위 갚고도 넘칠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고, 메이슨.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돼. 고작 이런 파티 따위에 주눅 들지 말고 어깨를 당당하게 펴란 말이야.

그러나 그런 요르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메이슨은 갓 상경한 촌부처럼 정신없이 비행선을 구경했다.

“어떻게 이렇게 호화로울까요? 높으신 분들은 매일같이 이런 걸 먹고 마시면서 사는 거겠죠?”

“이젠 그 호화로움에 익숙해질 때도 됐지 않았어? 묘지 파헤쳐서 생활하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고, 메이슨.”

“그 얘기는 하지 마세요! 저도 부끄럽단 말이에요!”

새된 소리를 낸 메이슨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달아올랐다.

“전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세상에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레이디 켈… 미스 허슬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전 아직도 공동묘지에서 시체를 찾아다니고 있었을 거예요.”

또다. 메이슨은 과거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위축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하면 태도가 달라진다는데.

“운이 좋긴. 실력이 좋은 거지. 누님이 아니었어도 넌 성공했을 거야.”

요르문은 중얼거리듯 대답하며 잔 너머로 메이슨을 응시했다.

메이슨 비렌체는 실제로 성공할 운명이었다. 그가 죽고 난 후의 먼 미래에.

그렇게 생각하니 시아가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단 사실이 새삼 실감 나고 만다. 만약 시아가 시간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메이슨은 검은 괴한에게 피습당한 그날 죽었을 가엾은 희생자에 불과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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