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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43)화 (143/292)
  • 143화 

    ‘윽.’

    이상 마류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가까이서 마주한 불안정한 봉인의 존재감이란 실로 대단했다. 샤샤리아에 취하면 이렇게 몽롱해지려나.

    그런데도 난 라크시스가 봉인을 찾은 걸 몰랐단 말이지.

    라크시스는 이제 장난기가 가득한 눈으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누굴 생각했길래 봉인이 바로 옆에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그게 라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어쨌든 ‘사람’을 생각했단 건 맞는가 보군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그건 맞긴 한데. 내가 나에 대해 생각한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서운하군요. 누군 밤새 찬 바람 맞으면서 하늘에서 추락하는 사람을 맞이하러 갔는데.”

    라크시스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서러운 얼굴을 했다.

    “봉인이 뜨겁다 못해 살을 태울 것만 같군요. 당신이 이걸 맨손으로 집었더라면 틀림없이 심한 화상을 입었을 겁니다.”

    시아는 당황해서 입을 벙긋거렸다.

    “미안해요. 다 미안하긴 한데……. 내가 누굴 생각했는지 알면 서운하단 소리는 못할걸요.”

    그 말에 라크시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하, 그렇습니까.”

    맹렬히 돌아가던 머리가 답을 찾았다. 라크시스 자신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가 질투하지 못할 유일한 사람. 맥락을 이해한 라크시스의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요망한 여우 같으니. 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라크시스는 언제나 저렇게 여유로운데, 자신은 왜 저 남자만큼 여유로울 수 없는 걸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위로가 되는군요.”

    “그게 왜 위로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툴툴거리며 대꾸했는데도 라크시스는 즐거워 보였다. 정말로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고대 마법사라고 불리는 남자니 어쩌면 상대의 생각을 읽는 것쯤은 눈감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말이다. 라크시스는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해도 상대의 허락 없이는 그러지 않을 성격이었다. 그는 그저 눈치가 빠른 것뿐이다. 다만 지나치게 빠르다는 게 문제였을 뿐.

    시아는 화제를 돌렸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해야 되죠?”

    시간이 지나 식어버린 봉인은 이제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박동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라크시스는 무심하게 물으며 시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어딘가 묘한 기색이었다. 시아를 탐색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녀에게서 베일에 감춰진 진실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중세의 다무스에서 봉인을 발견했던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그게.”

    붉은 심장과 현자의 별을 가지고 지하 미궁으로 향했던 날. 지금까지 겪어왔던 모든 시간 여행을 통틀어 유일하게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경험이었다.

    “라크, 제가 사도를 만났단 이야긴 했었죠. 인간의 상식으론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왕좌가 있었고, 사도 다무스가 내게 이상한 말들을 남기고 죽었다는 거요.”

    아직도 모든 것이 꿈속에서 겪었던 허상 같기만 하다. 지하 미궁과 이어진 우주. 거대한 신전과 수많은 왕좌. 패잔병처럼 죽어가던 사도와 낯선 세계에서 느낀 아득한 향수.

    [마침내 만났군요.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요.]

    [어서 가져가세요. 이 어둠을 천칭에 올리고 당신의 힘을 되찾으십시오.]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우리들의 마지막 형제를 구해주십시오.]

    그날을 회상하면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다. 한낱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이 거대한 해일처럼 나를 집어삼켰고,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나로서는 천칭이니 별의 죽음이니 어둠이니 하는 것들을 호두만 한 뇌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신을 잃었다 막 깨어났을 때에도 기억이 온전치 못했던 것일 터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또 다른 나, 갈리프가 짊어졌어야 하는 일들이었다.

    만일 수국관 4025호에서 갈리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아직까지도 그날의 일들을 맥락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그때 제게 봉인을 찾았던 것 같다고 말하려 했었죠.”

    “죽어가던 사도가 제게 준 어둠이 이 속에 들어있던 것과 비슷했어요.”

    시아는 꿈틀거리는 봉인을 가리켰다.

    “깨어나 보니 봉인은 온데간데없었지만요. 애초에 이런 형태의 봉인을 찾은 기억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중엔 제가 봉인을 제대로 찾았는지도 확신하기 힘들었고요.”

    “…그렇습니까.”

    라크시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시아의 대답에 실망한 것 같았다. 시아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라크는 제가 거대한 조각상에 먹혀서 놀랐겠네요.”

    “그땐 당신을 잃은 줄 알고 잠시 비이성적으로 행동했었죠.”

    “아스타의 손녀분, 레오나였나? 그분이 다무스의 고대 신전 유적이 완전히 사라진 건 라크 때문이라고 했었는데.”

    시아를 찾는다고 그녀를 삼킨 조각상을 마구잡이로 공격하다가 그나마 남아있던 신전 기둥이 죄다 부서져 버렸던 탓이었다.

    “…할 말이 없군요.”

    “아하하, 그럴까 봐 제가 무사하다는 뜻으로 신호기를 눌러뒀는데. 라크 안심하라고요.”

    “신호기는… 못 봤습니다. 대신 금방 미궁에 뒤따라 들어가긴 했습니다만. 제가 도착했을 때 당신은 이미 봉인을 처리하고 기절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라크시스는 침묵했다.

    무저갱에 빠져 지하 미궁으로 끝없이 추락한 직후, 라크시스는 시아를 찾아 복잡한 미로를 헤맸다. 다행히 그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아!’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방대한 마력 때문이었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발견하자마자 직감했다.

    봉인이 그녀 앞에 나타났구나.

    무슨 고생을 했는지 시아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고열에 시달리며 괴롭게 신음했다.

    그녀를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지쳐서 감긴 눈가엔 눈물이 맺혀있었다. 라크시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재빨리 그녀의 목을 조인 단추를 풀어냈다. 뜨거운 목덜미에 손을 제 마력을 주입해 치유술을 시작했다.

    아니, 하려고 했었다.

    ‘이건 대체…….’

    그의 마력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분명 시아는 마법사가 아니었는데. 막대한, 어쩌면 고대 마법사인 자신과 맞먹을지도 모르는 청량하고도 아득한 마력이 그녀의 몸을 가득 채우고, 마치 주인을 지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라크시스의 마력을 거부하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이를 악다물었다.

    시아가 괴로워하는데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법사가 아닌 그릇에 담긴 마력이 정착할 자리를 찾으려 혈관을 타고 그녀의 몸을 헤집은 탓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시아에게 마력이 들어찬 것일까.

    라크시스는 코트를 벗어 바닥에 깔고 제 무릎에 시아를 뉘었다. 그녀의 숨이 고른 소리를 낼 때까지 땀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뒤늦게 봉인이 생각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발치에 속이 텅 빈 물체가 있었다. 손만 대도 바스라질 것 같은, 아주 얇은 유리로 세공된 둥그스름한 물체의 근처에 무지갯빛 마력이 발자국처럼 점점이 튀어있었다.

    광룡의 힘도, 마류 이상 현상도 완전히 사라진 봉인이었다. 이젠 봉인의 마법조차 소멸되어 한때 사악한 어둠을 담았던 흔적만이 남은 그릇이었다.

    그의 시선이 닿기가 무섭게, 껍데기만 남은 봉인이 파삭 부서진다. 부서진 잔해는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라크시스는 곤히 잠든 시아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정말이지.’

    그녀의 존재가 새삼 낯설게 느껴진다. 마도 시대에 찾아오는 시아 켈튼에게 익숙해져서 잊고 있었던 사실. 본래 시간은 거스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든 물리법칙을 무용으로 만들고 칠십 년의 세월을 건너다니는 시간 여행자는 그 자체로 상식 밖의 존재였다.

    그런 존재라면 마법사가 아닌데도 저만한 마력을 품는다든가, 봉인 속 광룡의 힘을 소멸시킨다든가 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라크시스는 땀에 젖은 시아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행여 불편할까 얼굴에 달라붙은 가닥을 떼어내곤,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의 손가락에 은발이 한 가닥 걸려 나왔다.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설마.’

    길었다. 물레에서 뽑아낸 실처럼 긴 은발이다. 자신의 것이야 기껏해야 손가락보다 긴 길이일 테니, 이 은발의 주인은 따로 있을 터다.

    ‘아냐, 아닐 거다.’

    라크시스는 당면한 진실을 부정했다. 부정하고자 부정한 것이 아니라, 믿기지 않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곳은 시아와 자신 둘밖에 없는 지하 미궁이었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그녀뿐이다.

    그러나 손에 걸린 것은 시아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다 걸려 나온 은발이었다. 바닥에 늘어진 그녀의 검붉은 머리칼이 은빛을 반사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 만다.

    직면한 일련의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시아. 설마 당신이 정말로…….’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한 심장이 전신을 뒤흔드는 것처럼 요동친다. 은발. 흐릿한 기억 저편의 여인. 형체 없는 그리움.

    은발이라니. 그가 아는 은발은 둘밖에 없었다. 하나는 고대 마법사인 자신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저택에 고이 걸어둔, 매일 밤 꿈에 나타나 눈물로 밤을 지새게 하던, 이름조차 모르는 여인.

    ‘라크. 오늘도 다쳐서 온 거니?’

    눈물이 투둑 떨어진다.

    그제야 그녀와 초상화 속 여인이 상당히 닮아있다는 것을 깨닫고야 만다. 왜 몰랐을까.

    언젠가 초상화 속 여인이 왜 하필이면 은발로 꿈에 나타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은발은 사도의 상징이었고, 어릴 적 기억이 없는 라크시스로서는 그녀를 그저 기억이 사라진 시절에 어울렸었던 사도가 아니었을까 하고 막연하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자신이 정말로 신의 사도인지 아니면 그저 남들보다 마력이 많아 사도 취급을 받는 마법사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시기가 됐을 때. 이젠 초상화 속 은발 여인을 그리워하는 건지 그저 공허한 기분을 견디지 못하는 건지 분간할 수 없는 기분 속에서 샤샤리아에 빠져 살았을 때.

    요르문의 아버지이자 오랜 벗 루이스 켈튼이 내게 말했다.

    ‘자네와 같은 수준의 마법사라면 분명 살아있을 거야. 그토록 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했으니 그녀도 때가 되면 자네 앞에 나타나겠지. 아마 자네라면 그녀가 어떤 모습이든 못 알아보는 일은 없을걸?’

    그러니 폐인처럼 사는 건 그만두게. 루이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서는 순간, 초상화는 잠시 덮어두기로 했다.

    때가 되면. 이 두 마디에 다시금 삶을 이어나가야겠다는 의지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 라크시스는 처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마도구를 개발하고, 제국을 여행하고. 요르문의 대부가 되고, 성장한 대자의 친구가 되기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을 세상을 탐구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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