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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41)화 (141/292)
  • 141화 

    라크시스의 낯엔 평소 같은 장난기가 없었다. 힘이 들어간 턱과 굳게 다문 입이 그가 진지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당신이 아니어도 구했을 겁니다. 릴리 알펜 때 이후로 깨달은 바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라크시스는 작게 안도하는 시아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 사람의 목숨을 그 어떤 목표보다 가장 우위에 두는 것. 사실 라크시스는 시아를 만나기 전까진 사고는 불행이요, 죽음은 운명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예컨대 추락하는 비행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나 재키 레이븐에게 쫓기던 다리 다친 여자가 맞닥뜨릴 죽음 말이다.

    그러나 시아는 달랐다.

    시아는 릴리 알펜을 주저하지 않고 치료했다. 미스 알펜이 봉인의 단서가 되든 말든 개의치 않던 모습은 라크시스에게 뒤통수가 얼얼한 깨달음을 주었다.

    만약 재키 레이븐에게 쫓겨 도움을 구하던 이가 시아였다면. 물론 그렇게 두지 않았을 테지만, 만약 주변에 아무도 도울 이가 없어 시아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끔찍하군.’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예전이었다면 지나쳤을 사람들이 눈에 밟혔다. 자신이 비행선에서 일어날 일을 외면한다면 시아는 분명 실망하겠지.

    시아는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라크시스는 잠시 침묵하다 화제를 돌렸다.

    “마침 레이디 로드리치가 새로운 파티 장소를 찾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레이디 밀레이나 로드리치요?”

    “누군지 아십니까?”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다. 세인트 밀레이나 돔은 예술감독 밀레이나 로드리치가 건립한 제국 최대의 극장이자, 수도 모르간의 랜드마크였다.

    노을이 하늘을 적실 때면 대극장을 감싼 크리스탈 돔은 그 빛을 머금고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어 황홀한 광경을 연출했다. 수준급의 공연만을 무대에 올리는 것도 극장의 명성을 높이는 데 한몫했지만, 사실 대극장은 해가 저물 때의 아름다운 모습 덕에 제국의 명물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로등 켜진 거리를 따라 밀레이나 돔의 광장을 거니는 연인들이 얼마나 많던가. 아르카나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함께 밀레이나 돔에서 낭만극을 관람하고 나면 사랑이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난다더라.

    시아는 가장 최근에 밀레이나 돔에서 봤던 극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태양신과 물푸레나무, 공기 정령과 바보 기사, 대성당의 집시 여인…….

    “그럼요. 모르간 사람 중에 세인트 밀레이나 돔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봐요. 얼마 전에도 거기서…….”

    그러다가,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 말이야! 마리가 자기 좋아하는 배우 나온다며 봐야 된다고 닦달했던 뮤지컬!’

    바뀐 미래에서 카트린이 제게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을 외치던 기억까지 도달해 버리고 말았다.

    “시아.”

    자신만만하게 아는 체하던 입이 꾹 다물린다. 시아는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뮤지컬이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는 탓이다.

    앨런 어셔의 추리소설 연작. 슈나이더 경감의 자기애와 망상으로 버무려진 라크시스 옌과 로렌 허슬러의 로맨스 소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서, 무얼 하셨길래.”

    지난 다무스로의 시간 여행 때 라크시스에게 앨런 어셔의 연작을 보여줬었지.

    뮤지컬의 제목을 말한다면 라크시스는 단번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당신과 내가 연인이라. 아까워도 제가 한참 아까운 것 같은데.’

    분명 이러면서 놀릴 거야. 그러면서도 이때다 싶어 자꾸 요망한 얼굴을 들이밀겠지.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중세에서 돌아오고 난 이후로 자꾸만 자신에게 낯간지러운 말들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망할 슈나이더.

    “궁금하게 말을 하다가 마시는 겁니까?”

    여우처럼 살살 눈웃음치는 시선과 그만 마주치고 말았다. 응? 알려줘요. 은근하게 조르는 라크시스라니, 심장에 해롭다.

    터질 듯 쿵쾅거리는 박동에 모든 감각이 마비된 것 같다. 시아는 꿈틀거리는 입술이 열리지 않게 애쓰느라 라크시스가 어느새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말 안 할래요. 못 들은 걸로 해줘요.”

    “이렇게 나오니 더욱 궁금해지는군요. 왜요, 설마 남사스러운 극이라도 보셨습니까?”

    “남사스럽다뇨! 절대 아니에요! 그저 라크가……. 아. 이 손은 또 언제……!”

    화들짝 놀란 시아가 손을 뺐다. 라크시스는 빠져나가는 손을 막지 않고 다시금 팔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청했다.

    청량한 소리가 붉어진 귓가에 울린다. 정말 드문 일이었다. 라크시스가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을 하루에 두 번 이상 목격한 건 아마도 시아가 처음일 것이다. 요르문이 봤다면 뭘 잘못 먹었냐며, 혹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냐며 물어봤을지도 몰랐다.

    물론 시아는 모르는 사실이었다.

    “마침 비행선을 띄울 명분이 필요했는데 잘 된 셈이죠. 덕분에 제가 원하는 환경도 만들었으니.”

    “원하는 환경이요?”

    “당신의 일기장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로렌시아호에 타야 할 인물들을 추려보았습니다. 대륙 횡단 비행선이 당시 관광객을 태운 최초의 장거리 비행선으로 유명했다고 하더군요.”

    아, 물론 승객 명단은 일기장에 적힌 기록만으로 유추한 거라 정확하진 않을 수 있습니다만. 라크시스가 덧붙였다.

    “부유하고 여유로운 자들은 새롭고 값비싼 유흥거리라면 사족을 못 쓰곤 하죠. 대륙 횡단 비행선에 탔던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로렌시아호에 태울까 고민하다 보니 유명 인사의 무도회가 열리면 가능하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참 대단한 계획을 세웠구나 싶었다.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는 시간 속에서 누가 저렇게 퍼즐을 맞추듯 완벽하게 상황을 짜 맞출 수 있을까.

    “그래서 레이디 로드리치를 구워삶았죠. 지금껏 비행선에서 무도회를 연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일주일 동안 비행선을 빌려주는 대신, 제가 원하는 자들을 파티에 초대해달라고 했더니 덥석 수락하더군요.”

    거기에 기장부터 웨이터, 정비공, 식자재를 대는 상단에 연료를 납품하는 회사까지.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무도회의 모든 준비를 레이디 로드리치가 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라크시스가 벌인 판에 레이디 로드리치의 명성을 얹어 올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 까다로운 부인의 기준에 맞춰 제 뜻대로 상황을 만드는 게 조금 힘들긴 했습니다만.”

    “파티라면 라크가 직접 열 수도 있지 않나요?”

    라크시스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어라 할 말이 있지만, 상대가 시아라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라크시스를 벌써 네 번이나 만나본 시아로선 그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지금 나 때문에 당황한 거 맞지?

    “또 왜요.”

    “무도회는 안주인이 여는 게 일반적이니까요. 사실 파티 주최자라면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초대받은 손님과 춤을 추어야 하는 게 더 싫었지만요.”

    내가 사교계에 나가봤어야 그런 걸 알지.

    시아는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라크시스가 헛기침을 하며 변명했다.

    “세월의 차이겠지요. 제가 당신이 칠십 년 후에서 왔단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나 봅니다.”

    “아마 칠십 년 후에도 이런 예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있을걸요. 제가 사교 활동을 안 해서 그렇지.”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세차게 돌고 있는 모터의 아득한 소음만이 겨우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 그래도 불편하진 않았다. 요르문, 라크시스와 처음으로 삼자대면을 했던 순간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어색함 축에도 못 낀다.

    라크시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무안을 준 게 미안한지 그녀의 눈치를 보는데, 그 모습이야말로 그답지 않아 어색했다. 차라리 비웃었다면 모를까.

    불어오는 바람에 드레스 자락이 흩날린다. 라크시스의 은발도, 정결하게 묶은 크라바트도 잔물결처럼 팔락였다. 온통 시커먼 밤 속에서 새하얀 남자는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시선을 피하려 해도, 자석인 양 달라붙어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틈새로 드러난 조각 같은 얼굴과 마주치자 그의 입가에 초승달처럼 미소가 걸렸다. 무의식적인 미소였다. 그걸 시아와 라크시스가 동시에 인식한 순간, 어색하던 공기도 눈 녹듯 사라졌다.

    “라크는 춤추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나 봐요.”

    “불특정 다수와 손 맞대는 걸 그닥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러면서 아까 댄스 카드는 왜…….”

    라크시스는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한 사람과 진득하게 추는 건 상관없을지도요. 예컨대 이런 왈츠라든가.”

    몸이 붕 떴다. 비어있던 오른손에 기다란 손가락이 매듭처럼 얽혀들었다.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마디가 시아의 손에 꽉 맞물려 들어가는 사이, 단단한 팔은 어느새 옴폭한 허리를 파고들어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놀란 시아가 바르작거렸다.

    “전 춤 못 추는데……!”

    라크시스가 속삭였다.

    “괜찮아요. 제가 리드할 테니까.”

    라크시스가 첫발을 뗐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볍게 움직인다. 실제로도 구름 위에 있었지만, 시인들이 왜 그런 비유를 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라크시스의 춤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만약 시아가 여느 영애들처럼 무도회를 다녔다면 그의 춤이 수준급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느껴질 만큼 매끄럽고 우아하다는 걸 단박에 깨달았을지도 몰랐다. 어디를 받쳐야 상대가 편하게 몸을 맡길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시아는 어느새 라크시스와 몸을 맞대고 있었다. 그의 품에서 빙그르르 돌자 온 우주가 빙그르르 돌았다.

    별이 돌고, 달이 돌았다.

    라크시스는 그대로였다.

    달아오른 머리가 어질했다.

    “긴장했어요?”

    “…설마요.”

    “거짓말.”

    라크시스가 웃었다.

    “제게 몸을 맡겨요.”

    “이렇게요?”

    “힘 빼고. 네, 그렇게.”

    허리가 자연스럽게 뒤로 넘어갔다. 그녀의 몸이 낭창거렸다. 초여름에 흩날리는 등나무처럼 너울너울 잔상을 남기며 궤적을 남겼다. 발이 가벼운 걸 보니 눈앞의 마법사가 잔망스러운 수작을 부린 모양이었다.

    문득 알록달록한 빛이 시야에 밟혔다. 겨울철 나무에 매다는 알전구 같기도 했다. 시아는 그것들이 반딧불이처럼 그녀 주변을 맴도는 걸 보고, 아스타가 부리던 정령과 같은 종류인 것을 알아차렸다.

    무심코 내려다본 발밑에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왈츠의 궤적을 따라, 정령의 잔광이 원을 그리며 사방에 피어있다. 스케이트가 지나간 얼음판에 무수한 곡선이 그려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발이 가볍게 느껴졌던 건 정령들이 자신을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라크시스의 마법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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