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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46)화 (146/292)
  • 146화 

    “레이디 로젠버그. 아까의 만찬을 빼놓으시면 안 되지요! 요리는 물론이고, 그렇게 깔끔하고 우아한 은식기는 처음이었어요.”

    귀부인들이 맞장구를 쳤다.

    “여러분이 이리 즐겨주시니 더할 나위 없이 영광이네요. 사실 로렌시아호에서 자선 무도회를 연다는 건 제게도 크나큰 모험이었지만.”

    밀레이나는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화답했다.

    그녀로서도 이번 자선 무도회는 그녀의 경력에 있어 한 획을 그을 대단한 사건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 혼자선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명망 있는 로드리치 가문의 재력으로도 로렌시아호는 빌리기 어려운 대단한 비행선이었다.

    “라크시스 옌 경이 기꺼이 후원해 주시어 이렇게 여러분들을 초대할 수 있었답니다.”

    라크시스 옌이라니. 귀부인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뮐러 다이아몬드의 희소성과는 비교도 안 될, 신기루 같은 남자가 언급되자 귀부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옌 경의 후원이라니! 역시 라크시스 옌도 레이디 로드리치의 명성을 알아보는군요.”

    레이디 로젠버그가 아부하듯 밀레이나에게 달라붙었다. 밀레이나는 대답 없이 미소 지었다.

    라크시스의 후원이라니. 후원 수준이 아니다. 사실 이번 파티는 라크시스가 주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밀레이나 자신은 이름만 빌려주었을 뿐, 빈민 구제원을 건립하겠다는 대외적인 명분부터 비행선에 들어오는 식자재까지 라크시스의 간섭이 안 들어온 곳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파티는 열어야 했다. 로렌시아호에서의 무도회라니.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그런 간섭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아, 로드 켈튼이에요!”

    “그 옆의 남자는 누구죠?”

    “왜, 있잖아요. 로드 켈튼이 끼고 다닌다는 켈튼 코퍼레이션의 수석 연구원이요!”

    레이디 로젠버그가 호들갑을 떨었다.

    “생각보다 멀쩡하게 생겼네.”

    “멀쩡하다 뿐이에요? 몇몇 아가씨들에겐 최고의 신랑감이 될 것 같은데요? 이를테면 미스 패트리샤 로젠버그라든가. 연구원이라면 컵을 들 힘도 없는 연약한 아가씨를 위해 발명품을 만들어줄지도 모르잖아요?”

    이때다 싶어 레이디 알란드라가 빈정거렸다. 아까 당한 모욕을 갚아주어 고소하다는 표정이다.

    제 딸에게 귀족도 아닌 발명가 따위가 어울린다고 하다니. 하지만 레이디 로젠버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딸이 알란드라 저택의 무도회에서 막스 블레어에게 레모네이드를 쏟아버린 탓이다.

    레이디 로젠버그의 미간이 대번에 구겨졌다.

    “…흥.”

    “그나저나 레이디 로드리치. 라크시스 옌은 어디 있나요? 무도회에 오긴 한 거 맞고요?”

    “난들 아나요. 그 잘난 양반이 어디 있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요. 비행선에서 뛰어내렸을지 어쨌을지.”

    그때, 레이디 피셔가 진귀한 광경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눈을 빛냈다.

    “저 남자는 누구죠?”

    귀부인들의 이목이 대번에 집중되었다. 연회장 구석에서도 어깨의 견장이 반짝거려 눈에 띈다. 견장보다도 눈에 띄는 건, 단정하게 빗어넘긴 금발 밑으로 드러난 금욕적인 인상의 얼굴이었다.

    레이디 로젠버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로드 발자크 로스. 브라이던힐 출신 장교라고 들었어요.”

    “처음 들어요. 로스가라니.”

    “다무스의 귀족 출신이라더군요. 클럽 로얄의 티켓을 받은 신사라지요.”

    클럽 로얄이란 말을 듣자마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선망과 존경의 시선이 밀레이나에게 향했다. 밀레이나는 미소로 화답했지만 한편으로 드는 의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저자에게 클럽 입장을 허락했던가.’

    클럽 로얄의 회원이 되려면 여러 가지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한다. 클럽의 위원회장 정도의 위치라면 응당 회원 하나하나에 대한 정보를 훤히 꿰뚫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유독 발자크 로스에 대한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무스의 귀족 출신이라든가, 브라이던 힐의 장교라든가. 마치 남의 입을 통해 처음 접한 소식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로드 로스에게선 다무스 억양의 구애를 받을 수 있는 건가요?”

    “그렇겠지요. 그만큼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청혼도 없겠어요!”

    벌써 딸 하나를 결혼시킨 연륜의 레이디 피셔가 갓 데뷔한 아가씨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얼마 전 로드리치 저택에서 열린 티 파티에서 말예요, 로드 로스가 다무스 억양으로 시를 낭송했는데 얼마나 고급지던지! 역시 고전과 홍차론 다무스를 따라올 지역이 없지요.”

    잠자코 듣고 있던 밀레이나가 물었다.

    “…제 티 파티에 저 남자가 왔었다고요?”

    “어머, 기억 안 나세요? 일주일 전 올해의 첫 티 파티에 레이디 로드리치께서 초대하셨잖아요. 레이디 웰링턴도 기억나시죠?”

    그 질문에 나이 어린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사교계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던 백작 부인, 올가 웰링턴. 정체불명의 후원자 덕에 무려 황궁 무도회에서 데뷔를 치르고, 저보다 스무 살은 많은 웰링턴 백작과 결혼하여 지금은 황제의 최측근 시녀로 살고 있는, 말 그대로 인생 역전의 표본인 여인이었다.

    “레이디 웰링턴은 어때요? 아무래도 바깥사람 되는 분과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이잖아요.”

    짓궂은 질문이었다.

    한때 올가가 돈과 신분을 위해 아버지뻘 되는 웰링턴 백작과 결혼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적이 있었다. 이십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청혼 반지 때문에 그 소문을 진실로 믿는 사람도 많았다.

    젊고 잘생긴 발자크를 가리킨 레이디 피셔가 기대한다는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올가는 수줍게 뺨을 붉히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전 제 아들이 저렇게 잘 자랐으면 좋겠어요. 만약 딸이 생긴다면 저런 신랑감을 만나게 해주고 싶고요. 아마 그이도 저와 같은 마음일 거예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공격 실패였다. 레이디 피셔는 당황했는지 멍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올가가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찰나 침묵이 감돌았다. 눈치를 보던 귀부인들 사이에서 한 박자 늦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어머나, 천생연분이 따로 없네. 로드 웰링턴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종달새 같은 부인이 이렇게 한결같이 기특한 생각을 하고 계시니 말이에요!”

    “그이를 닮은 아이가 생겼으면 좋겠는데, 마음처럼 잘 안 되네요. 언젠간 제 아이의 짝을 찾아줄 날이 오겠죠?”

    저건 진짜다. 순진하고 어린 부인은 진심으로 아이를 기대하고 있었다. 노리는 게 있어 웰링턴 백작과 결혼한 게 아니었던가?

    모여든 귀부인들은 순식간에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그럼요! 태어날 부인의 아이가 부럽네요. 어머니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분명 좋은 어머니가 될 거예요, 레이디 웰링턴.”

    분위기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이런 부인이니, 그 귀한 뮐러사의 다이아몬드로 청혼하셨겠지요! 맞아요, 레이디 웰링턴의 마음씨는 이 대단한 다이아몬드보다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네요!

    뮐러사의 지분을 가진 밀레이나가 흐뭇해했다. 훌륭한 아내이자 아름다운 어머니의 마음씨에 빗대어지는 자사의 다이아몬드란. 게다가 웰링턴 백작의 사회적 지위가 상당한 덕에 다이아몬드도 덩달아 추켜세워졌다.

    밀레이나는 귀부인들의 대화를 즐기다가, 문득 누군가를 발견하곤 눈썹을 밀어 올렸다.

    “이런, 주인공들이 납셨군.”

    “…세상에. 블레어가의 남매예요!”

    “둘밖에 없네요. 막스 블레어는 오늘도 밀회를 즐기러 간 모양이죠?”

    “샤샤 블레어를 여기서 보게 되다니! 제가 얼마 전에 블레어 스트릿에 다녀왔는데, 부티크 샤샤의 드레스는 여전히 몇 달이나 기다려야 맞출 수 있다더라고요.”

    “정말이지 평소 얼굴 한번 보기 힘든 분들이 다 모여계시네요.”

    “제 말이 그 말이라니까요. 어머, 저길 보세요!”

    신나게 떠들던 레이디 피셔가 무도회장을 가리키며 경탄했다.

    “대공 전하!”

    “대공 전하께서 진짜 오셨네요? 요즘 황제 폐하를 보필하느라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발자크에 대한 이야기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자타 공인 최고의 신랑감이요,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까지 인정한 남자의 등장 때문이었다.

    붉은 머리 황자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발자크와는 다른 의미로 존재감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알리나 황제가 조지 황자를 출산한 후로 그녀를 돕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더니, 곳곳의 무도회는 다 거절해도 레이디 로드리치의 파티만큼은 거절할 수 없었나 보다.

    예전보다 해쓱해진 모습이었으나, 레이디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면서 입을 모았다. 나이 어린 조카, 조지 황자에겐 둘도 없는 최고의 삼촌이 업무를 볼 땐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돌변한다나 뭐라나. 눈가에 짙게 자리한 그늘이 퇴폐적이라며, 시가를 물고 집무실에 앉아있는 대공은 얼마나 치명적일지 수군거렸다.

    “정말 물이 좋네요, 안 그런가요?”

    “그렇게 천박한 말을 쓰다니. 정말 격이 떨어져서, 원.”

    “왜들 그래요? 다들 속으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서.”

    레이디 피셔가 핀잔 조로 타박했다.

    이런 격 없는 수군거림조차 파티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일조한다. 역시 레이디 로드리치는 달라. 결국 이 한마디를 위해 라크시스 옌에게 수그리며 벌인 판 아니던가.

    밀레이나는 귀부인들의 대화를 흡족하게 감상하며 마침내 출격을 선언했다.

    “모두 따라와요. 내 파티에 왔는데 저런 사람들과 인사 정도는 나눠봐야지.”

    * * *

    ‘젠장, 대체 라크 녀석은 언제 오는 거야?’

    “로드 켈튼, 이쪽은 로젠버그가의 미스 패트리샤 로젠버그. 미스 로젠버그? 이쪽은 로드 켈튼.”

    밀레이나가 대답 없는 요르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치를 줬다. 요르문은 심드렁하게 귀 뒤를 긁었다. 미지근한 레모네이드만 벌써 다섯 잔째다. 언제 또 이렇게 몰려왔는지, 어려도 한참은 어린 아가씨들이 모친을 샤프롱으로 대동하곤 눈앞에 조르륵 서있었다.

    “이쪽은 미스 마틸다 피셔. 레이디 피셔의 귀여운 막둥이지.”

    “어머, 레이디 로드리치. 호호호, 우리 마틸다가 귀엽기는 하죠.”

    신사가 본인을 소개를 하기 전엔 숙녀가 나설 수 없는 법. 요르문이 어서 본인 소개를 하길 바라며 목을 뺀 아가씨들이 차례로 나긋이 인사를 한다.

    가까이서 실물로 마주한 요르문이 상상 이상으로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서른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마법사라 그런지 나이에 비해 노화가 더디게 찾아온 얼굴엔 소년미가 가득했다.

    그 옆의 메이슨인지 뭔지 하는 발명가도 마찬가지다. 그저 괴짜 발명가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의외로 훈훈했다. 켈튼 코퍼레이션의 수석 연구원으로서 쌓아둔 재력은 덤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르문은 불퉁하게 팔짱을 끼곤 꿈쩍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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