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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37)화 (137/292)

137화 

“하하, 둘은 여전하네.”

“미스터 블레어!”

헬렌이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루즈 부인을 피했더니 막스 블레어가 나타났다. 지나가는 파리도 미끄러질 만큼 매끈하게 잘 빠져 광이 나는 얼굴을 마주하니 말문이 막혔다. 사실 막스 블레어를 본 순간 아까 에밀리와 그렇고 그런 얘기를 했던 게 떠올라 버려 얼굴이 확 달아오른 탓이었다.

“안녕, 에밀리? 헬렌은 오늘도 예쁘네.”

남자가 싱긋거리자 눈 밑의 점이 덩달아 움직인다. 그 또한 막스 블레어의 매력이란 사람들이 있었다. 점조차 잔망스러운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휴가 냈다고 들었는데, 파티 때문에 못 간 모양이네. 아쉽겠다.”

“괜찮아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로렌시아호에 타보겠어요.”

“그래? 그래서 타보니 마음에 들어?”

묘하게 반응하는 막스의 눈썹이며 입꼬리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에밀리는 그 미세한 움직임을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큼큼 콧김을 뿜으며 막스를 가로막았다.

“도련님께선 옆 계단으로 다니지 마시고 얼른 연회장으로 돌아가시죠.”

“오, 에밀리. 평소처럼 안부만 묻고 있었는데. 너무한 거 아냐?”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헬렌은 안 돼요.”

“에밀리!”

아무리 막스가 아랫사람에게 편히 대해주는 사람이라지만, 그는 블레어가의 둘째 도련님이었다. 그런 막스를 향한 아슬아슬한 발언에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 건 헬렌의 몫이었다.

“흐응. 난 그저 인사만 했을 뿐인데.”

막스가 불쑥 헬렌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헬렌의 몸이 푹 수그러들었다. 도련님의 시선이 제 정수리 위를 훑고 지나가는 것이 선명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막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헬렌,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죄송해요, 도련님.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세 사람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에밀리도 웬일로 조용했다. 곁눈질을 하니 그녀 역시 당황해서 굳어버린 듯했다. 에밀리가 친 사고를 수습한 적이 이번뿐인 건 아니었지만 왠지 오늘따라 몸이 떨렸다. 아까 그를 상대로 엄한 생각을 해버렸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하하, 난 괜찮아. 그러니까 그렇게 부담스럽게 고개 숙이지 말아줄래?”

“그럼 용서해 주시는 거지요……?”

“에밀리, 헬렌! 빨리 청소하러 안 가고 뭐 하니!”

아주 적절한 때에 들려온 호령이었다. 에밀리와 헬렌은 이때다 싶어 줄행랑을 쳤다.

“저희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즐거운 무도회 되시길 바랄게요.”

“하하하, 그래. 또 보자?”

루즈 부인의 호령이 구세주가 될 때도 있다니. 이 층에 도착한 두 사람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말도 않고 앞만 보며 복도를 걸었다. 괜히 아까 그런 얘길 해서 분위기가 어색한 거다. 막스 블레어가 하필이면 그때 거길 지나가서는.

게다가 오늘따라 그의 시선이 적나라했다.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헬렌은 그녀를 훑어내리는 듯한 시선에 괜히 속내가 다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꼈다.

삼 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우뚝 멈춰 선 에밀리가 헬렌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무튼 헬렌, 네가 이 층 맡아. 내가 삼 층 할 테니까.”

“아냐, 같이 나눠서 해. 삼 층이 이 층보다 객실이 훨씬 많잖아.”

“괜찮아, 헬렌 넌 나 때문에 혼났잖아. 아, 오늘 식사로 점심에 남은 칠면조 나온다더라. 빨리 끝내고 식당에서 봐!”

“에밀리, 기다려!”

에밀리까지 순식간에 사라졌다. 헬렌은 홀로 덩그러니 복도에 남았다. 무도회장에서 몰래 빠져나올 때만 해도 이런 결말을 맞이할 줄은 몰랐는데.

잠깐만 쉬었다가 일하려고 했더니, 이젠 일이 두 배가 되었다. 게다가 막스 블레어도 만나버렸고. 에밀리는 괜찮을까? 삼 층을 혼자 다 하려면 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터다. 미안해서 저러는 걸 텐데, 빨리 이 층을 마무리하고 도와주러 가기나 해야겠다.

‘어차피 루즈 부인도 적당히 벌을 줬다 생각하면 도로 불러들이실 테고.’

트롤리를 끌어와 걸레며 카펫 얼룩을 지워주는 약, 새 이불보 등을 잔뜩 챙겼다. 로드리치 고택의 화려하고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방들을 청소하다 비교적 간단하게 생긴 객실을 청소하려고 하니 왠지 할 만한 것 같단 자신감이 생긴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곳엔 레이디 로드리치가 아끼는 도자기라든가, 상아로 만든 조각상 같은 게 없었으니까. 위태위태하게 진열된 유리 인형의 먼지를 털다가 깨먹을 뻔한 적이 있었던 헬렌으로서는 위험부담이 적다는 점에서 객실 청소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다만 방이 많아서 그렇지.’

맨 바깥 객실부터 창틀, 복도 할 것 없이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닦아나가기 시작해 어느덧 네 시간.

드디어 마지막 객실이 끝났다. 2028호의 문을 닫고 나오며 헬렌은 탈진하듯 주저앉았다.

“…진짜로 별관 한 층을 혼자 다 청소하라고 보낸 거였어?”

루즈 부인의 용서를 내심 기다리던 헬렌은 끝끝내 그녀와 에밀리를 도로 불러들이지 않은 루즈 부인에게 경악하고 말았다.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데.

“어지간히 화가 나셨나.”

하긴, 생각해 보면 레이디 로드리치가 간만에 주최한 파티였다. 주인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루즈 부인은 근 한 달 여간 파티 준비에 몰두해 있었다.

아까 메이드 숙소까지 찾아왔을 때 아주 그냥 찬바람이 쌩쌩 불던데. 루즈 부인의 기분이 좋을 땐 애교로 무마해도 어떻게 넘어갔었는데. 오늘은 절대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덜컥 들 정도로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하지 않나.

‘그나마 다행인 건 청소 중에 오가는 손님이 없었다는 것이지만.’

드나드는 손님이 있었다면 아마 청소가 두 배는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나저나 2028호라니, 전체도 아니고 별관 이 층에만 객실이 스물여덟 개나 된다고.

“괜히 로렌시아호가 아니네.”

객실 청소가 저택의 방 청소보다 쉬울 것이라 자신했다가 큰코다치고 말았다. 차라리 로드리치 저택의 까다로운 방 서너 개를 청소하는 게 나았을 뻔했다.

“에밀리는 아직도 하고 있으려나.”

아마 이 층보다 훨씬 많은 방에 지쳐선 어딘가에 주저앉아 쉬고 있을 터다. 툴툴거리는 친구를 떠올리며 피식 웃은 헬렌은 별관 삼 층을 목전에 두고 땀을 닦으며 잠시 숨을 돌렸다.

최고의 유람선을 하늘길에서 경험하란 문구로 이름을 알린 비행선답게, 로렌시아호에는 바깥을 구경할 수 있는 창이 사방으로 가득 나있었다. 객실 두어 개 간격으로 작게 나있는 테라스는 머무는 손님들이 담소를 나누거나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트롤리에 걸레를 올려두고 슬쩍 난간에 몸을 기대어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밤을 올려다보았다.

먼 곳에서 작은 섬광이 일었다.

“…별똥별?”

꼬리가 긴 별이 춤을 추듯 나풀나풀 떨어진다. 온통 시커먼 밤 사이로, 제게 드리운 어둠을 피하고 달아나듯, 새벽빛을 푸르게 두른 별이 대지를 향해 질주한다. 별이 아니라 천사 같기도 했다. 신에게 벌을 받아 날개를 잃고 대지 위로 추락하는 아름다운 피조물. 그저 궤적을 남기는 빛무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크를 두른 듯 이리저리 펄럭이는 잔상이 남아 그러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별을 향해 물수제비를 던지듯 가벼이 다가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저런 별은 처음 봐. 원래 저렇게 갓등 같은 모양새인가? 뭐, 애초에 별똥별 같은 건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문득 시야에 무지갯빛 연기가 피어오른다. 두리번거리니 지나온 복도를 발밑으로 투명한 기운이 파도치고 있었다. 이내 너울이 일렁일렁 펼쳐진다. 동대륙의 실크 같기도, 조개껍데기의 오묘한 광택 같기도 하다.

말로만 듣던 북부의 오로라가 보이는 걸까? 하지만 그건 추운 곳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다. 오로라라는 게 비행선 안에서 나타나지도 않을 거고.

어쩌면 이 오색찬란한 빛도, 방금 떨어진 이상한 별도 아까의 폭죽놀이처럼 이번 파티의 이벤트일지도 모르겠다.

점점이 뿌려지는 빛에 밤하늘이 알록달록 물든다.

‘예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고단함을 잊고, 아름다운 감상에 젖어 조금만 더 쉬고 싶다. 에밀리의 말대로 B에게 답을 보내면, 아마도 그는 이 고달픈 삶에서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주저 않고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로드리치 저택의 메이드 헬렌이어야 했고, 그것만이 고달프고 평화로운 삶을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괜한 생각을 다 했네. 에밀리 기다리겠다.”

열없이 웃음을 흘린 헬렌은 앞치마를 탁탁 털며 다시금 조여 맸다. 바퀴를 돌돌 끌며 트롤리를 움직여 고용인용 승강기에 올랐다. 3이 적힌 버튼을 누르자 아코디언처럼 주름진 철창문이 촤르륵 접힌다.

붕 떠오른 몸이 착지하는 느낌이 들고, 땡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철창문이 마름모를 그리며 펼쳐지자.

“응?”

2001호 객실이 보였다.

“잘못 눌렀나?”

왜 이 층으로 돌아왔지? 분명 승강기를 제대로 탄 것 같은데. 다시 한번 3을 정확히 누르고, 승강기가 덜커덩거리며 올라가는 것까지 고스란히 느꼈다. 그러나 문이 열렸을 때 헬렌이 목격한 건 3001호가 아니라 2001호였다.

오싹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달칵. 달칵달칵. 승강기의 버튼이 더는 눌리지 않는다. 문을 닫는 레버조차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움찔거리기만 하고 넘어가지 않았다. 마치 헬렌에게 반드시 이 층에 내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헬렌은 조심스럽게 승강기에서 내렸다. 그녀의 발이 떨어지자마자 닫혀버린 승강기는 곧바로 올라가더니 두 번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승강기가 사라진 곳이 짐승의 아가리처럼 시커멓게 뚫려버렸다.

공포에 사로잡힌 헬렌은 시커먼 아가리로부터 도망치듯 계단으로 내달렸다. 손님용 중앙 계단부터 고용인용 옆 계단까지 끊임없이 오르고 또 올랐으나 헬렌의 눈에 보이는 건 온통 2라는 숫자뿐이었다.

“헉, 헉헉…….”

헬렌은 눈이 뒤집혀 복도를 마구 살폈다.

그녀가 청소하며 지나온 복도엔 먼지 한 톨 없었다.

그래, 여긴 분명 아까 내가 네 시간 동안 청소했던 곳인데.

2001, 2002… 2028. 객실도 같다. 그녀가 잠시 숨을 돌리던 테라스도 똑같았다. 트롤리가 지나간 카펫에 옅은 바퀴 자국이 남은 것까지도 똑같았다.

모든 것이 아까와 똑같았다.

단 한 가지.

“…무지개가 짙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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