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에밀리의 낯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자세를 고쳐 앉고 진지하게 물었다.
“대체 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안 대하고.”
“헬렌, 로드리치 저택에 온 손님은 누구나 친절해. 괜히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굴었다가 주인님 눈 밖에 나면 사교계에서 쫓겨날 테니까.”
“…친절하고.”
“그건 그 도련님이 여자라면 눈이 뒤집혀서 추파를 던지니까 그렇지! 얼마 전에 너 계단에서 넘어질 뻔한 거 잡아줘서 그런 거야? 네 허리 한 번 잡아보려고 수작질한 거라니까.”
“…잘생겼어.”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막스 블레어야? 차라리 라크시스 옌이라고 하지 그래!”
“암만 잘생겨도 고자에 괴짜는 싫어!”
헬렌이 질색하며 외쳤다. 라크시스가 들으면 퍽 억울할 소리였다.
‘아하. 본심이 이거구만?’
하긴 뜨거운 밤을 생각한다면 막스 블레어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괜히 바람둥이에 카사노바란 소리가 나왔겠는가. 그가 창관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걸 목격한 이도 여럿이요, 오페라 가수며 무용수들이 막스의 이름을 대고 블레어가의 저택에 찾아온다 하니.
“아하하! 막스 블레어가 고자에 괴짜는 아니긴 하지! 물건이 부실하면 바람둥이가 될 순 없잖아?”
“너 정말……!”
“헬렌 너 생각보다 성숙했구나? 그런 걸 다 따지고.”
기특하다는 눈빛이 헬렌에게 향한다. 에밀리의 미소는 한층 흐뭇해져 있었다. 대체 왜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헬렌의 얼굴은 또다시 푹 익고 말았다.
“이, 이게 다 에밀리 네가 물어봐서 그런 거잖아!”
“아하하! 누가 뭐래?”
에밀리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한껏 웃어대서 그런가, 허파에 힘이 빠지며 평소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장면들이 하나둘 기억을 비집고 나타났다.
천장 무늬를 점점이 세며 손가락을 접어보기 시작한다. 하나, 둘……. 그러고 보니 막스 블레어가 유독 헬렌에게 상냥한 것 같았지?
헬렌에게 상냥하지 않은 남자가 어디 있겠냐마는.
뜻밖의 사실을 깨달은 에밀리가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신기하네. 블레어가의 방탕 도련님은 매번 로드리치가의 파티에 참석하시잖아. 우리 주인님 성격상 그런 사람을 가까이 둘 리가 없는데.”
“…자선 파티니까 그렇지. 거기다 막스 도련님은 블레어가의 사람이잖아. 블레어가 삼 남매 중에 혼자 클럽 로얄의 티켓이 없는 걸 보면 말 다 했지.”
“하긴 그런가.”
블레어가와 로드리치가가 서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블레어가 삼 남매 중 제국 총리인 장남 리암 블레어와 유명 디자이너인 차녀 사샤 블레어는 레이디 로드리치와 각별한 사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교류가 잦았다. 아마 그렇기에 행실 문제로 말이 많은 차남 막스 블레어에게도 로드리치 저택의 출입이 허락되었을 터였다.
생각에 잠겨 든 에밀리의 정신이 반쯤 다른 곳에 팔려있을 때였다. 은은한 조명 빛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드리워졌다. 헬렌이었다.
에밀리는 역광 속에서 흰자를 번득이는 헬렌을 보고 기겁하며 일어났다.
“으왁! 뭐야, 갑자기 왜 그래?”
헬렌이 키득거리며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저 장난기를 보니 어쩐지 불안해졌다.
“그러는 에밀리 넌 누가 좋은데?”
“나? 나는…….”
기습 공격이었다. 원래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본인이 당했을 때 더욱 당황하는 법이었다. 헬렌이 도로 되물어 올 줄 몰랐던 에밀리는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아무렇게나 대답하면 한동안 헬렌에게 내내 똑같이 놀림당할 수도 있었다.
이젠 에밀리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허, 정말 이러기야? 나더러는 재미로 해보자 그래놓고 넌 입 꾹 닫겠다는 거니?”
“아아니? 지금 생각 중인데?”
“에밀리, 머리 굴리는 거 다 보여. 말 돌리지 말구 얼른 불어!”
으름장에 고개를 돌리자, 그걸 또 그대로 따라와서 쳐다보며 부담을 준다. 곧이곧대로 이상형을 털어놓기 전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기색이다.
결국 에밀리는 터질 듯이 머리가 달아올라 입을 열고 말았다.
“난 라크시스 옌……?”
헬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어? 푸핫, 세상에 에밀리 너도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 사람은 재수 없기로 유명한 고자라고!”
“아, 몰라! 너도 막스 블레어 타령이나 했으면서 뭘!”
어디서 노든 대공의 자존심이 팍 구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랑감이라는데 어째 인기가 영 별로다.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에서 라크시스 옌이 얼마나 로맨틱하게 나오는데. 고자라면 절대 로렌 허슬러에게 그런 식으로 여우짓을 할 수가 없다고!”
에밀리는 곧 빼액 소리치며 소설의 내용을 줄줄 읊어댔다. 사설탐정이었던 로렌 허슬러가 공동묘지에서 처음 라크시스를 만났던 것이며, 수사를 위해 숨어든 박람회 개장 전 글레이셜 홀에서 라크시스가 은근슬쩍 손을 잡았으며, 재키 레이븐을 잡기 위해 매춘부로 위장한 로렌 허슬러가 장난스레 유혹하자 라크시스 옌이 못이기는 척 키스를 해버렸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모두 슈나이더 경감, 아니 작가 앨런 어셔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소설이었으나 왜인지 사람들은 라크시스의 연인, 로렌의 존재를 진짜로 믿고 있었다. 훈장 수여식에서 슈나이더 경감이 언급해 버린 이 말 때문이었다.
‘사실 재키 레이븐은 저 혼자서는 절대 잡을 수 없는 최악의 살인마였습니다.’
‘제게 도움을 주신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살인마와 함께, 살인마가 죽인 시체를 수습하며 범인을 찾고 있었겠지요.’
‘이 자리를 빌려 라크시스 옌 경과 미스 로렌 허슬러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이상입니다.’
에밀리는 한동안 열변을 토했다. 장황한 설명 중에 유일하게 진실인 건 로렌 허슬러와 라크시스 옌이 재키 레이븐을 검거했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주인님이 파티 초대장을 보낸 손님 명단에 라크시스 옌도 있었어.”
“그 사람이 왔겠니? 파티는커녕 그간 로드리치 저택에 들른 일조차 손에 꼽잖아.”
“아! 설마…….”
“설마 뭐?”
“로렌시아호 맨 꼭대기 층 말이야. 누가 전부 빌렸다던데, 그게 라크시스 옌이라는 소문이 맞나 봐!”
그런 소문은 또 언제 돌았대. 하여간 마당발도 이런 마당발이 없다. 아무리 레이디 로드리치가 주관한 파티라지만 이런 거대한 비행선을 오롯이 로드리치 저택의 고용인들로만 관리할 순 없었다.
파티의 중심이 되는 연회장과 무도회장 등 몇 군데를 제외하곤 켈튼 코퍼레이션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접객을 담당하고 있었다. 꼭대기 층의 초호화 객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에밀리가 꼭대기 층의 메이드들과 그새 친해진 모양이었다.
“로렌 허슬러와 비밀 데이트라도 하는 게 아닐까? 지금껏 파티 내내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어머. 어머, 어머! 그래. 그건가 보다. 진짜로 로렌 허슬러와 함께 비행선에 탄 거야!”
떠드는 모습이 이상형을 고백하는 소녀가 아니라, 마치 이웃집 아들딸의 연애를 지켜보며 부인들 같다. 라크시스 옌을 좋아한다기보단 그와 로렌의 간질거리는 분위기가 재미있는 게 분명했다.
“대체 그 아가씨는 누굴까? 로렌 허슬러는 가명일 테고, 이번 파티에 참석한 아가씨 중에 그럴싸한 사람이 어디 보자 미스 로젠버그랑 또…….”
“내가 소설 좀 작작 읽으랬잖아.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는 알맹이라도 있지, 앨런 어셔의 소설은 범인 빼고 다 거짓부렁…….”
소리 없이 열린 문으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에밀리. 헬렌.”
신이 나서 떠들어대던 두 소녀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발끝에서 시작된 소름이 좌르르 등골을 내달려 정수리에서 싸늘하게 모여들었다. 그제야 역광을 두르고 아가리를 벌린 시커먼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에밀리와 헬렌은 고장 난 오토마톤처럼 삐걱거리며 뒤를 올려다보았다.
“…루즈 부인.”
스무 개는 족히 넘는 단추를 목 끝까지 바짝 잠가 올리고, 단 한 가닥의 이탈도 허용치 않은 회색 올림머리의 노부인이 따각, 따각 들어온다.
“둘 다 일 안 하고 어디에 있나 했더니. 에밀리, 내가 손님용 신문 멋대로 풀어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녀의 부채 끝에 에밀리가 내던진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가 건져 올려졌다. 마루가 삐걱거리고, 오늘따라 섬찟하리만치 느리게 걸어오는 노부인의 안경엔 기묘한 광이 돌았다.
마치 눈동자에서 발한 빛이 렌즈에 반사된 것처럼.
“헬렌, 내가 알던 그 옛날의 빠릿한 메이드는 어디 갔니? 에밀리랑 지내면서 점점 농땡이부리는 실력만 늘어가는구나.”
침이 절로 꼴깍 넘어간다. 그러나 두 소녀는 입술에 풀이라도 붙인 듯 꽉 다물고 변명조차 않았다. 루즈 부인이 단단히 화가 나있었다. 몰고 온 냉기에는 피부가 에일 정도로 서늘하게 날이 서있었다.
“당장 각자 자리로 돌아가거라. 복도 창틀에 내려앉은 먼지도 털고, 카펫에 묻은 얼룩도 좀 닦고, 손님들 돌아오기 전에 침대보 주름도 펴고 세숫물도 준비하고.”
“네, 부인.”
망했다. 무도회 시작 전에 무도회장 준비만 하면 됐는데. 졸지에 객실 청소까지 하게 생겼다.
“붙어 다니지 말고 각자 별관 한 층씩 맡아서 해라.”
“…한 층을 전부요?”
“내 말에 토를 달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헬렌이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분노한 루즈 부인에게 대꾸하면 일이 배가 된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부인.”
“헬렌은 이 층, 에밀리는 삼 층이다. 당장 별관으로 가거라. 다 끝내기 전까진 둘이 눈도 마주치지 말도록.”
“네, 부인.”
얌전히 고개 숙인 두 머리통 중 하나가 슬쩍 고개를 든다.
“그런데 빈방도 다 청소해야 하나요?”
에밀리! 헬렌이 놀라 속삭이며 눈치 없는 에밀리의 치맛자락을 당겼다. 루즈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흐음, 소리를 냈다. 부인이 화가 났을 때 나는 소리였다.
“당연한 소릴. 엉덩이 걷어차이기 전에 곧장 뛰쳐나가는 게 좋을 거다. 하나, 둘…….”
“가요, 가!”
에밀리와 헬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숙소를 뛰쳐나왔다.
“잠깐 쉰 거 가지고 엄청 뭐라 하네.”
“…잠깐 쉬진 않았지만 말이야.”
헬렌이 슬쩍 대답했다. 바짝 졸아들었던 가슴이 한결 편안해졌다. 함께 혼나서 그런가, 그다지 혼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에밀리가 키득거리며 이 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막 붙이려던 참이었다.
“누가 중앙 계단으로 다니니! 당장 내려오지 못해?”
눈이 뒤통수에도 달렸나. 아니네, 보고 있었네. 에밀리와 헬렌은 부리나케 옆 계단으로 뛰어가며 외쳤다.
“죄송합니다,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