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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45)화 (145/292)
  • 145화 

    라크시스가 시아의 어깨 위에 얼굴을 가만히 올렸다. 물기 어린 숨소리가 어느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니까 안심해요. 자책하지도 말고, 그 예쁜 얼굴로 우는 것도 그만하고요.”

    라크시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 얼굴이, 마음에 드십니까?”

    “…본인 잘생긴 거 알면서 그런 소릴 하네. 라크 얼굴 싫어할 사람이 어딨겠어요. 지금 나보고 당신 얼굴까지 질투하라고 하는 건 아니죠?”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여전히 눈가는 빨개져 있으면서, 뭐가 그리 뿌듯한지 보조개를 옴폭 드러낸다.

    “어어, 기분 좋아졌나 보네. 것 봐, 라크도 본인 얼굴이 전생에 나라를 구한 수준인 건 알고 있으면서.”

    “…그래서, 제가 마음에 드십니까?”

    “오늘은 대답 안 해줄래요. 얄미워서.”

    시아는 피식 웃었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지친 기분이었다. 시아는 어깨를 두드리며 기지개를 켰다.

    “어쨌든 벌써 봉인을 두 개나 찾았네요. 물론 놓친 것도 있고 카얄이 가져간 것도 있지만요.”

    오토마톤의 심장은 카얄이 가져간 것이 확실했다. 다무스와 로렌시아호에서의 봉인은 그녀가 되찾았다. 시간 여행이 시작되기 전에 벌어졌던 마류 이상 현상에 대해선, 예전에 들었기론 라크와 요르문도 봉인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었다.

    “이제 세 개 남았어요. 다 찾는다면 우리가 정말로 종말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안 그래도 그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었는데.”

    라크시스는 시아의 시선을 돌리며 은근슬쩍 옆으로 다가왔다.

    “일단 봉인을 찾는 건 뒤로 미뤄둡시다.”

    “그렇지만 지금도 카얄은 남은 봉인을 찾아다니고 있을지 모르는걸요.”

    “걱정 말아요, 시아.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지 알게 되면 깜짝 놀랄 겁니다.”

    나만 초조한 건 아니지?

    오늘따라 유난히 여유로운 라크시스가 낯설다. 글레이셜 홀에서 카얄에게 당했던 기억 때문에, 시아에겐 못해도 카얄보다는 빨리 움직여야 된다는 강박이 있었다.

    라크시스 성격에 이를 갈았으면 단단히 갈았지 지금처럼 나보다 느긋할 리가 없을 텐데.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요.”

    “뭘 준비했길래…….”

    “어떤가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언제 고쳐 묶었는지, 멱살 잡혔던 크라바트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역시 라크시스였다. 뭔진 몰라도 하나부터 열까지 아주 계획적으로 일을 꾸며둔 모양이었다.

    그가 능글맞게 미소 지으며 모자를 까딱였다. 챙 밑으로 드러난 눈빛이 여간 여우 같은 게 아니다.

    이래야 라크답지. 시아는 피식 웃었다.

    “네네. 그럼 안내해 주시겠어요?”

    “레이디 켈튼, 그대를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라크시스가 우아하게 팔을 내밀었다. 시아가 그의 팔에 손을 얹으려는 때였다.

    “…시아.”

    갑자기 몸을 돌린 라크시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보이십니까.”

    그의 턱짓을 따라 움직인 시선 끝에는 무지갯빛 마력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발목 높이에서 찰랑이는 마력이 보일러실은 물론이요, 비행선 객실과 연회장으로 이어지는 문 너머 복도까지 점령하여 시야를 어지럽힌다.

    “…마류 이상 현상이네요.”

    처음보다 짙어진 무지갯빛이 정신을 혼몽하게 한다. 시아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봉인은 이미 찾았는데 어째서 마류 이상 현상이 나타난 건가. 그것도 점점 더 불안정한 마류를 만들어내면서.

    불현듯 떠오른 결론이 뇌리를 장악한다.

    눈이 마주친 시아와 라크시스는 침묵으로 서로의 생각을 긍정했다.

    답은 하나였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아마도요.”

    로렌시아호에 광룡의 봉인이 또 있다. 그것도 오토마톤의 심장처럼 곧 폭발할 위기의 봉인이.

    일기장엔 적혀있지 않은 사건이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같은 어마어마한 이상 마류를 만들어내고 있는 봉인은 카얄이 이미 손을 쓴 봉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말인즉 어쩌면 아주 가까운 곳에, 예를 들면 이 비행선 안에 카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과도 같았다.

    시아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심지를 굳혔다. 떨리던 눈동자가 멈추고, 또렷한 이채가 맺힌다.

    두 개의 봉인을 동시에 만나는 시간 여행이라니.

    이젠 일기장과 시간이 똑같이 흘러갈 것이라 예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걸까. 지금껏 시간 여행을 하며 바꿔온 무수한 사건들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모여들어, 오늘의 로렌시아호에 불어닥친 폭풍이 되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봉인을 마주하기 위해 라크시스는 로렌시아호로 대륙 횡단 비행선을 재현해 냈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은 수많은 우연이 모여 만들어낸 거대한 흐름, 즉 운명 앞에서 한없이 나약했다.

    그러나 강물을 거슬러 토사를 쌓고 댐을 쌓아 종국에는 물줄기의 방향까지 바꿔내는 것이 바로 그 나약한 인간 아니던가. 애초에 예정된 종말을 막을 각오로 시간 여행을 해왔다. 난데없는 급류를 맞닥뜨렸을 때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헤엄을 치든 뗏목을 붙잡아 타든 뭐라도 해야 살아남지 않겠는가.

    봉인이 파괴되기 전에 찾아야 했다. 라크시스가 아무리 봉인의 폭발에 대비했다고 해도, 그가 대비한 폭발은 우리가 보일러실에 나타나리라 예상했던 봉인이 터지는 일이었을 테니까.

    추락과 즉사. 아주 사소한 원인으로도 비행선 사고는 벌어질 수 있었고, 그 결말은 언제나 참혹했다. 부상을 입고 살아남느니 하는 일은 비행선 사고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로렌시아호가 일기장 속 대륙 횡단 비행선처럼 추락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 이 거대한 비행선에 타고 있는 사람은 못해도 수백일 테니까.

    왠지 이번 봉인은 유난히 무지갯빛 마력이 짙다 싶더라니.

    “가죠. 라크.”

    “좋습니다. 시아.”

    고개가 마주 끄덕인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나갔다.

    * * *

    같은 시각.

    “아무래도 푸른 대양이 없으니 평소보다 허전해 보이시긴 하네요. 레이디 알란드라.”

    “그러게 괴도 흑장미의 편지를 받았을 때 목걸이부터 숨기셨어야죠.”

    귀부인들이 말끝을 돌리며 은근하게 조롱한다. 레이디 알란드라는 부채를 좍 펴들곤 콧방귀를 꼈다. 얼마 전 열었던 무도회에서 가문의 보물인 사파이어 목걸이를 도난당한 게 벌써 소문이 퍼졌다.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인지 뭔지. 하여간 그 여자가 쓴 가십지에 길거리 꼬마까지 괴도 흑장미가 알란드라 저택을 털었다는 걸 알게 됐다.

    덕분에 레이디 알란드라의 자존심은 바닥을 치는 중이었다.

    “…흥.”

    귀부인 하나가 구석에 조용히 있던 나이 어린 부인의 손가락을 보고 감탄했다.

    “와아, 레이디 웰링턴. 그 반지가 바로 뮐러사의 그 다이아몬드인가요?”

    “네에. 청혼 선물로 받았답니다.”

    “이십 캐럿이라니, 역시 다이아몬드가 남다르니 광채마저 남다르네요.”

    수줍게 들어 올린 레이디 웰링턴의 손가락엔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거대한 다이아몬드가 찬란한 빛을 뿜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뮐러사의 이십 캐럿짜리 다이아몬드라니. 이런 청혼을 받고 승낙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을까요!”

    제국 여인의 로망이라는 뮐러사의 상앗빛 박스. 프러포즈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냐는 물음에 여인 백이면 백 뮐러사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고 싶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모여든 귀부인들이 레이디 로드리치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있던 파티 주최자의 귀가 쫑긋거리고 있었다.

    십여 년 전 뮐러 다이아몬드의 주인인 프레디 뮐러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이후, 뮐러사의 최대 주주였던 밀레이나 로드리치가 회사의 경영 일선에 직접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뮐러사의 상앗빛 박스가 유명해진 것도 밀레이나가 경영에 동참한 이후였다. 사람들은 밀레이나 돔의 주인이자 예술감독인 그녀의 남다른 감각이 회사를 지금처럼 키웠다고 입을 모았다.

    “다이아몬드만 귀한가요. 레이디 로드리치의 초대를 받아 여러분과 함께 하는 시간도 충분히 귀하지요.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수만 피트 위에서 무도회를 즐기겠어요.”

    “어쩜 레이디 웰링턴은 말씀도 그리 예쁘게 하셔요.”

    호들갑을 떠는 레이디 로젠버그에게 레이디 피셔가 맞장구를 쳤다.

    “부인 말씀이 맞아요. 우린 지금 무도회에 와 있잖아요? 다이아몬드처럼 귀한 딸들이 과연 어떤 남자에게 청혼받게 될지 지켜봅시다.”

    레이디 피셔의 말에 귀부인들은 금세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고풍스러운 난간으로 둘러싸인 연회장의 이 층 난간에선 드넓은 홀이 한눈에 보였다. 그들은 무르익은 무도회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데뷔를 치르든 이미 데뷔를 마쳤든 상관없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신사에게 손을 내미는 딸들이 여간 흐뭇한 게 아니었다.

    우아한 오케스트라와 황홀한 실내 장식. 풍부하게 준비된 다과와 잘 훈련된 정복 차림 하인들. 뜨거운 물과 우유로 광을 낸 마룻바닥 위로 샹들리에의 빛이 다이아몬드처럼 알알이 부서진다.

    최신 유행의 드레스를 갖춰 입은 레이디가 신사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원을 돈다. 멀어졌다, 모였다. 우아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공작새의 꼬리처럼 늘어진 드레스 자락을 밟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신사들과 댄스 카드를 누구의 이름으로 채울지 고민하는 레이디들의 엇갈린 심정이 구름처럼 무도회장을 떠돈다.

    얼핏 보면 대저택에서 열리는 무도회처럼 보일 풍경이다. 끝 모를 높은 천정에, 이토록 거대한 홀이라니. 그러나 이곳은 수만 피트 상공의 비행선 안이었다.

    로렌시아호.

    켈튼 코퍼레이션에서 개발한 호화 유람 비행선. 유람 비행선이라는 말에 걸맞게 초대형으로 건조된 비행선엔 여타 유람선 수준의, 아니 그 이상의 시설들이 가득하여 돈깨나 있다는 상류층의 마음을 안달 나게 했다.

    무도회를 위한 홀만 기본 세 개요, 최대 오백 명의 손님까지 수용 가능한 객실과 그 인원의 절반은 한 번에 입장할 수 있는 만찬장이 중앙에 떡하니 존재한다.

    어디 그뿐이랴. 승마장, 크리켓 경기장에 블레어 스트릿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거대한 호화 상가는 물론이요, 신사들을 위한 클럽과 사격장, 도박장, 심지어 수영장에 뱃놀이를 할 수 있는 인공 호수까지.

    제국의 수도를 그대로 옮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낙 초대형인지라 로렌시아호는 하늘에 띄우는 데만 해도 천문학적인 액수가 들었다.

    그런 로렌시아호를 통째로 빌려 자선 무도회까지 개최하다니. 그리하여 레이디 로드리치의 명성은 현 제국 사교계에서 황제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드높아져 있었다.

    레이디 로젠버그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감탄했다.

    “역시 밀레이나 돔의 예술감독이세요! 레이디 로드리치의 무도회는 달라도 뭐가 다르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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