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35)화 (135/292)
  • 135화 

    ‘…정말로 메이드 방을 내어주란 말씀이십니까?’

    ‘루즈 부인. 난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네. 아직 손이 여물지 않은 어린아이이니 고되지 않은 일 먼저 가르치게.’

    난데없이 로드리치 저택에서 메이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도, 조그마한 아이는 불평 하나 없었다.

    손이 여물지 않았다는 레이디 로드리치의 말과 달리 시키는 족족 야무지게 일을 해내 모두를 놀라게 했고, 까다로운 루즈 부인의 심부름도 척척 해내 그 귀하다는 루즈 부인표 칭찬을 받기까지 했다. 귀한 집 아가씨처럼 로드리치 저택에 입성한 꼬마는 그렇게 어느새 저택에 없어선 안될 훌륭한 일꾼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검은 코트 신사의 소공녀라는 호칭도 점점 진짜가 아닌, 헬렌을 장난스레 놀릴 때 쓰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코흘리개 꼬마 헬렌이 어엿한 여인으로 자라나기까지의 세월을 내내 함께 한 절친한 친구 에밀리는 다르게 생각했다.

    ‘헬렌은 귀한 집 아가씨가 틀림없어.’

    헬렌은 연고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종종 편지가 날아오곤 했는데, 허름한 편지 봉투 속에는 겉과는 전혀 딴판인 2실랑짜리 고급지와 크고 작은 선물들이 들어있었다. 발신인은 그때그때 달랐다. 보내는 안부 또한 자기가 어딜 여행했고, 무엇을 보고 먹었으며 함께였으면 좋았을 것이란 감상이 전부였다.

    그러나 편지의 마무리엔 언제나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꼬마 숙녀의 B가.’라고 적혀있었다.

    같은 방을 쓰는 에밀리는 어깨 너머로 편지의 내용물을 슬쩍슬쩍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값비싼 다무스산 홍차가 들어있질 않나, 남부 해안가에서만 난다는 진주가 떡하니 나오질 않나.

    레이디 로드리치의 방을 턴 도둑으로 몰려도 변명하기 힘들 정도의 귀한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에밀리는 할 말을 잃었다. 오래전 소공녀처럼 저택에 찾아온 헬렌이 자꾸만 떠올랐다.

    보내는 이가 누군진 몰라도 한낱 메이드에게 줄 선물은 아니란 말이야. 헬렌의 친부일까? 사연이 있어서 딸을 찾아오지 못하는 귀족가의 아버지일까?

    아님 헬렌이 어느 가문의 영애일 적 미래를 약속했던 남자일까?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꼬마 숙녀의 B가.’라니.

    이건 진짜 사랑이다. 아버지가 됐든 약혼자가 됐든 헬렌이 원한다면 B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헬렌을 메이드의 삶에서 구원해 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헬렌은 고되게 일하면서도 답장 한 번 쓰지 않았다.

    헬렌이 편지를 읽으며 얼굴을 붉힐 때 에밀리는 그 뒤에서 가슴을 쳤다. 나 같으면 진작 여기 나갔어. B인지 뭔지 하는 사람 손을 잡고 로드리치 저택에서 빠져나갔을 거라고.

    ‘분명 검은 코트의 신사가 헬렌이 성인이 되면 데리러 온다고 했지.’

    그때부터 에밀리는 또 다른 인생 계획을 세웠다. 바로 아가씨가 된 헬렌을 따라 로드리치 저택을 나가는 것. 급여 높고 이력 또한 대단한 것으로 치는 로드리치 저택이지만, 이젠 그만 좀 편하게 일하고 싶었다.

    오랜 친구 헬렌이라면 자신을 메이드장으로 고용해 주지 않을까. 그러다 헬렌이 아이를 낳으면 유모로 살아도 괜찮을 것이다.

    ‘헬렌의 결혼식도 보고 싶긴 하고.’

    주로 남부에서 편지가 올라오니, 아마 편지 속 B는 남부의 귀족일 것이다.

    볕 좋은 어느 날에, 반짝이는 강가에 요트를 띄우고, 뱃놀이를 하듯 사랑하는 남자와 낭만적인 결혼식을 올려도 아름답겠지. 하얀 드레스를 입고 눈부시게 미소 짓는 오랜 친구를 보면 제 마음까지 덩달아 행복해질 것 같았다.

    “에밀리, 그 사람이랑 난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했잖아.”

    에밀리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B라는 남자, 누구야?”

    “아, 깜짝이야! …나도 몰라.”

    “나이는 어때? 비슷해? 너보다 많아? 설마 늙다리 배불뚝이는 아니겠지?”

    앉은 채 엉덩이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던 헬렌의 등에 침대 헤드가 닿았다. 또다시 음흉한 표정으로 온 얼굴을 도배한 에밀리가 흐흐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고양이에게 몰린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변태도 이렇게까지 무섭지 않을 거야.

    “난 몰라. 진짜 몰라. 에밀리 너 진짜 변태 같애. 오지 마. 악, 오지 마아. 더 오면 때린다.”

    “진짜 네 아버지야? 아님 약혼자? 숨겨둔 애인?”

    “에밀리!”

    “악! 헬렌! 때리지 마!”

    결국 헬렌이 비명을 지르며 에밀리를 퍽퍽 쳐내고 나서야 에밀리는 떨어져 나갔다.

    “아우, 기집애. 손은 매워가지고.”

    얻어맞은 등짝이 얼얼했다. 아픈 곳을 살살 문지르며 에밀리가 투덜거렸다. 헬렌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그 분은 그저 날 돌봐주셨던 사람일 뿐이야.”

    “궁금해서 그래. 너 세 달 후면 열여덟 번째 생일이잖아.”

    “에밀리, 난 생일이 지나도 로드리치 저택에서 계속 일할 거야.”

    뭐? 에밀리가 화들짝 놀라며 펄쩍 뛰었다.

    “대체 왜? 나 같음 재깍 나가버릴 거야. 뭐 하러 계속 여기서 도련님이 코르티잔과 정사를 나눈 이불보나 빨고 있니?”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아가씨가 아닌걸.”

    그 말을 하는 헬렌은 묘하게 우울한 것처럼 보였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기도, 애초에 제 것이 아니었던 걸 꿈꾸었던 사람 같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정말로 사연 있는 아가씨처럼 보이게 하는 걸 헬렌은 알까. 그녀는 이따금 따사로운 햇살 가득한 고향을 그리는 눈빛으로 부연 매연이 낀 수도의 풍경을 바라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에밀리는 자신도 덩달아 헬렌의 향수에 빠져버리는 기분을 느꼈다.

    새장에 갇힌 카나리아가 구슬피 우는 걸 하염없이 듣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럴 땐 그저 헬렌을 평소처럼 대해주면서 위로하는 게 상책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더 안 캐물을게. 얘가 이 얘기만 하면 풀이 죽는다니까?”

    헬렌의 등을 토닥인 에밀리가 앞치마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펼친다.

    “이거나 먹어.”

    “이게 뭐야?”

    “메이가 엎어버린 초콜릿. 주방장이 노발대발하는 틈에 몇 개 주워왔지! 어, 이거 바닥에 안 닿은 거야. 먹어도 돼. 깨끗하다니까? 진짜로?”

    에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초콜릿의 위생 상태를 자신했다. 결국 헬렌은 피식 웃었다.

    “…고마워.”

    입 안에서 녹는 맛이 씁쓸하면서도 달았다. 헬렌은 수많은 디저트 중에서도 초콜릿을 가장 좋아했다. 마냥 달기만 한 것들과는 다르게 초콜릿은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달까. 씁쓸하기에 중간중간 느껴지는 달콤함이 돋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 인생도 그렇게 초콜릿처럼 흘러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 아까 물어봤던 거나 대답해 주라. 넌 여기 온 남자들 중에 누가 제일 괜찮은 것 같아?”

    “…너 진짜 끈질기다.”

    헬렌이 질린다는 눈으로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역시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다.

    “에밀리, 우린 메이드야. 남자들 손잡고 춤추는 사교계의 아가씨가 아니라 청소하고 빨래하고 아가씨들 옷시중 들어주는 메이드라고.”

    “그냥 재미로 생각해 보자는 거지. 어차피 괜찮은 남자를 못 만나는 신세는 저 위의 수많은 아가씨나 너나 나나 똑같잖아.”

    “에밀리!”

    얘가 정말 못 하는 말이 없어! 혹여 밖에서 누군가 이 말을 듣고 제 주인에게 조르르 일러바치면 혼나는 건 둘째 치고, 오만한 언행으로 레이디 로드리치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잘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에밀리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탐을 내는 신랑감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결혼을 해야 하는 아가씨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으니까.

    “…너 어디 가서 이런 얘기 하면 안 된다.”

    “내가 여기서 한 얘길 딴 데서 하겠어? 들키면 호되게 경을 치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그런 게 아니라. 아이참, 내 말 듣고 웃지나 말라고.”

    대체 누구길래 얘가 이래? 헬렌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B의 편지를 받았을 때도 이렇게까지 얼굴이 새빨갛지 않았는데?

    헬렌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에밀리의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동공이 확장되고, 절로 콧김이 뿜어진다.

    에밀리가 엉큼한 눈으로 헬렌에게 바짝 붙었다.

    “안 웃어, 안 웃을게! 헬렌, 대체 누굴 말하려고 이래? 설마 노든 대공?”

    차탈 디아우스 세페란테. 노든 대공.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에서 최고의 신랑감으로 몇 주째 회자되고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아무도 소식지의 이러한 내용에 토를 달지 못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신랑감의 조건을 모두 갖춘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술은 가볍게만. 도박은 하지 않음. 여자 문제도 깔끔하여 평소 이미지가 좋았다. 남자답고 호쾌하게 생긴 얼굴에 재산도 상당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차탈의 최대 장점은 황족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알리나 황제가 아들을 낳은 지 이 년이나 지났는데도 여론이 좋아 여전히 차기 황위 계승자로 언급되고 있기까지 했다.

    차탈과 결혼한다면 적어도 대공비, 운 좋으면 황비가 될 수 있단 뜻이었다.

    “얼마 전에 저택에 왔었던 군인도 잘생겼더만! 이름이 뭐였더라, 발자크 로스였나?”

    티파티에 왔던 손님이었는데. 완전 섹시했어. 솔직히 지금까지 만났던 손님 중에 제일 무섭긴 했는데, 싸늘한 그 시선이 은근히 퇴폐적이었단 말이야?

    에밀리 말로는 헬렌을 뚫어져라 쳐다봤었다는데. 막상 헬렌은 발자크인지 하는 손님을 기억하지 못했다.

    “있잖아. 내가 레이디라면 말이야.”

    드디어 헬렌이 입을 뗐다. 대체 누굴 떠올렸는지 두 볼이 붉었다. 어머, 얘가 웬일이래? 에밀리의 모든 신경이 수줍게 소곤거리는 소녀에게로 곤두섰다.

    그래서 누가 좋다고?

    “…블레어가의 둘째 도련님에게 구혼받고 싶어.”

    에밀리는 기함할 뻔했다.

    “뭐어? 막스 블레어? 아하하하! 너 진짜…….”

    “내가 웃지 말랬잖아!”

    “아니, 정말이지 헬렌 너는 엉뚱해도 진짜 엉뚱하다니까. 노든 대공도 아니고 바람둥이에 방랑벽까지 있는 그 막스 블레어?”

    푹 익은 토마토가 된 헬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밀리는 한참을 자지러지게 웃다가 뚝 멈췄다. 평소라면 놀리지 말라며 새되게 짜증을 냈을 텐데.

    이상했다. 긍정도 부정도 없이 입술을 부르르 떨며 입을 꾹 닫고 있다. 이제 보니 토마토처럼 익은 건 겉뿐이고, 숨을 색색 쉬는걸 보니 마음은 이미 사랑으로 물들어 두근거리고 있는 모양이다.

    설마 진짜로 막스 블레어를 좋아하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