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아.”
멍하니 빛 자국을 보다가 발을 헛디뎠다. 날카로운 굽으로 하마터면 라크시스의 발등을 밟을 뻔했다. 그의 발등은 다행히도 무사했으나, 엉켜버린 스텝에 무게중심이 기우뚱 넘어간다.
넘어진다! 그 순간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던 것 같다. 넘어지려는 몸뚱이가 본능적으로 잡을 것을 찾았다. 아까보다 한층 굵직한 것이 손에 잡혔다. 반대 손으론 잘 짜인 직물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것이 그의 허리와 크라바트였다는 것을 깨달은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가장 먼저 보였던 건 종이 한 장이 들어갈까 말까 할 정도로 아주 좁은 틈 하나만을 사이에 둔 라크시스의 놀란 눈동자였다.
“미, 안해요!”
이윽고 눈이 녹듯 그가 사르르 미소 지었다. 여전히 시아에게 멱살이 잡힌 채였다.
“누군가에게 멱살이 잡힌 건 처음인데.”
그의 입술이 움직임에 따라, 콧날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평소보다 낮아진 목소리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얼음 바다 같던 새파란 눈동자가 용암을 품은 것처럼 묘한 열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위험해.
마도 시대 신사의 표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남자다. 구애를 허락받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다가올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위험한 기분이 들까.
뺨을 스치는 바람이 간질거려서. 환상적인 마법을 보고 감상에 젖어서. 재킷 너머로 결 좋은 근육이 박동하는 것을 느껴서. 라크시스가 타는 듯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어서.
아니, 다 아니다.
혈색 좋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어서.
내가 그 입술에 다가갈 것만 같아서.
“…라크. 이건 너무 가까운…….”
“먼저, 다가온 건 당신입니다만.”
천천히 물러나는 라크시스가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허전함이 달라붙었다. 허리를 받치던 팔도,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던 박동도 사라진다. 시아는 그제야 춤을 추는 내내 그와 몸을 바짝 맞대고, 열기를 공유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라크시스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을까.
아찔하게 달아오른 머리가 뜨거웠다.
문득 눈이 마주쳤다. 자신과 춤을 추고, 얼굴을 맞댄 것까지 마치 모두 계획된 일이었다는 것처럼 교차된 시선 속엔 여유로움이 배어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연기라는 건 오직 라크시스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다만 라크시스는 새까만 밤에 상기된 마음을 묻어 덮어두었을 따름이었다.
“…왜 왈츠가 폐결핵과 죽음의 동맹자라 불렸는지 알 것 같아요.”
시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한땐 왜 왈츠를 음란한 춤이라 했던 옛날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라크시스가 작게 웃었다.
“도덕성과 건강을 해치는 사회악이라고도 불렸죠. 그렇게 말하던 사람들도 왈츠를 추고 싶어 안달이 나있긴 했지만요.”
“잘 추던데요.”
“제가 못하는 게 있을 리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황당함이 앞섰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시스는 그녀가 아는 사람 중에 완벽이란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시아, 저길 좀 보시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엔 로렌시아호가 있었다. 수많은 연료통 중에서도 선체 후미부, 한창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보일러실 근처였다. 그 곳에서 시작된 무지갯빛 마력이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로렌시아호를 점점 감싸고 있었다.
“…마류 이상 현상이네요.”
“드디어 시작인 모양입니다.”
라크시스에게서 묘한 고양감이 느껴졌다. 봉인을 찾기 위해 배를 만들고 파티를 열고, 모든 것을 일기장에 나온 그대로 재현한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봉인을 제때 찾으려 애를 쓴 건 라크시스였다. 난 단지 불안정해진 봉인 근처로 시간을 건너온 게 전부인데, 그는 이런 환경을 만들기까지 못해도 수개월, 아니 최소 연 단위의 시간을 들여 결과를 기다렸을 테니까.
만약 내가 오늘 수만 피트 위에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라크시스의 이런 노력도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크시스는 내가 여기에 나타날 걸 알고 있었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날 맞이하기 위해 시간과 좌표, 바람과 중력을 계산하며 기다렸으니까.
다시 한번 그의 치밀한 계산과 완벽한 계획에 놀라는 순간이었다.
“가실까요, 레이디.”
라크시스가 오랜만에 실크햇을 꺼내 들어 시아의 머리에 얹었다. 그의 공간이동 마법을 경험했던 게 대체 얼마 만이더라.
추억에 젖는 기분이었다. 그와 함께 한 시간이 벌써 추억할 정도로 오래되었나.
시아는 기꺼이 라크시스의 팔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 * *
“아, 저기인가 봐요.”
더워 죽겠네. 시아는 헉헉거리며 라크시스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일기장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온통 붉고, 보이는 거라곤 거대한 연료 보관소와 그에 이어진 수많은 파이프, 부그르르 끓고 있는 물과 끊임없이 운동하는 피스톤이 전부다.
기계는 이렇게나 거대하면서 그 사이에 연결된 다리는 어찌나 작고 불안한지. 얇은 철판으로 거미줄처럼 이어진 다리가 꼭 공사를 하다 만 건물의 가교 같았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비행선을 띄우는 증기기관이 위치한 보일러실이었다. 사방에 달린 계기판의 바늘이 정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아슬아슬하게 파들거리고 있었다.
이런 곳이니 일기장의 시아 켈튼이 철판 위 스테이크가 된 것 같다고 적었지.
“생각보다 심한데요.”
보일러실에 들어오자마자 하얗게 빛나며 왱왱거리기 시작한 마류 탐지기가 결국 과부하로 고장이 났다. 오토마톤의 심장을 발견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연료와 함께 있어서 불안정화가 가속된 모양입니다. 저도 이렇게 빠르게 파괴가 진행되는 건 처음 봅니다만.”
라크시스가 연료통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연료통에 이어진 파이프 관 끝엔 물을 끓이는 거대한 불길이 있었다. 아마 일기장 속의 비행선 폭발 사고는 마정석으로 오인되어 연료통에 잘못 들어간 봉인이 과열되어 파괴된 탓에 일어난 일이리라.
연료통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골라낼 수 있으면 좀 좋을까. 시아는 이번 시간 여행도 평탄하지 않음을 직감하고 한숨을 쉬었다.
“봉인이라는 거, 이렇게 불안정해져야만 찾을 수 있는 걸까요?”
“봉인이잖아요. 무언갈 숨기려고 만든 마법인데, 눈에 띄어서 좋을 리는 없겠죠.”
아직까지 좌표 계산이 잘 되고 있음을 확인한 라크시스가 봉인까지의 거리를 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오토마톤에게 무력하게 당했던 글레이셜 홀에서의 수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의 덤덤한 대답에 문득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오르고 만다. 봉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백작과 왕국을 몰락시키면서까지 봉인을 손에 넣으려던 카얄. 죽어가던 신 다무스. 그녀에게 쏟아지던 거대한 빛.
수국관 4025호에서 만난 또 다른 자신.
일기장의 시아 켈튼.
‘그리고 난.’
모든 일의 원인일지도 모르는 존재. 갈리프.
여전히 믿기진 않고, 또 믿고 싶지도 않지만 일련의 상황들이 의미하는 바를 외면할 만큼 멍청이는 아니다.
내가 누구의 분신이든, 어느 평행 우주에 살아가고 있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누군가의 죽음이 삶으로 전환되리란 것이다. 일기장 속의 시아 켈튼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 여행을 흘려보낸다면 다가올 종말 또한 바뀌지 않을 테지.
어찌 보면 의술사의 본분과도 닮아있었다. 순간의 선택이 죽어가는 환자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저 의술을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니까.
의술사가 전능한 신이 아님에도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갈리프라니.’
신룡 갈리프. 우주와 함께 태어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한 신. 내가 이렇게 거창한 존재라고 하니 더더욱 믿기지 않는다. 아무리 봉인을 찾고 광룡을 막는 것에 집중하려 해도 내가 신룡 갈리프의 또 다른 형태라는 걸 인지할 때마다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만다.
고대 마법사는 갈리프의 사도라고 했지. 그렇다면 라크시스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까?
하지만 내가 정말로 갈리프라면 그가 못 알아볼 리 없을 터다. 첫 만남에서 감히 창조주를 실험체로 써볼까, 하는 생각 같은 걸 했을 리가 없단 뜻이었다.
새삼스레 그의 저택에 걸려있던, 자신을 닮은 은발 여인의 초상화가 떠오른다.
라크시스는 그녀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지.
그 사실에 묘한 질투를 느낀다면, 나는 날 질투하는 걸까.
‘나는 라크를 신경 쓰고 있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시아는 제 뺨을 찰싹 때렸다.
어찌 됐든 지금의 자신이 시아 켈튼이란 건 변함이 없다. 요르문을 양부로 두고, 켈튼가에서 자라난 의술사 시아 켈튼. 후에 그녀가 거대한 용으로 변해버린대도 시아 켈튼으로 살아온 세월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난 나야.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몰하게 하십니까?”
미간을 살짝 찡그린 얼굴이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래 딴생각했나.’
시아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다. 내가 갈리프의 또 다른 평행선이라는 걸 라크시스가 알면 어떻게 될까. 내가 초상화 속 여인인 걸 라크시스가 알게 된다면.
“캐묻지 않을게요. 그러니 자학은 그만두시죠.”
“자학이라뇨.”
민망해서 대꾸해놓고 나니 뒤늦게 뺨이 얼얼했다. 아까 너무 세게 때렸나.
그의 손이 볼에 닿았다.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쓸어내린 자리가 시원하고 기분 좋았다. 이미 한번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치유술이었다.
“이제 안 아프죠?”
“…그렇네요.”
라크시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있었다. 시아는 애써 그를 외면하며 봉인을 찾는 시늉을 했다.
“어서 봉인부터 찾아야죠. 제가 연료통 안에 들어가서 뒤적거릴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라크의 도움이 필요…….”
“이미 찾았습니다만.”
뭐?
“당신이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말이죠.”
진짜였다. 그의 손에서 정제되지 않은 광물처럼 울퉁불퉁한 돌덩이가 하얗게 빛이 나고 있었다. 마법사가 아닌 시아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요란하게 마류 이상 현상을 만들어낸 거에 비해선 생각보다 멀쩡한데.’
겉보기엔 오로라처럼 아름다운 빛을 내는 마정석처럼 보이지만 안쪽에는 검은 덩어리가 짐승처럼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광룡의 힘이겠지.
‘죽어가던 다무스의 배 속에 있던 것과 비슷하네.’
연료와 같이 뒤섞여 있었던 탓에 봉인은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처럼 새빨간 열기를 품고 있었으나, 광물의 형태를 한 외피에는 생채기 한 점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강한 마류 이상 현상을 불러왔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