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뭐 해요. 그쪽 동행 소개 안 시키고. 내가 그대들 소개시키느라 입술이 부르터 떨어져 나갔으면 좋겠소?”
“…여긴 미스터 메이슨 비렌체. 그쪽 이름은 아까 들었으니 됐네요.”
“저, 저런 무례한……!”
결국 밀레이나가 요르문의 귓가에 바짝 다가가 으르렁거렸다.
“난 지금 무도회장에 홀로 서있는 게으른 신사를 몸소 구해주고 있는 셈이오. 게다가 분명 내 명예에 흠이 가지 않게 하겠노라고 옌 경에게 약조받았네. 로드 켈튼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귀부인들 앞에서 내가 뭐가 되겠나.”
“그건 라크와 한 약속이겠지요, 레이디 로드리치. 날 귀찮게 하면 멋대로 굴어버릴 거라고 분명 경고했습니다만.”
무도회 내내 소개받은 아가씨만 해도 벌써 손가락 발가락 다 꼽고도 한참은 넘친다.
자선 무도회라더니, 정말이지 온갖 사람들이 죄다 몰려들어 춤을 추고, 먹고 마시고, 또 춤을 추고. 널리고 널린 게 춤을 못 춰 안달 난 남자들인데, 왜 이렇게 사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
라크시스는 웃으며 춤을 승낙하고, 아가씨들로 하여금 두 번 다시 그와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만든다던데. 그 비법이나 전수받을 걸 그랬나. 하지만 그것도 라크시스니까 할 수 있는 방법일 터였다.
그때, 저 멀리 차탈이 보였다. 이크. 요르문이 다급해졌다.
“제가 지금 목이 너무 말라서. 여기서 입을 더 떼었다간 입술이 부르터 떨어지다 못해 목구멍까지 찢어질 것 같군요.”
요르문은 테이블 위에 쌓인 빈 잔을 가리키며 으쓱였다. 메이슨을 낚아채더니,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럼, 이만.”
모여든 여인들이 모두 벙쪄선 할 말을 잃었다. 뒤늦게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달아오르는 귀부인들과 억울하여 눈시울을 붉히는 아가씨들을 밀레이나가 재빨리 달랬다.
“미안해요. 주최자로서 여러분께 대신 사과드리죠. 로드 켈튼이 괴팍한 거야 워낙 유명하니, 원.”
재빨리 주변을 물색하는 레이디 로드리치의 레이더망에 때마침 차탈이 걸려들었다.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까맣게 모른 채, 요르문의 물빛 머리만 찾아 돌진할 뿐이었다.
레이디 로드리치가 부채를 촥 펼쳐 우아하게 살랑거렸다.
“마침 저기에 대공 전하께서 오시는군요. 모두 기분 풀어요. 훨씬 멋진 남자를 소개해 줄 테니까.”
* * *
그러나 기분이 풀리지 않은 건 밀레이나였다.
“노든 대공 전하. 이쪽은 로젠버그가의 미스 패트리샤 로젠버그. 미스 로젠버그? 이분은 노든의 로드 차탈 세페란테.”
대공 전하는 소개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이 모두 아실 테지만요. 밀레이나가 너스레를 떨며 차탈에게 눈짓했다. 대공은 요르문 켈튼보다야 상식적인 사람이니 아까처럼 체면치레를 못하게 될 일도 없을 터다.
“아름다운 분들이 이리 저를 먼저 찾아주시니, 사랑의 화살이라도 맞은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는군요.”
예상대로였다.
차탈이 사람 좋게 웃으며 화답하자 곳곳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다소곳이 드레스 자락을 쥐며 대공을 바라보는 소녀들의 눈길이 뜨겁다.
“대공 전하. 우리 패트리샤가 가보트를 잘 춘답니다.”
레이디 로젠버그가 딸을 자랑하자, 이에 질세라 레이디 피셔도 딸 마틸다를 들이밀었다.
“호호, 마틸다는 종달새처럼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어머니!”
“넌 숙녀답게 좀 가만히 있으렴. 이 엄마를 로젠버그 앞에서 망신 주기 싫으면 말이야.”
얼굴이 화끈거리는 자랑에 마틸다가 레이디 피셔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로젠버그 앞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체면을 구기지 않겠노라 다짐한 레이디 피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틸다와 미뉴에트를 추고 나면 아마 대공 전하께서도 다시 한번 이 애와 손을 맞대기만을 기다리시게 될 거랍니다!”
“엄마, 제발요!”
“하하, 여기 계신 모든 숙녀분들이 제게는 오월의 장미처럼 아름다워 보입니다.”
차탈의 시선이 비슷한 높낮이의 정수리를 거쳐 레이디 웰링턴, 올가에게 닿았다. 그녀가 암구호처럼 아주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차탈은 말없이 턱에 힘을 주곤 올가가 곁눈질한 곳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요르문 켈튼이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자신이 오는 걸 알아차린 게 틀림없었다.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유분수지. 차탈은 이를 갈았다.
로렌시아호에 오른 후 내내 이 모양이다. 만나려고 했던 라크시스 옌은 파티가 시작되자마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파티 참석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레이디 켈튼은 유령이라도 됐는지 흔적조차 없었다.
거기다 요르문 켈튼은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계속 주변을 맴돌았다. 그런데 레이디 켈튼에 대한 단서라도 얻어볼라치면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 도망가버리니. 그리하여 차탈은 수백이 바글거리는 로렌시아호 한복판에서 제 인내심을 시험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죠? 제가 잠시 급한 일이 있어서.”
때마침 요르문의 동행자가 눈에 띈다. 발명가 메이슨 비렌체. 어리바리해 보이는 것이 요르문의 발목을 잡기에 딱 좋은 사냥감이었다.
차탈과 눈이 마주친 올가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침 블레어가의 남매가 이쪽으로 오고 있던 참이었다.
“춤 신청은 돌아와서 하겠습니다. 저쪽에 계신 로드 블레어와 레이디 블레어가 좋은 말벗이 되어주실 겁니다.”
“대공 전하!”
밀레이나의 애타는 외침을 뒤로 하고, 차탈이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그녀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요르문 켈튼 때문에 엉망이 된 분위기를 만회하려 했더니, 이젠 노든 대공마저 제게 망신을 준다.
“어머나, 미스터 블레어! 레이디 블레어!”
올가 웰링턴이 재빨리 나서서 블레어가의 남매를 붙들어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명예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쩜 여기서 다 뵙게 되네요! 제국의 총리와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동시에 만나 뵙게 되다니!”
올가의 호들갑에 이목이 쏠린다.
명문 블레어가. 정부의 주요 요직과 사교계를 꿰차며 명실공히 제국을 주름잡고 있는 후작가. 세페란테 황가보다 더 명맥이 긴 가문이란 소문이 있을 정도로 오랜 전통을 지닌 블레어가는 전통과 관습을 사랑하는 제국인들에게 있어 황제 못지않은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번 대의 블레어가 사람들은 특히나 주목을 받았다. 일명 블레어가의 남매들. 첫째 리암 블레어가 제국의 총리였고 막내 샤샤 블레어는 블레어 스트릿이라는 부티크 거리를 만들어낸 명망 높은 디자이너였다. 거기에 매일같이 추문을 몰고 다니는 방탕아, 둘째 막스 블레어까지.
길거리 꼬마들조차 블레어가를 알았다. 제국에서 이들 남매를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하. 이리 추켜세워 주시면 제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답니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웰링턴. 로드 웰링턴은 잘 지내고 계시죠?”
“오랜만이에요. 올가.”
리암과 샤샤가 자연스럽게 올가와 인사를 나눈다. 저 여잔 어떻게 블레어가와도 친분이 있는 걸까. 출신도 불분명한 여자가 웰링턴 백작 부인의 자리를 꿰찬 것도 모자라 거물급 인사들과 알은체를 한다. 귀부인들의 머릿속에 또다시 은근한 의심이 피어올랐지만, 뒤이은 올가의 행동에 금세 사그라들고 말았다.
“리암. 이쪽은 미스 피셔예요. 여긴 미스 로젠버그.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가씨들이랍니다.”
밀레이나보다 한발 앞서 분위기를 풀어낸 탓이다. 귀부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딸들을 앞다투어 들이밀었다.
리암은 가볍게 웃으며 올가의 귀에 조용히 소곤거렸다.
“올가. 보아하니 대공께선 내게 이 짐 덩어리들을 떠넘기신 것 같소만.”
“정확히 짚으셨네요.”
“재선 준비가 쉽지 않아. 대공께서 도움을 주시기로 하였는데 이리 소식이 없어서야, 원.”
샤샤가 저 대신 레이디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리암이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올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잠자코 기다리시면 분명 답을 주실 거랍니다. 대중의 신임을 얻는 데엔 대공 전하만 한 분이 또 없으시지요.”
쉽지 않은 여자다. 대공이 괜히 거두어들인 게 아니었어. 리암은 벌써 저만치 멀어진 차탈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보수당에 대한 여론의 지지율이 예전 같지 않아. 노동당 녀석들이 득세하고 있다고. 대공께선 약속하신 걸 잊진 않으셨겠지.”
그때였다.
“두 분이선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나게 나누고 계신가요?”
눈치 빠른 레이디 알란드라가 넌지시 물어왔다. 미스 로젠버그의 표정이 썩어 들어간 것을 보니, 딱 봐도 막스 블레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었다.
레이디 알란드라의 무도회에서 미스 로젠버그가 막스 블레어에게 레모네이드를 쏟아버린 일화는 유명했다.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에 나올 정도면 말을 다한 셈이다. 보아하니 샤샤 블레어가 제 오라비 막스를 흉본 미스 로젠버그에게 한 소리를 한 듯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하죠.”
올가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언제 밀담을 나누었냐는 듯 수줍은 표정을 지어냈다.
“어머, 조금은 부끄러운 이야기인 걸요.”
“레이디 웰링턴의 다이아몬드가 아름다워서요. 후에 약혼자가 생기면 어떤 선물을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나! 험악했던 분위기가 또 다시 풀어졌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밀레이나는 그제야 한시름을 놨다.
요르문 켈튼에게 퇴짜를 맞은 후로 노든 대공부터 막스 블레어까지 말썽이라 내내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는데, 리암과 올가가 나서준 덕에 적당히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저 둘이 모종의 관계를 이루고 있단 건 진작 눈치채고 있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로드리치가에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상관없었다. 다시금 콧대가 높아진 밀레이나가 부채를 펴서 팔랑팔랑, 몰래 식은땀을 식히고 있을 때였다.
“주인님!”
밀레이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루즈 부인이 뛰어오고 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칼이 풀어지고, 목 끝까지 잠가 올린 깃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다급한 모습이었다. 파티의 손님들과 부딪히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소란해진 무도회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밀레이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루즈 부인. 내가 경박한 사람을 싫어하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죄송합니다, 주인님. 하지만…….”
평소라면 절대 이러지 않을 루즈 부인이다. 밀레이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나긋이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대가 이리 바삐 왔는지 말이나 해보게.”
“다 제 불찰입니다, 주인님.”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가?”
벌써 주변의 시선이 모여들고 있었다. 루즈 부인은 안절부절못하다 밀레이나의 귓가에 조용히 죄를 털어놓았다.
“…헬렌이 사라졌습니다.”
“뭐?”
식은땀이 났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루즈 부인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