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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34)화 (134/292)
  • 134화 

    헬렌은 치마를 모아 에밀리 옆에 슬쩍 앉았다.

    “자선 파티라 그렇지 뭐. 사람이 많을수록 명성이 높아지잖아. 평소에 클럽에 들어오고 싶어 하던 사람들까지 이번이 기회다, 하고 왔으니까.”

    “웬일로 자선 파티를 다 여셨을까?”

    “수도에 빈민 구제원을 만드신다 그랬던 거 같은데. 요즘은 운영되는 빈민 구제원이 몇 없잖아. 옛날 그 일 때문에.”

    재키 레이븐 사건으로 수도가 떠들썩하던 몇 년 전.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또 하나의 연쇄 살인 사건으로 한동안 빈민 구제원에 모이던 성금이 끊어진 적이 있었다. 황혼 국교회라는 이단을 믿었던 구제원 원장이 찾아오는 사람들의 식사에 독을 풀어 수많은 사람을 이단의 제물로 바쳤던 사건 때문이었다.

    두 연쇄 살인마가 신문 지면을 한동안 장식한 탓에 황혼 국교회라는 이단 또한 음지에서 끌려 나오게 되었다. 당시 많은 교회가 조사를 받았고, 알고 보니 그중 상당수가 이단이었다는 사실에 한동안 제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황혼 국교회에 대한 기사는 언제 있었냐는 듯 자취를 감추고 만다. 더불어 이단에 대한 수사도 흐지부지 멈추고 마는데. 일각에선 경찰이 무능하여 지레 겁먹고 수사를 멈추었다고 비판했지만 실상은 경찰청 간부 몇몇을 빼곤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지금, 잔혹했던 두 사건은 어느덧 점점 잊혀가고 있었다.

    “빈민을 너무 멀리 가서 찾으시네. 가까이에, 그것도 로드리치 저택에 이렇게 한가득 있는데.”

    “뭐?”

    “오, 고귀하신 부인. 제겐 토끼 같은 남편과 곰 같은 자식들이 일주일째 배를 곯으며 집에서 기다리고 있답니다. 일 쿠퍼만, 아니 일 실랑만, 아니 기왕이면 깨끗한 백지 수표 한 장만 적선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키득거리던 헬렌이 연극 조로 굽실거렸다. 힘없이 구부려 내민 손이며 비굴한 눈빛이 거리의 부랑자와 똑같았다. 구제원이 사라진 후 부쩍 늘어난 걸인을 완벽하게 흉내 낸 모습이다.

    “아하하핫! 내가 정말 헬렌 너 때문에 미쳐.”

    에밀리가 배꼽을 잡고 자지러졌다. 없으면 빵이라도 내놔! 헬렌이 에밀리의 배를 간지럽히며 덮쳤다. 경찰? 경찰! 이 거지 좀 떼어내 줘요! 한참을 장난치며 낄낄거리던 두 소녀는 이내 약속이라도 한 듯 침대에 조용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금박을 입힌 천장의 무늬가 화려했다. 아마 평생 돈을 모아도 이런 집에서 살아보진 못하겠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으로 따지면 아까 흉내 냈던 부랑자나 크게 다를 것 없는 삶이었다.

    에밀리가 중얼거렸다.

    “나도 여기 온 남자들 같은 남편이나 만나고 싶다. 돈 많고 작위도 있고.”

    “돈 많고 작위가 있음 뭐 해. 잘 생겨야 돼. 평생 보고 살 얼굴인데 눈요깃거리라도 있어야지.”

    “얼굴이 배 채워주니? 차라리 진정한 사랑이 나타났음 좋겠다고 해라.”

    헬렌이 벌떡 일어났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온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왈프브룩 부인 같은 이름으로 불려도 괜찮아?”

    “푸핫! 에밀리 왈프브룩이라니, 구려!”

    에밀리가 질겁을 하며 키득거렸다. 두 소녀의 실없는 대화는 그 후에도 한참을 이어졌다. 잘생긴 남자, 돈 많은 남자, 자상한 남자, 도박 안 하는 남자, 바람기 없는 남자…….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조건 나열에 결국 완벽한 남편감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에밀리는 한숨을 쉬며 피식거렸다.

    “일단 남자나 만나고 얘기하자. 애인도 없는데 결혼은 무슨.”

    “…그러게. 난 언제쯤 토끼 같은 남편을 만나나.”

    헬렌의 중얼거림을 잠자코 듣던 에밀리가 벌떡 일어났다.

    “왜 하필 토끼 같은 남편이야? 딴 건 몰라도 그건 안 돼. 헬렌, 말 같은 남편을 만나야지. 밤새도록 널 태우고 달릴…….”

    “에밀리!”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헬렌이 에밀리를 찰싹찰싹 때렸다.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즐거울 나이라고, 에밀리는 맞으면서도 웃느라 여념이 없었다.

    뒤늦게 무언가 생각난 헬렌이 에밀리를 불렀다.

    “에밀리, 그런데 난 왜 찾았어?”

    “아, 맞다. 짠, 이것 봐!”

    대뜸 눈앞에 조그마한 책자 하나가 들이밀어졌다. 헬렌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글자를 읽다가 종이의 정체를 확인하곤 반색했다.

    “세상에,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잖아?”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 아마 누구도 이 자그마한 종이 쪼가리가 제국 사교계를 들었다 놨다 할 줄 몰랐을 것이다.

    본래 ‘레이디 마레의 관찰지’는 모르간 타임즈의 구석에 실린 사설이었다. 사교계의 일상을 낱낱이, 때로는 자극적일 정도로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적어댔던 탓에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모르간 타임즈의 기사가 아닌 레이디 마레의 사설을 읽기 위해 신문을 샀고,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모르간 타임즈의 편집장은 아예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를 별도로 발행해 신문의 가격을 올렸다.

    그럼에도 모르간 타임즈는 불티나게 팔렸다. 레이디 마레의 소식지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로렌시아호에 타기라도 한 거야? 대체 어떻게 이게 여기에서까지 나오는 거지.”

    “됐고, 오늘은 뭐라고 써있어?”

    [3520년 4월 6일.

    어젯밤 알란드라 저택에서 벌어진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운이 없어도 대단히 없는 사람들이다. 희대의 방탕아요, 제국 최고의 바람둥이라는 블레어가의 둘째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도, 그런 그의 옷에 레모네이드를 쏟아버린 미스 로젠버그 때문도 아니다. 레이디 알란드라의 드높은 콧대가 괴도 흑장미 앞에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예고장을 받았음에도 무도회를 강행한 레이디 알란드라에게 남은 건 허전한 목덜미와 추락한 명예뿐이다…….]

    한참 머리를 맞대고 밀알 같은 글씨를 읽어나가던 두 소녀에게서 김빠지는 소리가 났다.

    “뭐야, 어제 자 소식지잖아. 에밀리, 날짜도 안보고 가져온 거야?”

    “새 신문에 끼어있는 건 당연히 새 소식지인 줄 알았지.”

    툴툴거리던 에밀리가 주머니를 뒤지더니 몰래 챙겨온 신문을 폈다. 아니나 다를까, 늘 읽던 모르간 타임즈가 아니다. 장거리 비행을 위해 로렌시아호에서 발간된 특별 모르간 타임즈였다.

    “하긴, 아무리 레이디 마레라고 해도 이 비행선에서까지 소식지를 쓰긴 힘들겠지.”

    툴툴거리는 에밀리에게 헬렌이 맞장구를 쳤다.

    “여기서 소식지가 새로 찍혀 나온단 건 로렌시아호에 자기가 타고 있다는 걸 알린단 소리니까.”

    레이디 마레의 정체는 누구도 몰랐다. 정말로 레이디인지, 진짜로 마레라는 성을 쓰는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밝혀진 바가 없었다.

    “괜히 기대했네. 요즘 이 소식지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는데. 최고의 신랑감이 매일같이 바뀌는 게 웃기단 말이야.”

    에밀리는 괜히 설레발을 쳤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가만히 있는 헬렌에게 슥 고개를 디밀고, 은밀한 얘기라도 하는 양 귓가에 속삭였다.

    “헬레엔.”

    “깜짝이야. 왜 이래? 남사스럽게.”

    “넌 지금까지 무도회에 온 남자 중에 누가 제일 괜찮은 것 같았어?”

    음흉하게 흐흐 웃는다. 에밀리는 마치 자기가 중매한 연인이 결혼해서 쌍둥이까지 낳고 잘 사는 걸 지켜본 지긋한 중매쟁이처럼 웃고 있었다. 이럴 때면 정말이지 말 많은 참견쟁이인 옆집 메리 부인같이 군다니까.

    이럴 때 에밀리에게 잘못 휘말리면 당하는 건 순식간이다.

    “뭘 그런 걸 묻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남자들도 아니고.”

    “헬렌 넌 그래도 데뷔탕트 정도는 치를 수 있을 거 아냐. 황제 폐하를 뵙고 데뷔하진 못해도 그럭저럭 괜찮은 남자는 만날 수 있을걸?”

    “아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네 검은 코트 아저씨가 얼마 전에도 편지한 거 봤어. 사실 네가 진짜로 대단한 가문의 아가씨였다든가…….”

    “그런 거 아니라구우.”

    그렇게 말하면서도 헬렌의 볼은 발그레했다.

    부엌데기 혼혈 소녀와 검은 코트의 신사.

    로드리치 저택의 고용인들은 헬렌을 언제나 검은 코트 신사의 소공녀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로드리치 저택의 메이드들은 추천장을 통해 채용이 됐지만, 헬렌만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눈 내리던 겨울날, 검은 코트의 신사와 함께 마차에서 내리던 혼혈 아이. 그 당시를 기억하는 오래된 고용인들은 헬렌을 귀한 가문의 피가 섞인 아이라고 생각했다. 꼬질꼬질한 옷차림에도 두 볼엔 보기 좋게 살이 올라있었고, 밤나무처럼 짙은 갈색의 머리칼엔 윤기가 흘렀다.

    신문이나 삽화 등에서 등장하는 검은 피부의 가멜인들과는 다르게 오뚝한 코며 얇은 입술을 가진 아이는 제국인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천진하게 방싯거리던 모습은 햇볕에 그을린 듯한 피부색조차 매력적으로 보일 만큼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따뜻한 곳에서 배불리 먹고 자란 티가 나는 아이를 보며, 사람들은 헬렌을 귀족가에서 태어난 혼외 자식일 거라 추측하곤 했다. 로드리치 가문에 아이를 의탁할 정도면 헬렌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못해도 수도에서 내로라하는 귀족일 것이 분명했다.

    아마 가멜 식민 전쟁에 참전했거나, 혹은 가멜 총독부에서 일하던 장교였으리라. 식민지 여자와의 하룻밤으로 생긴 아이를 제국까지 데려온 부정에 저택의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는 헬렌의 아버지를 참으로 책임감 깊은 사람이라 평했다.

    그녀를 로드리치 저택에 데려온 검은 코트의 신사 또한 고용인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데리러 올 테니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아마도 헬렌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부리던 보좌관이나 집사쯤 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물론 보좌관이니 집사니 하는 것도 그날의 장면을 단편적으로 지켜본 고용인들이 한 추측이었다.

    응접실에서 레이디 로드리치와 검은 코트의 신사가 나눈 대화가 워낙에 조용했고, 몇 마디 오가지도 않았기에 그러한 추측들이 생겨났지만 고용인들은 자신들의 추측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다만 레이디 로드리치는 검은 코트 신사의 부탁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한동안 어린 헬렌의 손을 말없이 매만지던 레이디 로드리치가 돌연 루즈 부인을 불러 아이에게 손님용 방이 아닌 메이드 방을 내어주라고 한 탓에 그 당시 모두가 놀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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