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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38)화 (138/292)

138화 

마지막 객실 2028호에 도달해 무릎을 짚고 헉헉거리던 헬렌은 어느덧 무지갯빛 기운이 허리께까지 차올라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오로라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독 안개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마저 든다. 그러고 보니 불꽃놀이 말고 따로 이런 식으로 준비한 이벤트는 없었던 것 같은데.

사지에서 시작된 소름이 끊이지 않고 계속 피부를 오르내린다. 무섭다. 두려워. 얼마 전에 토니가 보던 괴담 실린 미스터리 잡지가 생각났다. 악령에 빙의된 사람이 저주를 부려 사람을 죽였다던데.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그때였다.

쿵.

“……!”

벽을 내리찧는 소리에 기대있던 등이 울렸다. 헬렌은 얼어붙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난 곳은 마지막 객실, 2028호였다.

쿵쿵.

묵직한 것이 벽을 때리는 소리. 그러나 헬렌이 지금껏 청소해 온 객실은 분명 모두 빈방이었다. 겁에 질린 헬렌은 덜덜 떨며 애써 목청껏 소리쳤다.

“뭐, 뭐야. 뭐냐고! 여, 여기서 이런 장난을 쳤다간 주인님 눈 밖에 날걸! 사교계에서 쫓겨나고 싶어?”

쿵, 쿵쿵. 쿵쿵쿵!

격한 울림을 끝으로 돌연 소리가 멈췄다. 그 뒤로 음산한 정적이 복도를 훑고 지나갔다. 째깍째깍. 복도엔 있지도 않은 시계 초침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와 신경을 예민하게 거스른다.

그때, 자정이 되었다.

뎅뎅뎅뎅뎅―!

시보 장치가 촤르르 감기며 괘종시계가 일제히 자정을 알린다. 단단히 걸어 잠근 문을 뚫고 객실마다 놓인 시계에서 울려 퍼진 제각기 다른 종소리가 기괴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뎅뎅뎅뎅뎅―! 짹짹짹―! 당당당당! 띵띵띵띵띵―!

자정의 종소리가 끝난 직후였다.

“……!”

전원 레버가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복도가 암전되었다. 비행선의 동력마저 멈춰버린 것처럼 고요하다. 아련하게 들리던 증기기관의 소음도, 매립된 파이프를 타고 흐르는 보일러의 소음도 마치 지워낸 것처럼 사라졌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들어오고, 객실 복도가 원래대로 환하게 밝아졌지만 헬렌은 그 짧은 수 초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인기척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정적. 위아래 층이 아예 없는 것처럼 지나치게 고요하다. 점멸하는 필라멘트 하나가 스파크를 튀기며 꺼졌다.

그리고.

끼이익― 달칵.

2028호의 문이 열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없을 것이다. 실낱같이 열린 문틈은 온통 시커멓다. 승강기와는 차원이 다른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났다. 쇠 냄새같이 시큼한 비린내였다.

헬렌은 무의식적으로 손잡이를 천천히 밀었다. 혹자는 이런 괴이한 일을 겪고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객실에 들어가는 객기를 부리냐며 뜯어말릴지도 모르겠지만, 헬렌은 왜인지 이 객실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극도의 공포에 취해 머리가 마비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028호는 유난히 어두웠다. 아까 청소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진 않았는데. 가져온 가스등이 없어 당장 발밑조차 보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객실의 불을 켤 용기는 없었다. 무엇을 보든 제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허리께까지 오던 무지갯빛이 이젠 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까보다 농도가 짙어진 것을 보니, 아마 이 객실에서 시작된 것이 맞는 듯했다.

예전에 글레이셜 홀에서 무지갯빛에 둘러싸여 혼자 춤추는 오토마톤을 봤다던 경비원의 괴담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설마 나도 그런 괴담에 갇힌 걸까.

비릿한 냄새가 짙어졌다. 어렴풋이 짐작한 냄새의 정체를 애써 무시했다. 구두에 질척거리는 무언가가 밟혔다. 아마 비린내의 원인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고 나서야 헬렌의 이성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당장 여기서 나가야 돼.’

그러나 시선을 잡아 끈 반짝임이 그녀의 몸을 결박했다.

구름에 가려 희미하게 새어오는 달빛 속에서도 눈에 띄게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티 테이블 위, 새하얀 접시 위에 냅킨을 공작새 꼬리처럼 접어 묶어놓은 냅킨 링에서 묘한 빛이 흘러나왔다.

헬렌은 홀린 듯이 집어 들어 냅킨을 빼냈다.

에메랄드가 큼직하게 박힌 반지가 손에 남았다. 초록빛이 감돌아 에메랄드라고 추정했을 뿐, 보석 안에는 기묘한 빛이 검은 덩어리를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치며 은하수처럼 흐르고 있었다. 모양과 빛이 좋은 마정석은 보석으로도 사용한다던데, 이런 건 마정석일까. 보석을 이루는 얇은 껍데기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다. 실제로도 살짝 금이 간 틈에서 알록달록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보았던 무지갯빛은 보석의 깨진 틈 사이로 흘러나오던 마력이었다.

그 순간 보석이 박동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손바닥 위에서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그러나 헬렌은 놀라지 않았다.

놀랄 수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헬렌은 샤샤리아에 취한 사람처럼 우두커니 있었다. 도망이라도 가려는 것처럼 자꾸만 진동하며 미끄러지는 반지를 잡고, 또 잡고 계속 낚아챘다.

그녀의 몽롱한 눈동자가 거울처럼 보석을 담았다.

검은자위 흰자위 할 것 없이 온통 오묘한 검은색으로 물든 눈으로 헬렌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시그무트 아 함 나타.

시그무트 아 함 나타.

시그무트 아 함 나타…….

기묘한 마법이 자아를 상실한 인간의 몸을 지배했다.

반지는 헬렌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저 반지를 껴야만 한다. 악마의 속삭임이 헬렌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반지의 주인은 너야.

그녀가 제 손가락으로 망가진 반지를 천천히 가져다 끼웠다. 조금 큰 것처럼 보이던 반지가 그녀의 손가락에 딱 맞게 줄어들었다.

이제 헬렌은 넋이 나간 것처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제국어도, 다무스어도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가 주문처럼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반지를 낀 손가락이 경련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보석의 얇은 껍데기에 커다란 금이 간 걸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헬렌.”

어둠 속에서 나타난 축축한 손이 헬렌의 발목을 잡았다.

서늘한 감각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뭘 하고 있었지. 분명 이 층에서 벗어나지 못해 길을 헤매다가, 2028호에 들어와서…….

‘반지!’

찬란하던 빛들은 어디 가고, 에메랄드가 시커멓게 변해있었다. 금 간 표면을 따라 불길한 기운이 새어 나와 그녀의 손가락을 마비시켰다.

헬렌은 기겁하여 반지를 빼내다가, 보석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진동에 그만 반지를 놓치고 말았다.

놓친 에메랄드 반지는 벌써 바닥을 굴러가 구석에서 달달거리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뒤늦게 자신이 정신을 차린 이유를 깨달은 헬렌은 발목을 붙잡은 축축한 손을 알아차리고 화들짝 발을 뺐다.

때마침 구름이 걷히고, 창을 새하얗게 비추는 달빛에 어둠에 잠겨있던 객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헬렌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질척한 카펫은 예상대로 피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여간 기괴한 것이 아니다. 선혈로 그린 진이 자신이 서있는 티 테이블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퍼져있었고, 그 피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포마드로 넘겨놓은 머리카락이 붉게 젖어 축축하다. 한때 깨끗했을 셔츠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남자의 꼴은 엉망이었지만 헬렌은 그가 누군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도련님!”

막스 블레어였다.

“…도망쳐. 헬, 렌. 여기 있, 다간 죽…….”

그가 고개를 떨궜다. 도망치란 말을 남긴 것을 마지막으로 막스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왜 도련님이 여기에 이런 꼴로 있는 거야?

뇌가 멈춰버린 것 같았다.

“도련님, 막스 도련님! 정신 차리세요, 제발…….”

허겁지겁 그를 감싸 안고 뺨을 치며 흔들어보았지만 축 늘어진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애초에 그녀의 발목을 잡았을 때, 막스는 제게 남은 마지막 힘을 모두 사용한 것 같았다.

헬렌의 눈에 뒤늦게 방의 광경이 들어왔다.

덫을 놓듯 티 테이블 주변에 그려진 기괴한 진, 무엇에 홀린 것처럼 냅킨 링을 끼려고 했던 그녀.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을 죽이려고 꾸며진 일인 것처럼.

불길한 무지갯빛이 폭풍처럼 소용돌이친다. 헬렌은 그제야 아까 떨어뜨린 에메랄드 반지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진동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주변 공기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폭발한다……!’

저게 마폭탄이었다니. 만약 저 반지를 꼈다면 나는.

비행선 폭파 사고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폭파 당시 폭발물 근처에 있었다면 뼛조각도 못 추릴 것이다. 깨진 에메랄드에서 길쭉한 빛 가닥이 하나씩 뻗어 나온다. 보석에 실금이 좌르르 생기는 소리가 들렸다.

반지를 끼든 안 끼든 폭탄은 이미 작동된 것이 틀림없었다. 나 하나를 죽이기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건가.

아까와는 다른 공포가 뇌리에 파고든다. 터진다. 터진다. 터진다. 헬렌은 막스를 끌어안고 질끈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당장 그걸 이리 던져요!”

귓가에 낯선 음성이 날카롭고 정확하게 내리꽂혔다. 혈관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팔이 뻗어나갔다.

그 후론 무슨 정신으로 움직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받으세요!”

불과 몇 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찰나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목소리에 복종한 몸이 바닥을 기어 구석을 향했다. 뜨겁게 달궈진 금속에 화상을 입는 것도 모른 채 반지를 집어 들었다. 뒤늦게 확인한 손바닥엔 벌건 화상 자국과 징그러운 수포가 가득했지만, 그 순간엔 아픈지도 몰랐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정말로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제 손을 떠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반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걸 정확히 받아 든 상대를 확인한 이후엔 그저 목격한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섬광이 일었다.

“시아!”

눈앞이 온통 창백했다. 뒤늦게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땐 반전된 잔상이 아른거려 눈물이 났다. 겨우 시야가 선명해졌을 때.

‘…사람이 아니야.’

헬렌은 기적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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