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 *
‘나, 방금 너무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들어버린 게 아닐까.’
요르문은 잠든 것처럼 고요히 사색에 잠긴 갈리프를 내려다보았다. 우주의 시간을 되돌린다느니, 평행 세계가 생겨났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단번에 이해될 리 만무하다. 아니, 머리로는 어떻게 받아들인다고 해도 마음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 옛날의 누님이 갈리프였다고. 지금껏 신화로만 전해 내려왔던 광룡이 아닌, 우주가 생겨날 때 처음으로 태어난 에너지 그 자체였단 말이지.
‘…하.’
식은땀이 절로 났다.
그런 존재가 자신의 딸이었다니. 시간 여행으로 만났던 정체불명의 친척 누님이었다니.
‘…내가 이런 사람을 첫 만남에 실험 대상으로 삼으려 했다고.’
요르문은 새삼 칠십 년 전의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을 했었는지 깨닫고 말았다.
한편 상념에서 깨어난 갈리프는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를 털어놓고 나니 한결 속이 편했다. 이 시대에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니기에 급급했는데.
요르문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내 정체를 밝히면서까지 말이야.
갈리프는 희미하게 웃었다. 총에 관통당한 상처가 거의 아물어 있었다. 이 또한 이 시대의 시아 켈튼이 칠십 년 전의 과거를 바꿔놓은 덕분이었다.
‘…다무스의 봉인을 지켜냈기 때문이겠지.’
힘의 일부가 돌아와 있었다. 애초에 시간을 되돌리며 포기했던 힘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 시대의 시아 켈튼에게로 권능의 일부가 돌아와 있다. 마치 첫 번째 거래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옌이 가져갔던 태고의 어둠을 원위치에 돌려놓은 것처럼.
어둠을 천칭에 올려도 이젠 빛을 돌려받을 수 없을 텐데. 내가 받아야 할 빛은 첫 번째 거래의 대가로 모조리 바쳤었는데.
아무렴 어떠랴. 그 덕에 갈리프는 아르카나 시내의 테러를 겪고도, 수국관에서 카얄의 총을 맞고도 살 수 있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힘이 이 정도이니, 지금 시아 켈튼에겐 어지간한 마법사는 압도할 만한 사도의 마력이 들어차 있을 것이다. 천칭은 이 시대의 시아 켈튼에게는 간섭하지 않는 것일까. 이대로 시아가 봉인을 찾아나간다면 머지않아 그녀는 빛의 주인이 될 터다.
모든 것이 일기장 하나가 만들어낸 변화였다.
해낼 줄 알았어.
역시 똑똑한 아이라니까.
요르문은 그런 갈리프의 감상이 끝나기를 말없이 기다렸다. 부르튼 입술에 걸려있는 미소가 처연하면서도 어쩐지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문득 갈리프가 기대있는 빈 벽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은발 여인의 초상이 걸려있었던 자리였다.
라크시스가 저 초상화를 언제 내렸더라. 은발 여인에 미쳐 술과 샤샤리아를 달고 살던 놈이 돌연 심경의 변화를 겪고 그림을 가차 없이 떼어버렸었지.
아, 기억났다.
‘내 연구실에서 오토마톤의 심장이 폭발한 후였어.’
다친 라크시스가 도망치듯 사라졌을 때, 누님이 얼떨결에 휘말려 갔었다. 그때 라크 녀석이 그랬지. 누님이 초상화에 대해 물었다고. 그날 누님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했다고 그랬었는데.
달빛을 받은 갈리프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빛났다. 그 모습은 초상 속 은발의 여인과 꼭 닮아있었다.
“…누님이 초상 속의 여인이었어요.”
“그래. 내가 그림의 주인공이야.”
갈리프가 후후 웃었다.
“하지만 이제 라크는 그 초상이 필요 없어지게 됐겠지.”
요르문은 대답할 수 없었다. 시아 켈튼은 갈리프였고, 갈리프는 시아 켈튼이었으나 초상의 진짜 주인공은 눈앞의 피투성이 누님이었다. 시간 여행 중인 자신의 딸이 아니라.
라크시스가 고백했어야 할 대상은 이쪽이 아니었을까.
“참 신기하지. 그 애는 더 이상 내가 아닌데. 그럼에도 자꾸 눈길이 간단 말이지. 너도 그렇지?”
“그럴 수밖에요. 당신은 내 누님이기도 했고 딸이기도 했으니까요.”
“후후, 혼란스럽니?”
딸과 똑같은 얼굴을 한 누님이 뭉근하게 웃는다. 한 세기를 훌쩍 넘게 살아온 자신보다도 어른스럽게, 모든 걸 다 알고 있단 표정으로 웃고 있는 모습을 마주하는 게 어색하면서도 못 견디게 민망했다.
정말로 그녀의 동생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서.
요르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조금은요. 아니, 사실 많이요. 시아 켈튼이 둘이라니. 평행 세계가 공존하는 건 불가능해요. 과학으로도 마법으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현상이라고요.”
“네 말이 맞아. 아마 난 머지않아 사라질 거야.”
“네?”
사라진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요르문은 갈리프의 손을 붙들었다. 그녀는 미동 없이 아련한 눈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라진다뇨, 누님. 왜……. 당신은 평범한 인간도 아니면서…….”
“우주는 오로지 하나의 시간선만을 인정하지. 이 세계는 정해진 개수의 별이 들어있는 입구 묶인 풍선과도 같아서, 모든 시간대에는 항상 같은 수의 별을 가지고 있어야만 해.”
“알아듣게 말해줘요.”
“난 규격 외의 존재라는 말이야. 완벽하게 구성된 세계에 끼어든, 균형을 깨뜨리는 불필요한 이물질.”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긴 했다.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지만.
요르문은 덜컥 겁이 났다. 사라진다니. 수명이 긴 마법사의 특성상 평범한 사람들보다 타인의 죽음을 많이 보게 되었고, 요르문은 가까운 누군가가 저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익숙했다. 그럼에도.
‘시아가 날 두고 사라진다니.’
시아 켈튼. 소중한 나의 딸, 친척 누님. 유일한 가족, 위대한 태고의 빛.
요르문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어린애처럼 굴었다.
“궁금하지 않았어? 중세에서 마도 시대로 돌아왔을 때 왜 시아만이 중세 이후에 바뀌어버린 시간들을 기억하지 못했는지.”
“가지 말아요, 누님.”
“현재는 과거에서 비롯되지. 현재가 있다면 과거는 이미 고정된 것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그 애는 과거와 현재를 끝없이 바꿔나가는 존재이지. 그러니 그 어떤 시간도 그 애에겐 고정될 수 없단다.”
“…제발, 누님.”
“모든 시간 여행이 끝나면 시간선은 완성될 거야. 그 애의 기억도 마지막 시간 여행이 끝나면 제자리를 찾게 될 테지.”
갈리프는 그녀의 옆자리를 툭툭 가리켰다. 요르문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갈리프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내가 사라지면 그 아이는 온전한 시아 켈튼이 될 거야. 나와 다르게 그 애는 천칭과의 거래와는 상관없는 존재이니, 봉인을 찾고 나면 별들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천칭과의 첫 번째 거래.
[라크시스 옌의 영혼을 구원하는 대신 신으로서의 모든 것을 대가로 지불한다.]
갈리프는 시간을 되돌리는 대신 권능을 포기했다. 과거를 바꾸고 라크시스를 무사히 구해내도, 두 번 다시 신의 힘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평행 시간선의 또 다른 시아 켈튼은 달랐다. 그녀가 중세에서 봉인을 찾고 어둠을 접시 위에 올리자, 천칭은 그녀에게 빛을 내어주었다.
거래의 대가로 지불했던 바로 그 빛의 권능을.
갈리프는 깨달았다. 자신과 평행 시간선의 시아 켈튼은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그것만 알아둬. 지금 네 저택에서 잠들어 있을 그 아이가 ‘지금’의 네가 아는 누님이자 시아 켈튼이라는 걸.”
갈리프가 열없이 웃으며 요르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잠시 놀라는 듯하다가 이내 그녀의 손길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포근하고도 따스했다.
갈리프가 커튼 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곤 내밀었다.
“이걸 시아에게 전해줘. 똑똑하니까 아마 잘 활용할 거야.”
“이건, 라크가…….”
조그마한 날붙이였다. 어딘가에서 떨어져나온 것처럼 생긴 쇳조각엔 누구의 피인지 모를 자국이 옅게 말라붙어 있었고, 녹슬어 붉게 변했음에도 날은 여전히 예리하여 당시의 참상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었다.
고대 마법사 카얄이 라크시스를 죽이기 위해 사용했던 물건. 요르문은 쇳조각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진 몰랐다. 다만 오랜 벗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보기만 해도 종말의 그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물건이란 걸 알고 있었다.
“괜찮아. 시아도 라크도 분명 무사할 테니.”
라크시스가 이 작은 날붙이에 찔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륙을 짓밟으며 광룡이 나타났다. 포효하는 광룡이 제국을 불태우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때 대기를 채우던 마력이 휘몰아쳤다.
라크시스의 마지막 마법. 고대 마법사라 불리던 이만이 시전할 수 있는 가히 위대한 마법이었다. 몰아치던 마력이 라크시스를 감싸고 그대로 증발했다. 동시에 광룡의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세상을 뒤덮었던 시커먼 구름에서 한 줄기 햇빛이 내려왔다. 이윽고 하늘이 갰다. 언제 광룡이 나타났었냐는 듯, 찬란하고 성스러운 햇빛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축복하고 위로하듯 폐허를 적셨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환호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가운데 라크시스는 싸늘한 시체로 누워있었다.
종말 직후 내 손으로 빼내어 직접 불태워 없앴는데. 갈리프는 대체 이 조각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던 걸까. 그녀가 이걸 시아에게 전해달라고 한다면.
요르문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 조각이 필요할 일이 시아에게 벌어지게 되겠구나.
요르문의 등이 잘게 떨렸다. 갈리프는 가만히 쓸어주며 토닥였다.
“시아를 믿어. 분명 잘해낼 거야.”
* * *
“대체 뭐길래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셨을까.”
키르 해협 전투 승전 기념 연회가 열리는 황궁의 홀. 무도회가 한창이었으나, 시아는 구석에 홀로 숨어서 조그마한 손가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수국관에서의 기묘한 사건이 있었던 바로 다음 날이었다. 요르문도 시아도 쉬고 싶어 했으나, 황궁에 이미 연회 참석 의사를 밝힌 후였다.
‘게다가 요르문 님에겐 애초에 연회에 오려고 했던 이유가 따로 있기도 하셨고.’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요르문은 시아에게 납작한 조각 같은 물건이 든 주머니를 건넸다. 침울해 보이기도, 한편으론 바짝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얼굴로 내민 주머니를 곧바로 열어보지 못하게 했다.
‘과거로 돌아갔을 때 열어보렴. …라크와 함께 말이야.’
이 시대의 요르문 님이 라크시스를 언급한 건 처음이었다.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이게 뭐길래 그토록 망설이며 내게 주신 걸까.
궁금한데. 여기서 열어볼 수도 없고. 애꿎은 손가방만 만지작거리며 먼발치의 요르문을 흘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