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평소였다면 시아 옆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을 요르문이 오늘따라 어색하게 거리를 두고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그 요르문 님이 사교활동을 하다니. 사람 상대하기 귀찮아서 날 파트너로 연회에 데리고 가려고 했던 요르문 님이다. 애초에 이 연회도 젤마니 대위에게 부탁했던 마류 탐지기의 마력 주인을 알아내고자 참석한 것인데.
그러나 오늘의 요르문 님은 달랐다.
프리드실 공국에서 볼모로 잡혀 온 공작 부부와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심지어 다가오는 레이디를 거절하지 않고 삐걱거리며 말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내가 과거의 일들을 언급한 걸 신경 쓰고 계시는 걸까. 겉으론 괜찮은 척하셨으면서, 사실 속은 상처받은 그대로인 걸지도 모른다.
오랜 벗, 유일한 가족의 죽음. 요르문 님에게 라크시스의 존재는 생각보다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게는 양할아버지가 되는 루이스 켈튼이 죽고, 어린 요르문 님의 대부였던 라크시스는 홀로 남은 아이의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헤이든에게 뒤늦게 들었다. 그걸 듣고 나니 섣불리 요르문 님의 과거를 들춰버린 것 같아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아버지라는 호칭 같은 거 없어도 상관없었는데. 요르문 님은 누가 뭐래도 내 아버지인데.
내가 과거의 친척 누님이라 어색하신 걸까. 생각해 보면 누님이라고 불렀던 여자를 양딸로 맞아들인 것만큼 기막힌 일도 없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이가 괜찮았는데. 나 때문에 어젯밤 그렇게 한참 동안 불 꺼진 응접실에 계셨던 걸까?
어젯밤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가 달빛을 받으며 우두커니 앉아있는 요르문을 봤다. 안 주무시고 뭐 하냐며 뒤에서 포옹이라도 하려다, 그의 쓸쓸한 표정을 발견하곤 말없이 돌아섰다.
울적했다. 혼자 발짓으로 마루의 세공 무늬를 휘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시아야.”
한껏 꾸민 헬릭스가 눈앞에 서있었다.
“황자 전하.”
“같은 연회장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만나기가 힘들다니. 네가 도착했단 소식을 듣고 마중 나갔었는데.”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정복부터 시작해 포마드로 모양을 내 반쯤 이마를 덮은 머리까지. 엊그제의 생쥐 꼴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작정하고 치장한 헬릭스는 승전 기념 연회를 자신의 데뷔 무대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향수를 뿌렸는지 은은한 장미 향이 났다. 황궁의 유리온실에서 만났더라면 생화의 짙은 향으로 분위기를 만들었을 텐데. 헬릭스는 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친구로 남기로 했지만,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까진 아직 접지 못했다.
“예뻐, 시아야. 정말로.”
그의 눈에 시아는 여전히 누구보다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짝사랑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시아는 밤의 장막을 열고 나타난 새벽 같았다. 연한 청회색 시폰으로 풍성하게 부풀린 드레스가 그녀의 걸음을 따라 요정의 날개처럼 사락사락 흩날린다. 검붉은 머리칼은 짙은 밤 같았고, 하얗고 깨끗한 피부는 달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신화 속 요정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헬릭스의 정신을 사로잡은 건.
‘날 바라봐주는 저 동그란 눈길.’
시아가 제게 보이는 관심이었다.
“감사해요. 전하도 오늘 멋있으세요.”
“…정말?”
“그럼요. 황자 전하께서 멋있지 않았던 날이 있었겠어요. 물론 오늘은 좀 더 멋있으시지만요.”
빈말은 아니었다. 헬릭스는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잘생기고 반듯한 사람이었고, 한때 그런 헬릭스를 먼발치에서 동경했던 시아로선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오는 데 힘들진 않았어?”
“저야 편하게 왔는걸요. 헬릭스 전하는 좀 괜찮으세요?”
수국관에서의 사건을 겪은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헬릭스는 정말로 어쩌다 그녀와 갈리프의 만남에 휘말려 버린 피해자였다.
“감기 걸리셨을까 봐 걱정했는데.”
“푹 자고 나니까 괜찮더라. 따뜻한 초콜릿 한 잔에 말이야.”
헬릭스는 시아를 안심시키려는 듯 과장되게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로드 켈튼이 지금 네 쪽으로 가고 있는 신사들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거 알아? 소중한 따님을 쉽게 내어주지 않으시려는 모양이야.”
그제야 저 멀리의 요르문이 다시 보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색하며 손을 흔든다. 시아 쪽으로 향하는 남자들에게 말을 걸고, 콧김을 뿜으며 필사적으로 그들을 붙잡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류 탐지기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기의 목적도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있는 셈이었다.
뭐야, 그런 거였어?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괜찮아? 시아야, 무슨 일이야.”
“아녜요. 암것도 아녜요.”
시아는 눈물을 훔쳤다. 민망해서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다. 요르문 님을 오해한 것도, 황자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인 것도 다 부끄러웠다.
“저 진짜 괜찮아요. 정말로요.”
코까지 빨개져선 훌쩍이며 부인한다. 헬릭스는 시아를 위로할까 하다가, 그녀가 더 민망해할까 봐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녀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무렵이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었다. 만찬이 끝나고 시작된 무도회에 너도나도 나서서 춤을 추고 있었다. 승리에 취한 제국민의 흥분이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고스란히 녹아 분위기를 고양시킨다.
수많은 남녀가 빙글빙글 돈다. 헬릭스와 시아는 그 광경을 나란히 바라보고 있었다.
헬릭스가 시아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켈튼. 그대에게 춤을 청해도 괜찮을까요?”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왔으나, 사실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시아의 댄스 카드에 이름을 적었다.
시아는 헬릭스와 함께 춤을 추기로 했던 약속을 떠올리곤, 내밀어진 손을 향해 마주 손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고 했었다.
“……!”
헬릭스의 얼굴이 하얗게 번져나간다. 엉거주춤 서있는 시아를 보며 당황하는 표정이 새하얀 빛과 함께 엉기며 시야를 장악한다.
‘시간 여행!’
지나치게 빠르다. 일기장에 쓰여있던 것보다 한참은 빨랐다.
하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시간은 거대한 물결이었고, 그녀는 뗏목에 몸을 맡기고 물결이 이끄는 대로 항해하는 여행자에 불과했으니까.
급히 다음 시간 여행 장소를 떠올렸다. 어디였지? 대륙 횡단 비행선? 아니면 버려진 예배당? 그러나 미처 생각해 내기도 전에 시아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부엌데기 소공녀와 키다리 아저씨 】
3520년 4월의 어느 밤.
벌컥, 문이 열렸다.
“헬렌!”
순간 루즈 부인이 기어코 자신을 찾아낸 줄 알고 움츠러들었던 헬렌은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든 소녀를 보곤 화색이 돌았다.
“에밀리,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무도회장 가보니까 없더라. 다들 너 못 봤다길래 여기서 쉬고 있을 줄 알았지.”
에밀리가 키득거렸다. 레이디 밀레이나 로드리치의 저택에서 일할 때도 곧잘 땡땡이를 치던 헬렌이었다. 같은 시기에 저택에 입성한 두 소녀는 어느새 적당히 일을 빼먹을 줄도 아는 연륜 있는 메이드로 자라났다.
“여긴 진짜 넓어도 너무 넓어…….”
“그건 그래. 솔직히 쓸모없는 방이 몇 개야? 손님이 고작 삼백 명인데 방은 오백 개가 넘는다니. 우리만 죽어나가는 거지, 안 그래?”
에밀리가 푸념하며 주저앉았다. 비스듬히 뚫린 창에서 푸른 별들이 모래처럼 빛났다. 수만 피트 위에선 별이 더 크게 보일 줄 알았는데. 쏟아버린 소금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에밀리, 저길 봐!”
때마침 사방에서 알록달록한 불꽃이 터졌다.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아마 값비싼 마정석을 터뜨려 만든 반짝임일 것이다. 제 이름을 건 일엔 언제나 진심인 레이디 로드리치가 큰맘 먹고 계획한 이벤트였다. 황제가 여는 무도회에서도 이렇게나 많은 마정석이 한 줌 재로 산화되진 않을 것이다.
찬란한 빛깔이 젖은 머리칼 대신 뺨에 달라붙었다. 어느새 헬렌과 에밀리는 묘한 감상에 젖어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회장의 신사 숙녀들은 아마 테라스에서 낭만적인 시간을 즐기고 있겠지. 이런 조그마한 방이 아니라.
그래도 하늘을 볼 수 있는 게 어디야. 에밀리는 머릿수건을 잠시 풀어 땀을 훔쳤다.
이곳의 고용인 숙소에는 창이 나있었다. 창문에 세금을 매기는 제국 세법 때문에 대부분의 저택에서 숙식 메이드에게 사방이 막힌 방을 주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방에서 별이며 불꽃을 볼 수 있는 건 흔치 않은 기회였다.
‘이게 다 로렌시아호에 탔기 때문이지.’
레이디 밀레이나 로드리치가 주최한, 로렌시아호에서의 자선 무도회.
주최자부터 무도회 장소까지 무엇하나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제국 사교계에 조금이라도 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듣자마자 참석하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을 무도회였다.
사실 레이디 밀레이나 로드리치는 무도회를 자주 열지 않기로 유명한 귀부인이었다. 밀레이나 본인부터가 그 유명한 밀레이나 돔의 극장주이자 예술감독으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일을 했고, 거기에 클럽 로얄의 위원회장으로서 클럽의 무도회를 주관하는 것만으로도 질리도록 사람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클럽 로얄을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자그마치 오십 여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모르간의 사교 클럽으로, 대여섯의 귀부인이 엄격하게 심사하여 이를 통과한 자만이 클럽 로얄의 티켓을 받을 수 있었다.
티켓이 없다면 클럽을 드나들지 못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설령 어마어마한 기부금을 냈거나 심지어 황족이라 하더라도 예법을 어긴다면, 가령 지각을 한다든가 복장이 불량하다든가 등의 사소한 실수에도 문 앞에서 대차게 쫓겨나곤 했다.
바로 그 클럽 로얄의 위원회장이란 사람이 레이디 밀레이나 로드리치였으니 그 명성이 얼마나 드높을까. 그녀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은 로드리치 저택에서 열리는 티파티 정도였는데, 그 또한 자주 열리지 않아 혼기가 찬 아가씨들의 눈과 귀는 항상 로드리치 저택 쪽으로 열려있었다.
어찌 됐든 그런 위치의 귀부인이 간만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도회를 열었으니 제국이 떠들썩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무도회를 수만 피트 상공의 유람 비행선에서 하겠단다.
그것도 켈튼 코퍼레이션에서 건조된 로렌시아호에서.
호사가들의 이목이 집중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응?”
“고작이라니. 삼백, 아니 정확히는 삼백칠십 명이라고, 에밀리. 많아도 너어무 많아! 로드리치 저택엔 그 절반만큼의 손님도 온 적이 없는데.”
“아직도 그 말을 생각하고 있었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헬렌에 에밀리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벌렁 드러누워 이불보 위로 팔을 휘휘 저었다. 고용인에게 지급되는 이불치고 부드럽고 짜임이 좋았다.
음, 새 이불 냄새. 에밀리가 실실거리며 베개에 코를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