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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31)화 (131/292)

131화 

숨이 턱 막혔다. 더 이상 이런 비극은 그만하고 싶어. 시간을 반복하고 나면 늘 그의 시신이 발치에 있었다.

‘광룡이 부활하는 걸 막을 수가 없어. 라크시스가 죽는 걸 막을 수가 없다고. 난 아무것도 모르는 시아 켈튼일 뿐이었단 말이야…….’

눈물이 흘렀다. 무능한 제 자신이 미웠고, 모든 것이 버거웠다. 신이었다면 모를까, 한낱 인간의 몸으론 거대한 운명을 바꿀 수 없었다. 갈리프는 목놓아 울었다.

그때였다.

[거래를 하겠느냐?]

또 한 번의 속삭임. 갈리프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직 갈리프의 귓가에만 들리는 아득한 소리 속에 천칭이 물어온 것이다.

거래. 좋은 줄 알았지. 하지만 더는 아니야.

수천 번도 넘는 회귀 속에서 갈리프는 메말라버렸다. 라크시스의 비참한 죽음을 보는 것도 이젠 그만하고 싶었다.

‘여기서 멈추게 해주십시오. 제발, 천칭이여…….’

[새로운 거래.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

‘…뭐?’

갈리프의 동공이 커졌다.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이라고? 첫 번째 거래를 이뤄내지 못하면 어차피 나는 또다시 시간을 반복해야 할 텐데.

그녀의 의심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또 한 번 천칭의 소리가 들려왔다.

[답은 네게 있으니.]

라크시스를 구하면서도 시아 켈튼이 시간 여행을 무사히 완수하는 방법.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러나 천칭은 의미 없는 말을 흩뿌리는 존재가 아니다. 갈리프는 한참 곱씹어 보다가 퍼뜩 찾아온 깨달음에 벌떡 일어났다.

‘…설마.’

시아 켈튼에게 부족한 건 딱 한 가지. 바로 시간 여행의 목적이었다. 자신이 왜 시간 여행을 하게 됐는지 모르는 채로 과거를 유람했으니 똑같은 결말이 반복되는 것일 터다.

시아 켈튼이 봉인을 지켜 광룡을 막아낼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할 필요도 없다. 광룡의 부활을 막고 라크시스를 구하기만 한다면 반복되는 시간도 끝나게 되겠지.

그러기 위해선 시아 켈튼에게 닥쳐올 미래를 알려줄 존재가 필요했다.

‘평행하는 두 개의 시간선!’

갈리프는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우주가 비틀리고 공존할 수 없는 두 시간선이 겹쳐진다면 가능한 일이겠지요. 제가 그림자가 되어 새로이 시작되는 시아 켈튼의 시간에 간섭할 수 있다면 이 굴레도 끊어지겠지요.’

깨달음과 희열, 예정된 죽음으로 인한 강렬한 감각이 전신을 강타한다. 평행 세계를 만드는 것 역시 우주 밖의 규칙을 이용하는 짓이다.

그런 일을 벌인다면 분명 소멸될 것이다. 지금의 자신은 힘 없는 작은 영혼에 불과하니까. 라크시스가 살아난다 한들 자신은 죽어 없어질 터다. 갈리프로서는 영원히 라크시스를 만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럼에도 갈리프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모든 것을 초탈하여 종국에 기쁨과 후련함만을 남기고 떠나는 사람처럼 허공에 기도했다.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고통받았던 모든 존재들에게 세월을 되돌려 줄 수 있다면.

라크시스를 살릴 수 있다면.

가슴이 복받쳐 오른다. 끓어오르는 것은 감사와 희열의 눈물이었다.

‘이것이 천칭께서 의도하신 바라면 감히 응하겠습니다. 이제 당신께 무엇을 드려야 합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이까?’

갈리프는 허겁지겁 눈물을 닦았다. 재가 묻은 손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도 모르고 자세를 고쳐 하늘을 향해 꿇어앉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거래의 대가로 무엇을 바쳐야 하는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신으로서의 모든 것은 이미 라크시스의 영혼을 위한 첫 번째 거래의 대가로 내어놓았다.

내게 남은 건 고작 인간의 영혼뿐. 첫 번째 거래 때처럼 어마어마한 일을 벌일 수는 없다. 평행 세계가 생겨난들 한낱 그림자인 나는 비틀린 시간의 틈에서 바스라지겠지.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이번 거래가 끝나면 감히 평행 세계를 만들어 두 시간선을 겹친 대가로 내 작은 영혼은 영원히 소멸하고 말 것이다.

어떻게 해야 또 다른 시아 켈튼에게 미래를 알려줄 수 있지? 그녀가 시간 여행을 믿게 하고, 광룡의 봉인을 찾게 만들 방법은 정말로 없는 걸까?

고작해야 인간 수준의 내 영혼 하나를 천칭에 올리고 내가 만들 수 있는 우주의 균열은 어디까지인 거지?

까마득한 우주 저편의 소리가 다가온다. 갈리프는 천칭이 한 발 가까워졌음을 알아챘다.

시간이 없었다. 갈리프는 더러운 손톱을 물어뜯었다. 영혼의 소멸을 대가로 아직 무엇을 바라는지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수준의 거래를 제안해야 천칭이 수락할까.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천칭의 접시가 지척까지 도달했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균형의 진리가 발밑에 펼쳐진다. 사막의 찬란한 모래 더미 같은 영혼들. 천칭의 접시. 최후의 심판대에 오르자 감각이 떨어져 나가며 정신이 몽롱해졌다.

나는 무엇을 바라야 하는가.

내 작은 영혼 하나를 대가로 만들 수 있는 평행의 시간선은 어디까지일까.

폐허 속에서 문득 작은 노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종말을 겪으며 망가진 가방에서 튕겨 나와 펼쳐진, 모든 시간 여행이 기록된 시아 켈튼의 일기장.

‘…그래. 일기장 하나라면.’

갈리프는 잽싸게 일기장을 주워들었다. 죽음이 닥쳐오는 몸뚱이는 점점 호흡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갈리프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고 뚜껑을 입으로 물어 뱉었다. 광룡의 공격으로 몸이 성하지 않아 천칭이 끌어당기면 곧바로 죽고 말 것이다.

갈리프는 황급히 마지막 일기를 갈겨쓰기 시작했다.

[라크시스는 모든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내가 누군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라크가 죽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고대 마법사 카얄이 광룡의 봉인을 모두 파괴해 버렸고, 부활한 광룡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그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의 난 시아 켈튼일 뿐이니까.]

자꾸만 몽롱해지는 정신을 볼을 씹어가며 겨우 버텼다. 코피가 뚝뚝 떨어져 종이 위로 번졌다. 코피를 문질러 닦은 얼굴이 검댕과 뒤엉켜 엉망이었다. 그러나 갈리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행여 일기장이 더러워져 글씨가 보이지 않을까 봐 경련하는 손을 옷에 박박 문질러 닦았다.

시야가 가물거린다.

[이 일기를 3587년의 시아 켈튼이 읽고 있다면, 내 계획은 성공한 거겠지.]

조금만, 조금만 더.

제발 이것까지만.

[부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아 주길.]

마침표를 찍자마자 갈리프는 쓰러졌다. 놓친 펜이 날카로운 선을 긋고 뚝 끊겼다. 그녀가 마지막 문장을 쓰길 기다렸다는 듯 찾아온 죽음이었다.

마침내 그녀의 입에 최후의 들숨이 머금어졌다.

육신을 벗은 용의 영혼은 한 줌 작은 빛알갱이가 되었다. 갈리프는 일기장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천칭에 올랐다.

천칭이 이 정도로 높았던가. 고개가 꺾일 정도로 아득한 꼭대기에 매달려 접시는 여상히 기울었다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빛에 휩싸인 손끝부터 먼지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갈리프는 퍼뜩 놀라 껴안고 있던 일기장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일기장은 사라지지 않고 멀쩡히 남아있었다.

‘하, 하하…….’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이젠 두 번 다시 세상을 볼 수 없겠구나. 라크시스를 영원히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이젠 또 다른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닌 시아 켈튼이 과거를 여행하게 될 것이다. 나비의 날갯짓과 다름없는, 일기장이라는 작은 단서 하나를 가지고.

그러나 시아 켈튼은 잘해낼 것이다. 똑똑한 아이니까. 일기장에 적힌 미래를 본다면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아차릴 터다.

그녀라면 폭풍 같은 변화를 만들 수 있겠지. 라크시스의 죽음을 막고, 그와 행복한 삶을 살아나가겠지.

그녀는 나고, 나는 그녀일 테니까.

‘잘 부탁해. 시아 켈튼.’

허공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마침내 갈리프는 사라졌다. 그녀를 이루던 빛알갱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광룡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천칭 앞에 섰던 라크시스의 영혼처럼, 갈리프의 영혼도 우주 밖의 규칙을 이용한 대가로 영원히 소멸하고 말았다.

갈리프(Galipe).

태고부터 존재하던 최초의 빛이 사라지리라곤 우주조차 몰랐을 것이다.

별이 울었다. 별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태고의 어둠, 카얄은 형제의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빛의 주인이 사라졌으니 우주는 곧 균형을 잃고 종말을 맞이할 터. 카얄의 배 속에 갈리프가 두고 간 빛이 모두 소화되고 나면 남겨진 별들은 곧 어둠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어둠만 남은 우주는 머지않아 영원히 얼어붙어 잠들게 되겠지.

절규하는 별들 속에서 천칭이 기울었다. 별들은 문득 울음을 그치고 천칭을 바라보았다.

급격하게 기울어져 있을 줄 알았던 천칭이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천칭이 그대로 돌아온 것이지? 갈리프가 죽었는데. 더는 빛의 창조주가 없는데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

와글거리며 목청껏 외쳐대는 은하 속에서 천칭이 말했다. 천칭이 잔잔히 기울며 균형을 맞추는 소리가 마치 희미한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균형을 수호할지니. 별이여. 우주의 모든 존재여. 감히 내가 무게를 달 수 없는 것이 우주에 있노라.]

이윽고 천칭이 매달린 꼭짓점에서 또 하나의 시간선이 흘러들어 왔다. 우주의 안팎을 잇는 유일한 통로가 여닫힌다. 갈리프의 염원으로 우주의 밖에서 흘러들어 온 시간선은 별을 휘감고 모든 은하를 따라 흐르며 우주를 에워쌌다. 별들이 아우성치는 가운데 돌연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광활한 우주. 운명의 톱니바퀴가 돌아간다. 아르카나 광장 시계탑의 종소리를 닮은 소리가 뎅뎅 울려 퍼졌다.

다시 한번 시간이 되돌아가고 있었다.

스물 여덟의 시아 켈튼이 처음 시간 여행을 하던 그날로.

수조 개의 톱니바퀴가 포화 같은 소리를 우주에 쏟아내며 거대한 시계를 되돌린다. 되돌린 시간에 휘감긴 시간선 위로 또 다른 시간선이 겹쳐 들고 있었다.

영사기에 새로운 필름을 감아 돌리듯, 평행의 시간선은 시간 여행의 시작점에서 새로운 영화를 펼치기 시작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시아 켈튼이었다. 어쩌다 참석한 동창회에서 미래가 적힌 일기장을 받게 된 시아 켈튼.

그런 그녀의 시간 여행에서 대역을 맡게 된 건, 갈리프로서의 삶을 지내왔던 또 다른 시아 켈튼이었다.

원래였다면 평행의 시간선을 청한 대가로 곧바로 소멸했어야 할 갈리프의 영혼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살아남았다. 물론 그녀에게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어쨌든 갈리프의 영혼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건 뜻밖의 일이었다.

천칭은 미소 지었다.

우주를 움직이는 건 균형과 질서이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주 밖, 천칭조차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철리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갈리프에게 유예를 주지 않았을까.

[그것은 염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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