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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40)화 (140/292)
  • 140화 

    【 재회 】

    코끝이 시원하다. 청량한 숲 내음에 서늘한 밤바람이 섞여들었다.

    ‘여긴…….’

    어딘지 모르겠다. 이번에도 예고 없이 과거에 떨어져 버렸다. 하필이면 헬릭스 전하 앞에서 시간 여행을 시작할 건 뭐람.

    내가 난데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을까. 그러고 보니 단 한 번도 남에게 시간 여행을 들킨 적이 없었구나. 원래 시대로 되돌아가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머리가 깨질 듯 아프더니 점점 시야가 돌아온다. 시아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새카만 창공. 소금 같은 별들. 흩날리는 은발.

    “라크……?”

    정신을 차리자마자 두 눈 가득 들어온 건 청초한 웃음을 머금은 라크시스의 얼굴이었다.

    이런 건 반칙이잖아. 정말이지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모자라는 사람이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헬릭스를 한여름의 태양이라고 한다면, 라크시스는 창백하게 타오르는 순백의 달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이디 켈튼.”

    방심한 가운데 익숙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훅 파고든다.

    시아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가득 채운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나, 무사히 라크시스를 만났구나. 어디로 시간 여행을 하든 그를 만났다면 된 거다. 라크시스는 과거에서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고, 내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의지할 곳을 찾은 몸은 안심했다. 저절로 긴장이 풀어진다. 시아는 별다른 생각 없이 라크시스가 내민 손에 제 손을 얹었다.

    그가 일으키는 대로 몸을 일으키다가 바닥을 내려다본 시아는 그대로 굳었다.

    “……?”

    아무것도 없다. 문자 그대로, 바닥이라 불릴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작아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건물들. 넘실거리는 바다와 경계 흐릿한 대륙. 구름. 지나치게 태연한 라크시스 그리고 그녀 자신.

    밤바람이 스치고 간 다리가 서늘하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나,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왜 그러십니까?”

    라크시스의 미소가 사악해 보이는 건 왜일까.

    시아는 그제야 자신이 도착한 곳이 수만 피트 높이의 하늘이라는 걸 깨달았다.

    “와악! 여기 뭐예요! 나, 내가, 제가 지금 하늘에 있는 거예요?”

    “이런, 발버둥 치지 마시죠. 그러다 당신을 떨어뜨리면 어쩝니까.”

    “안 돼요! 떨어뜨리지 말아요!”

    시아는 비명을 지르며 냅다 라크시스를 붙잡았다. 라크시스의 목덜미를 꽉 그러안아 도로 안기다시피 달라붙었다. 드레스 때문에 훤히 드러난 목이며 팔의 맨살이 그대로 라크시스의 얼굴께에 닿는데도 몰랐다.

    왜냐하면 정말로 무서웠으니까.

    “설마 제가 당신이 떨어지게 두겠나요.”

    시아가 바들바들 떨며 목을 조르는데도 라크시스는 꿈쩍도 안 했다. 겉보기와 다르게 사람이 튼튼하다니까.

    새삼 라크시스의 몸이 단단하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런 감상도 잠시였다.

    “일어나게 도와줄게요. 두 발로 서봐요.”

    구름 위에 서보라고? 내가 바보인 줄 아나!

    시아는 소리를 빽 질렀다.

    “싫어요! 이거 수증기 덩어리라고요! 저 빠져 죽어요!”

    “그러면 계속 이렇게 제게 안겨있을 생각이로군요.”

    시아는 그제야 자신이 겁에 질려 앞뒤 안 가리고 라크시스에게 매달린 걸 깨달았다. 심지어 그가 자신을 가녀린 공주처럼 들어 안고 있다는 것도.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뭣…….”

    올려다본 라크시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기분이 좋은지 보기 드물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이런 제게 앞으로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라고.”

    시아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내려줘요.”

    청량한 소리가 밤하늘을 울린다. 라크시스가 소리 내어 웃은 탓이다.

    “자, 레이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정중하고도 완벽한 매너였다.

    “당신을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길.”

    시아는 그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왜 이래요. 낯간지럽게.”

    “말씀드렸을 텐데.”

    “익숙해지라고요?”

    “싫으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싫다, 라. 문득 제 앞에서 고백하던 헬릭스가 떠올랐다. 헬릭스는 한때 먼발치서 바라보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고백하며 무릎을 꿇었을 때 왜 거절했더라.

    라크시스 때문이었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특유의 여유로움이 그녀의 긴장마저 풀어주는 듯했다.

    “…싫진 않아요.”

    라크시스는 그녀를 잠시 마주 보다, 시선을 돌리고 대답했다.

    “좀 걷죠.”

    떨어지게 두지 않는다는 라크시스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내딛는 걸음마다 몽글몽글한 감촉이 구두 밑창에 그대로 전해진다.

    사방이 탁 트였다. 너울 치는 창백한 공기 사이로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저 멀리 비행선이 유유히 구름을 가르고, 갈라진 구름은 부드럽게 파도치고 있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말 그대로 별천지였다. 쏟아지던 유성우를 바라보던 것과는 다르다. 마치 별로 이루어진 호수 속에 몸을 담근 것 같았다.

    이것도 마법인가? 사람이 어떻게 이런 광경을 맨몸으로 보나. 그것도 수증기 덩어리 위에서.

    하지만 시아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괜한 소리를 했다간 라크시스가 또 웃을 게 뻔했다. 고대 마법사의 마법을 은근히 자랑하면서.

    날 묘하게 자극하는 것 같단 말이지. 이럴 땐 마법이 없는 시대에 태어난 게 억울하단 말이야.

    그런 기분과 별개로 그녀가 손을 얹고 있는 팔뚝은 근육의 결이 느껴질 만큼 탄탄했다. 그녀의 손 위로 라크시스가 제 손을 가만히 겹쳐 올렸다. 절대 떨어뜨리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는 듯이.

    “시아.”

    귓가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시아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꾸했다.

    “…왜요.”

    “칠십 년 후에서 무엇을 하다 오셨습니까?”

    라크시스의 목소리가 묘하게 새침했다. 시아는 그가 제 옷차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 그게.”

    그러고 보니 나 연회장에서 곧바로 시간 여행을 해버렸구나. 매번 출퇴근 차림으로 과거에 떨어졌으니 라크시스도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겠지.

    그래도 마냥 놀다 온 건 아니란 말이야. 그래, 논 건 아니지. 수국관에서 겪은 일을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려 했는데 라크시스의 표정이 왜인지 불퉁했다. 그가 손가락 사이로 얇은 종이를 팔락이며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댄스 카드라.”

    라크시스의 손에 있는 건 승전 기념 연회 무도회장에서 받은 댄스 카드였다.

    “이건 또 언제 가져갔어요!”

    시아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소리쳤다. 무도회에 참석하는 레이디들은 댄스 카드를 받는다. 자고로 댄스 카드는 레이디의 자랑거리와도 같았다. 얼마나 많은 신사들이 춤을 청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았으니까.

    그러나 시아의 댄스 카드는 거의 비어있었다. 요르문의 이름이 적힌 첫 번째 춤곡의 칸과 헬릭스의 이름이 적힌 두 번째 춤곡의 칸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라크시스가 나지막이 물었다.

    “헬릭스 디아우스 세페란테. 황자입니까?”

    “…네. 알리나 황제의 증손자쯤 될걸요.”

    어차피 사교계엔 별 관심이 없었다. 사교 활동을 통한 결혼은 더더욱. 까짓거 텅 빈 댄스 카드 좀 보라지. 춤 출 상대도 없었냐고 놀리면 발을 콱 밟아줄 테다.

    하지만 라크시스는 별말 없이 금방 댄스 카드를 돌려주었다.

    “뭐 한 거예요?”

    “그냥. 낙서요.”

    되돌아온 카드 맨 첫 번째 칸에는 요르문 켈튼 대신 라크시스 옌이라는 이름이 우아한 필체로 적혀있었다. 다음 빈칸에도, 그다음 빈칸에도. 그 누구도 자신의 댄스 카드에 이름을 적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똑같은 상대와 여러 번 춤을 추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걸 라크시스가 모를 리 없었다. 미래의 연회에 그가 참석하지 못한다는 것도 뻔히 알 텐데.

    장난스레 눈매를 휘는 라크시스와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던 대꾸가 그만 쏙 들어가고 만다. 그가 왜 저렇게 요망하게 구는지 알아버린 탓이다.

    시아는 머리가 아찔하도록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닫았다. 여기서 괜히 아무 말이나 꺼냈다간 시도 때도 없이 낯간지러운 말을 해대는 저 고대 마법사의 농간에 휘말리고 말 테니까.

    한참 후에야 시아는 겨우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라크. 그런데 왜 절 하늘에서 맞이한 건가요?”

    “당신이 여기로 떨어졌으니까요.”

    “일기장엔 대륙 횡단 비행선에 떨어진다고 되어있었는걸요.”

    진짜였다. 이번 네 번째 시간 여행의 도착지는 원래 대륙 횡단 비행선의 기계실 내부 계단이었다. 증기 보일러실 부근이라 덥고 습했으며, 온통 붉은 조명 때문에 그릴 위의 스테이크가 된 기분이었다고 일기장 속의 시아 켈튼이 투덜거렸다.

    “제 생각이긴 하지만 그 대륙 횡단 비행선, 아예 없어진 것 같습니다.”

    “네?”

    라크시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눈썹을 까딱거렸다.

    “과거가 바뀐 탓이겠지요. 지난 시간 여행들이 일기장과 다르게 흘러갔잖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 과거가 바뀌면 현재도 미래도 바뀌는 게 맞긴 한데. 대체 내가 과거에 뭘 건드렸길래 비행선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거야?

    시아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럼 봉인은 무슨 수로 찾죠?”

    라크시스는 대답 대신 턱짓했다. 그의 턱 끝에는 거대한 호화 비행선이 있었다.

    “저게 원래 제가 떨어졌어야 할 비행선이었나 보네요.”

    “아뇨. 제가 아까 그 비행선이 없어진 것 같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그럼 저 비행선은 뭔데요?”

    “오늘을 위해 준비해 둔 보험 장치죠.”

    둥근 구피 밑의 선체가 유려하고도 웅장한 곡선을 뽐낸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호화로운 외관에는 마력을 덧씌워 빛이 나는 글씨가 있었다.

    [로렌시아호]

    그 이름이 무엇과 무엇의 조합인지 깨달아버린 시아는 경악하며 라크시스를 되돌아보았다.

    “…설마 비행선을 만들었다고요? 저 때문에?”

    그러자 라크시스는 오늘 아침이 무어냐는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아주 태연하게 대답했다.

    “일기장과 최대한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봉인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내가 미쳐! 정말 돈이 남아도는 거야? 터질 비행선을 저렇게 만들었다고?

    시아는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손을 주먹 쥐었다.

    네 번째 시간 여행에서 시아가 겪는 사건은 다름 아닌 비행선 추락 사고였다. 대륙 횡단 비행선의 연료통에서 시작된 불이 엔진에 옮겨붙으면서 비행선이 추락한 탓에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던 사건이었다.

    잠깐. 최대한 비슷한 환경을 만들었다고?

    “사람이 타고 있잖아요!”

    “시아. 전 아무도 죽게 두지 않아요.”

    “여긴 수만 피트 위라고요! 떨어지는 비행선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아무도……!”

    “당신이 타게 될 비행선입니다. 제가 그 정도 대비를 안 했을까 봐요.”

    단호한 목소리가 정신을 일깨운다. 시아는 뒤늦게 라크시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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