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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39)화 (139/292)
  • 139화 

    천사가 지상에 내려온 걸까. 아니면 천국을 보고 온 걸까. 무저갱에 빠진 태양이 발밑에 있었고, 머리 위엔 수십 개의 달이 있었다.

    여긴 비행선이 아니었다. 감히 엿봐서는 안 될, 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눈앞의 존재는 온통 창백했다. 은으로 자아 만든 머리칼이 은하수처럼 부유했고, 수많은 별들이 기쁘게 춤을 추며 주위를 맴돌았다.

    이윽고 모든 것이 현실로 돌아왔다. 별이 사라지고, 중력을 거부하던 은발이 빛을 잃고 서서히 가라앉았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는 검붉은 머리의 여인이 있었다. 두 손을 꼭 모아쥔 얼굴엔 땀이 흘렀다.

    뒤따라온 남자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멀거니 서있었다.

    “…시아. 당신 지금…….”

    “하하. 성공한 것 같지 않아요?”

    여자가 실없이 웃으며 농담조로 남자를 위로했다. 뒤돌아서 손바닥을 펴 보이며, 어떠냐고 묻는 대화가 조곤조곤 들렸다. 남자가 여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 하지 말아요. 내가, 방금 얼마나…….”

    “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는걸요. 라크, 봐요. 멀쩡하잖아요.”

    “그건 다행이지만, 하…….”

    “이럴 줄 알았으면 오토마톤의 심장도 제가 가지고 있을 걸 그랬어요. 라크도 그때 심하게 다쳤었는데.”

    “시아!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다쳐도 제가 다칠 겁니다.”

    역광 속의 실루엣이 왜인지 익숙하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어디선가 한 번쯤 마주친 것 같은 인상. 누구지? 누구였더라? 기억 속에서 배회하는 수많은 얼굴 중에 문득 겹쳐 드는 모습이 있다.

    손바닥에 화끈거리는 감각이 돌았다. 헬렌은 그제야 눈앞의 남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마법사와 탐정. 소설의 삽화로만 보아왔던, 실존 여부조차 불분명한 사람.

    고대 마법사 라크시스 옌의 연인. 그가 사랑한 유일한 사람.

    “아, 음. 거기 미스, 음. 네. 괜찮으세요?”

    로렌 허슬러였다.

    “많이 놀라셨죠. 그, 음. 그쪽이랑 거기 누워계시는 분 모두 치료와 안정이 필요하실 것 같은데.”

    “시아, 저주는 파훼됐어요.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로렌 허슬러가 드레스를 바짝 쥐어 들곤 징검다리 건너듯 저주의 진을 피해 걸어왔다. 헬렌은 제게 다가오는 여인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가 악수하듯 손을 뻗었다. 헬렌은 무심결에 그녀의 손을 향해 마주 손을 내밀었다. 막스의 피로 엉망이 된 손을, 로렌은 아무렇지 않게 잡고 헬렌을 일으켜 세웠다.

    뒤늦게 복도를 뛰어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애타게 찾는 에밀리며 루즈 부인의 음성이 들린다. 심지어 레이디 로드리치와 요르문 켈튼에 리암 블레어, 노든 대공까지 온 모양이다. 그녀의 노호에 고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상황을 수습한다.

    “…로렌, 허슬러.”

    로렌의 손은 따스했다. 겁에 질려 얼어붙었던 몸에 그제야 피가 도는 것 같았다. 왈칵 터진 눈물이 뜨거웠다. 로렌 허슬러가 왜 여기 있는지, 자신이 위험에 처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 건 한참 후였다.

    헬렌은 펑펑 울었다.

    “방금 폭발이, 저를 노리고, 으흑. 으흐흑……. 도련님도 죽을 뻔했고, 대체 누가, 흑…….”

    로렌은 아랑곳 않고 헬렌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의 미소도 손만큼이나 따스했다.

    “괜찮아요. 이렇게 탐정 로렌 허슬러가 왔잖아요. 제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 * *

    약 한 시간 전.

    “…고대 마법사님! 거긴 위험합니다!”

    이렇게 외쳐놓고도 정비공은 라크시스를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릴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말일 터다.

    자신은 고글에 밧줄로 허리를 칭칭 감고도 덜덜 떨며 오르는 사다리를 고대 마법사가 곡예하듯 유려한 몸짓으로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기구에서 영감을 받은 로렌시아호는 유람선 같은 갑판 위로 돛 대신 거대하고 둥근 구피가 달려있었다. 물론 강철로 된 모형 구피였고, 그 안엔 버너 대신 부유 마법이 걸린 특등급 마정석이 가득했다.

    기장으로부터 연료통 어딘가에 이상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은 참이다. 선체 곳곳의 연료통 점검을 위해 구피 외벽의 사다리를 오르려다 선객을 발견하고 말았다. 문제는 그 선객이 로렌시아호의 주인이요, 고대 마법사인 라크시스 옌이라는 것이다.

    “허, 참.”

    정비공은 머리를 긁적였다. 호화 비행선의 주인이란 사람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람?

    사뿐사뿐 사다리를 밟아 오르던 라크시스가 어느새 구피의 꼭대기에 올라있었다. 잘게 팔락이는 은발이 비행선 조명을 받아 환히 빛났다.

    세찬 모터 소리와 창공의 얼음장 같은 공기 속에서도 그는 여유로웠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허공을 보며 혼자 중얼거리다가도 선미의 구명선 창고를 유심히 살핀다.

    뒤늦게 구피 내부 연료통 정비를 마친 정비공은 사다리에 매달려 외쳤다.

    “거기서 뭐 하십니까?”

    “손님을 맞이하러 왔네만.”

    “…손님이요?”

    돌았어. 곱게 돌아버려서 그렇지. 마법사라더니 어디가 돌아버린 게 분명해. 정비공은 입도 다물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그때였다.

    “먼저 실례하지.”

    청량한 목소리가 떠나간다. 정비공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구피 꼭대기에서 연미복 자락을 펄럭이며 뒷짐을 지고 있던 라크시스 옌이 그대로 밤하늘에 몸을 던진 것이다.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른 정비공은 이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고대 마법사가 하늘을 걷고 있었다. 수만 피트 상공의 밤하늘을 춤을 추듯 뛴다. 구름이 그의 구두 끝에서 계단처럼 몽글거리고, 그가 도약한 자리에는 곱게 간 별 가루 같은 마력이 궤적을 그리며 긴 꼬리를 남겼다.

    완벽한 포물선이다. 바람의 방향, 공기의 저항, 비행선의 속도, 낙하물의 중력가속도.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산한 마법사는 아름다운 그래프를 그리며 연미복의 뒷자락을 휘날렸다.

    그는 오직 한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유성이 나타났다. 섬광이 일어난 밤하늘 저 높은 곳에서 별이 낙하하고 있었다.

    정비공은 두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별인 줄 알았던 것은 한 명의 여인이었다.

    새벽을 잘라내어 만든 듯 연한 청회색을 띠는 시폰 끝자락이 오로라처럼 너울 친다. 하얗고 맑은 피부가 풍성히 걸친 보석보다 찬란하여 마치 달처럼 환히 빛난다. 천상의 옷감으로 치장한 천사가 날개를 잃고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감탄도 잠시, 정비공은 곧 까마득한 속도로 곤두박질치는 여자를 보고 다시금 비명을 질렀다. 천사고 뭐고, 이대로라면 추락해 죽는다고!

    마찰열로 타오르는 운석인 양 그녀의 주변에서 아지랑이가 보이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고, 고대 마법사니임―!”

    순간, 라크시스가 팔을 내밀었다. 찰나 공기의 저항이 줄어들고,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겹겹이 내려앉는 시폰 드레스 자락을 하나씩 셀 수 있을 만큼 여인이 천천히 떨어진다.

    정비공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 쉬는 것도 잊었다.

    환상적인 마법이었다.

    이윽고 그의 두 팔에 여인이 깃털처럼 사뿐히 안겨 들었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도는 라크시스의 마력이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완벽한 계산, 완벽한 타이밍, 완벽한 마법.

    그리고 시아 켈튼.

    라크시스는 아주 기쁜 눈으로 제 품에 안긴 시아를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다시 보는군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나보낸 것이 벌써 일 년도 더 되었다. 다무스발 아르카나행 열차에서 증발해 버린 시아를 줄곧 기다려왔었다.

    막 자각한 마음이 못 보던 사이에 무럭무럭 자랐다. 시아를 향한 감정을 인정하고 나니, 그리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기다리는 건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유독 시아를 기다리는 일만큼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들었다.

    “…제가 이런 사람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녀는 시간 여행의 여파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살며시 닫힌 눈꺼풀을 따라 기다란 속눈썹이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곧게 뻗은 콧날을 따라간 시선이 혈색 도는 입술에 잠시 머문다.

    언제나 아름다웠지만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다.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라크시스는 피식 웃으며 시아를 안고 천천히 구름 위를 걸었다. 밤하늘을 걷고 있자니 중세의 고성에서 유성우를 바라봤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충동을 느끼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아.”

    라크시스는 작게 실소했다. 문득 그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백삼십 년 전의 중세의 그는 내내 시아를 보고 있었다.

    시아의 눈동자엔 별이 쏟아지는 우주보다 더 찬란한 빛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순수한 흥분과 삶의 열기.

    시아의 시선은 라크시스로 하여금 유성우보다 더 아름다운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 시선 속에 자신이 오롯이 담겨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희열을 가져다주었던가.

    그때도 그녀가 자신만을 바라봐주기를 바랐었다.

    “…어쩌면 전 오래전부터 당신을.”

    나직이 내뱉는 혼잣말에도 열기가 스친다. 라크시스는 애써 태연한 척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점점 정신이 드는지 시아가 뒤척이기 시작했다.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눈을 깜빡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라크……?”

    아직 몽롱한가 보다. 시아가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여기가 어딘지 언제인지 묻는데 말이 제대로 맺어지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면 놀라려나. 수만 피트 상공의 밤하늘에서 눈을 뜨게 될 줄은 몰랐을 테니.

    그녀가 화들짝 놀라 안겨 들어도 좋을 테지. 그 모습도 사랑스러울 거란 생각이 드는 걸 보면 확실히 중증이다.

    라크시스는 문득 오래전 시아와 했던 내기를 떠올렸다. 나답지 못한 것의 의미가 무어냐고 했지.

    ‘지금 내가 당신에게 보이는 모든 모습이 그 답이겠지.’

    완연한 미소가 라크시스의 보조개를 파고든다. 내기의 보상은 소원 들어주기였다.

    라크시스는 시아가 제 무덤을 팠다고 생각했다. 이 내기의 승자는 자신일 테고, 그녀는 그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어야만 할 테니.

    하지만 아직까진 덜컥 소원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시아가 조금 더 제게 마음을 열어줄 때까지, 그녀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먼저 눈에 담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라크시스는 가장 완벽한 신사로 둔갑하곤 시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이디 켈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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