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마류 이상 현상을 쫓다 시간 여행자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난생처음으로 연심이라는 것도 느껴보았다. 시인이 왜 사랑을 노래하는지, 젊은이들이 왜 실연을 이기지 못해 죽어버리는지 알 것 같았다.
시아 켈튼을 향한 마음이 커질수록 과거의 아픔은 무뎌져 갔다. 괴로웠던 기억, 공허한 기분이 썰물처럼 쓸려나가고 대신 그 자리에 태양처럼 타오르는 시아 켈튼이 제 심장을 뜨겁게 달구며 들어왔다. 시아 켈튼으로 인해 라크시스는 다시 한번 삶을 살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초상화 속 여인도 한때의 추억처럼 가슴속에 영원히 묻히는 듯했다.
쓰러진 시아에게서 은발 한 가닥을 발견하기 전까진.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아니. 사실은 너무나도 먼 거리에 있었지.’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그녀의 일기장에 적힌 대로라면 라크시스와 시아는 원래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사이였다. 종말을 막고 죽은 마법사와 그로부터 반세기 후에나 태어난 여자. 종말을 막지 않았더라면 라크시스는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만, 시아가 사는 시대는 무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 두 사람을 이어준 건, 바로 시간 여행이었다.
‘…시아. 당신이 날 찾아주었어. 나는 그저 제자리에 머물고 있었는데.’
복받친 뜨거움이 볼을 타고 흐른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품에 안았다.
‘이젠 놓치지 않아. 당신을 절대 놓지 않을 거야.’
그때, 지하 미궁의 벽에 시커먼 금이 자라났다. 천장이며 바닥 할 것 없이 쩌억 소리를 내며 내달린 금에서 부서진 돌가루가 후두둑 떨어졌다.
보관되었던 봉인이 사라졌다. 아마 소임을 다한 지하 미궁이 무너지려는 것일 터다. 동시에 눈앞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시간 여행의 시작이었다.
라크시스는 재빨리 시아를 안아 들었다.
잔해에 깔리기 전에 일단 안전한 바깥으로 순간이동을 해두는 게 나을 것 같다. 마법을 쓰려는 찰나 아스타가 시아에게 입혔던 두꺼운 망토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번득이는 생각이 스쳤다. 라크시스는 망토에서 단추를 뜯어냈다.
슈테른베슈테크의 사자 문장이 선명하게 음각된 금단추였다. 라크시스는 곧바로 그것을 어디론가 보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단추가 허공에서 없어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라크시스는 그것이 정확히 어디에 도착할지 알았다.
제국에 있을 중세의 라크시스 옌이었다.
마력 신호 일련번호. 마도구는커녕 마법사 자체가 귀한 중세에선 하늘에서 뚝 떨어져내린 편지를 악령의 짓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마도 시대에선 개인의 고유 마력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마력 신호를 우편국에 등록한 대상에 한해 대상의 마력을 추적하여 실시간으로 편지며 소포를 보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메커니즘을 흉내 내는 건 라크시스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도 중세엔 이런 기술이 가능할 거라 상상도 못했었지.’
단추를 받은 이 시대의 라크시스 역시 아마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그래도 나라면 아마.’
단추를 쫓아 이곳에 오겠지. 그러곤 아스타에게 단추의 정체를 캐물을 것이다. 그와 시아가 마도 시대에서 백삼십 년을 건너 중세로 온 것을 아는 사람은 아스타가 유일하니, 아마도 그녀를 통해 시간 여행의 전말을 알게 될 터다.
다 무너진 신전 위에 도착할 즈음이 되자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에 갇힌 것처럼 눈앞이 온통 하얬다. 머지않아 의식을 잃겠지. 깨어나면 우린 다시 시간을 뛰어넘어 마도 시대에 있을 것이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꼭 그러안았다. 가물거리는 시야 가운데, 폐허 위에서 빛나고 있는 가느다란 은발이 보였다.
과거의 내가 이 은발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와의 시작이 달라질지도.’
이윽고 라크시스는 정신을 잃었다. 시아에게 생긴 시간 여행의 공백을 대신 간직한 채였다.
【 두 개의 봉인 】
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제가, 봉인을 처리했다고요?”
“예, 그래서 묻는 겁니다. 지하 미궁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봉인을 풀고 광룡의 힘을 소멸시킬 수 있었는지.”
시아가 기절한 이후의 시간은 그가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가 시아를 찾아내기 전까지의 시간은 오직 시아만이 알고 있었다.
“…봉인을 풀고 광룡의 힘을 소멸시켰다뇨.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제가 했다고요?”
“광룡의 부활을 저지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긴 했습니다. 다만 당신이 그걸 어떻게 한 건진 저로서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그녀가 봉인을 풀었던 방법. 거기에 비밀이 숨어있을 것이다. 내내 검붉었던 머리카락이 은발이 되고, 가공할 만한 마력이 몸에 담긴 이유.
어쩌면 라크시스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의 어린 시절과 초상화 속 은발 여인의 정체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몰랐다.
시간 여행자 시아 켈튼의 진짜 정체까지도.
라크시스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딱히 한 건 없는데. 진짜로요. 지금 라크 손에 들려있는 마정석이나, 오토마톤의 심장처럼 구체적인 형태의 봉인은 보지도 못했고요.”
그러나 시아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녀가 무심코 라크시스의 손에 들린 봉인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해봤자 그냥 이렇게 어둠을 들고 천칭에 올린 게 전부…….”
굉음에 먹힌 말끝이 형태를 채 갖추지 못하고 사라진다.
“시아―!”
섬광이 일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막지 않았다면 실명할 뻔했다. 강렬한 빛에 깨져버린 계기판이 비명을 지르며 경고음을 울렸다.
폭발이었다. 정확히는 순간적으로 과열된 마력이 팽창하여 일어난 충격파였다. 봉인이 폭발한 게 틀림없었다.
폭발의 여파는 라크시스조차 한참을 밀려나게 했다. 그 말인즉, 중심부에 있던 시아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단 뜻과도 같았다.
그녀가 잘못됐으면 어쩌지. 애초에 마류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던 봉인이었다. 오토마톤의 심장처럼 터질 수도 있단 걸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머저리 같은 놈. 끝없는 자책감이 목구멍을 조여온다. 바보 같으니. 위험한 걸 그녀 곁에서 그렇게 무방비하게 드러내놓고 있었다니.
‘시아를 안전한 곳에 두었어야 했어. 봉인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는데.’
그녀의 연약한 몸이 광포한 충격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라크시스는 떨리는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서있던 자리는 여전히 눈이 시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 고여있었다. 빛이 빠른 속도로 사그라들었다.
“시아, 시아…….”
마침내 육안으로 앞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주위가 어두워지고, 시아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심각하게 다쳤을 터다. 어쩌면 치유술로도 치료할 수 없을지 모른다. 짧은 시간에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한 라크시스는 온몸에 마력을 두르고 잠시 후 목격할 끔찍한 광경에 이를 사리물었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더는 나아갈 수 없었다. 정확히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압도당해 몸이 멋대로 굳어버린 것이다. 그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도의 현신.
마력이 충만한 긴 은발이 중력을 거부하고 너울 친다. 빛의 잔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작은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시아의 몸을 배회하는 두 번째 마력이 보인다. 첫 번째는 지하 미궁에서 그녀의 몸에 흡수되었던 마력이었다. 본능적인 경외심에 온몸이 전율한다. 생물이 압도적인 존재를 맞닥뜨렸을 때나 느낄 만한 것이었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이성을 마비시킨다. 시아가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었고, 이제야 자각한 마음의 상대를 허무하게 떠나보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다행이라는 말만으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기저에서 속을 울렁이게 한다. 창조주를 영접한 피조물이 그저 경배하며 감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무치던 그리움이 마침내 상대를 만나 서럽고도 기쁜 마음으로 해소된 것 같기도 했다.
은발이 서서히 낙하하며 검붉은빛으로 돌아왔다. 라크시스가 알던 시아 켈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몸에서 맴도는 어마어마한 마력은 그대로였다.
‘…똑같았어. 그림 속 여인과.’
이제 시아는 라크시스 정도는 가볍게 이기고도 남을 만큼의 마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직감했다. 그녀는 어쩌면 사도 그 이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뒤늦게 라크시스를 발견한 시아가 멋쩍게 웃었다.
“…하하, 그때도 이랬던 것 같네요.”
다행히 이번엔 기절하지 않았고요. 그런데 봉인이 이렇게 변해버렸는데, 괜찮은 거겠죠?
그녀의 손엔 지하 미궁에서 발견했던 것처럼 투명한 껍데기만 남은 봉인이 있었다. 민망해서 혼자 재잘거리던 시아는 곧 라크시스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잠깐, 지금 울어요?”
그가 울고 있었다. 천하의 라크시스가,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왜요,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왜…….”
라크시스는 떨리는 입술을 겨우 떼어내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지금 그거 때문에 그래요? 저 멀쩡해요. 진짜로! 아니, 내가 살다 살다 라크시스 옌이 우는 걸 다 보네요?”
시아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시아는 정말로 건강해 보였다.
“이것 봐요. 생채기 하나 없잖아요. 그보다 라크는 괜찮고요? 머리가 다 흐트러졌는데.”
“전 당신이 잘못 됐을까 봐, 이대로 잃게 되는 건 아닐까, 제가 다쳤어야 했는데…….”
남자는 석순처럼 우두커니 서서 울고 있었다. 그의 등이 왜인지 잘게 떨리고 있다. 복받친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모양인데,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했는지 이젠 서러워 보이기까지 할 지경이다.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공감해 줄 순 없어도, 그의 떨림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르카나에서 테러가 벌어지고 로건이 절 감싸다 사경을 헤매게 되었을 때, 테러도 다친 로건도 모두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했을 때.
‘나도 저렇게 울었던 것 같아.’
날 위로해 주던 라크시스의 덤덤한 목소리를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말. 그 한마디에 응어리진 속을 토해내곤 얼마나 울었던가.
진주 같은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 추락한다. 우수에 잠긴 남자를 명화로 감상하는 느낌이다. 상심한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정말이지 예뻤다.
‘이게 사람이야, 조각이야.’
“라크.”
시아는 라크시스를 끌어안았다.
“제 심장이 뛰는 소리 들리죠? 저 무사해요. 라크가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어요.”
가슴과 가슴이 맞닿아 공명한다. 그가 움찔거리더니 뻣뻣하게 굳었다. 에스코트니 왈츠니 덥석덥석 내 손을 잡던 건 언제고, 라크시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포옹을 받아본 어린아이처럼 굳어선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키가 크긴 크네. 나름 작은 키가 아니라고 자부하는데도 이 남자를 보듬어주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