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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30)화 (130/292)
  • 130화 

    “…그렇다면 연회는.”

    “춤은 같이 춰요. 첫 번째는 부담스럽지만요.”

    결혼 적령기의 황자와 첫 춤을 출 순 없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사교계의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아쉽네.”

    헬릭스는 천천히 일어났다. 꿇었던 무릎께에 새카맣게 검댕이 묻어있었다.

    “죄송해요.”

    “죄송하긴. 대신 종종 연락해도 될까?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먼저 연락해도 좋고.”

    시아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친구, 로서 말이죠?”

    “그럼. 오늘처럼 도움이 필요할 때가 생기면 언제든 황궁으로 연락해.”

    “전하께는 두 번 다시 이런 고생 안 시킬 거예요. 황자를 이런 식으로 굴리는 국민이 어디 있어요.”

    헬릭스는 시원하게 웃었다. 그가 호탕하게 웃는 걸 보니 한시름이 놓였다.

    하지만 뒤이어 찾아온 어색함은 피할 수 없었다. 좋게 돌려 말했어도 헬릭스를 거절한 건 맞으니까. 괜히 헛기침만 하던 와중에, 타이밍 좋게 요르문이 시아를 멀리서 찾았다. 시아는 반색하며 얼른 움직였다.

    “저 먼저 가볼게요. 아버지가 부르셔서.”

    “이젠 아버지라고 부르는구나.”

    “…네. 어쩌다 보니 조금 늦었지만요.”

    저 진짜 가요! 시아가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헬릭스는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주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가. 시아야.”

    품에 안은 담요에서 시아의 향이 났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저녁 바람에 실려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마치 떠나간 그녀처럼.

    보좌관 레논이 허둥거리며 달려왔다. 황궁에서 급히 찾는다는 전갈이었다.

    “폐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무사하신지, 어서 얼굴을 보고 싶으시다고…….”

    헬릭스는 담요를 레논에게 건넸다.

    “가자.”

    “이건 어떻게 할까요?”

    황자가 건넨 건 경찰 측에서 제공한 모포였다. 버리라고 주신 건가. 이런 건 경찰에 돌려줘야 하나.

    레논이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찰나였다.

    “방에 놔둬.”

    “예?”

    헬릭스는 웃고 있었다.

    “초콜릿이 생각나는 날에 덮을 거니까.”

    * * *

    자정이 넘은 시각. 켈튼저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늦으셨군요.”

    주인의 귀가가 늦었다. 헤이든은 등불을 들고 조용히 요르문을 맞이했다.

    요르문은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멈칫하고 말았다.

    “시아는?”

    “진작 잠드셨습니다. 미열이 있으시기에 주인님 서재의 회복석을 가져다드렸습니다만.”

    “잘했어. 고마워.”

    참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난데없이 황궁에 찾아간 주인님과 아가씨가 갈리프도흐 기숙사에서 벌어진 테러에 휘말리지 않나. 칠십 년 전의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가진 주인님이 돌연 라크시스 옌의 저택에 방문하겠다고 나서시지를 않나.

    발단은 아마 아가씨일 것이다. 헤이든은 요르문과 시아가 마도 시대의 이야기를 하다가 각자 방에 틀어박혀 버렸던 것을 기억했다.

    아가씨께서도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 두 분은 진정으로 서로를 아끼는 가족이니 말이다.

    “…괜찮으십니까.”

    “그럼. 괜찮고말고.”

    헤이든은 요르문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하나도 괜찮지 않은 얼굴이다. 그러나 요르문의 속내는 달랐다.

    과거를 마주하려 방문한 저택에서 그가 누구를 봤는지. 무엇을 들었는지. 아마 헤이든은 말해줘도 믿지 못할 것이다.

    요르문은 어색하게 웃으며 주머니 속 날붙이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아직도 저택에 남아있었다니.

    남아있었을 리가 없다. 라크시스의 시신을 수습할 때 이 손으로 직접 빼냈고, 불타 없어지는 것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헤이든. 자네도 이만 들어가 쉬어.”

    “…예. 알겠습니다.”

    요르문은 주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헤이든을 얼른 방으로 돌려보냈다.

    드디어 혼자가 됐다. 요르문은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신하곤 텅 빈 응접실에 천천히 쭈그려 앉았다.

    요르문은 주머니에서 조각을 주섬주섬 꺼냈다. 달빛을 벗 삼아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모양새의 조그마한 날붙이엔 피가 말라붙어 녹이 슬어있었다. 손바닥만 한 이 볼품없는 쇳조각은 바로 라크시스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물건이었다.

    종말의 날. 고대 마법사 카얄이 라크시스를 이 조각으로 찔렀고, 라크시스는 회복을 포기한 채 시아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고대 마법사의 방대한 마력과 회복력을 생각하면, 고작 이런 날붙이에 죽어버렸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시아에게 전해줘. 똑똑하니까 아마 잘 활용할 거야.’

    마도 시대의 시아 켈튼. 그의 친척 누님이자 양딸이자, 이젠 갈리프로서 자신을 마주했던 여인이 바로 그 조각을 제게 건넸다.

    ‘괜찮아. 시아도 라크도 분명 무사할 테니.’

    “누님, 대체…….”

    어둑한 창밖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요르문은 복잡한 심정으로 한참 동안 조각을 쥐고 있었다.

    * * *

    두어 시간 전. 세레타 지구 외곽.

    근 이십 년 만이었다. 라크시스의 저택은 언제나 그랬듯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시아를 입양하고 정붙일 가족이 생긴 후엔 찾아오지 않았던 곳이다. 과거의 슬픔을 고스란히 묻어두고는 부러 걸음을 뜸하게 했다.

    “오랜만이네. 라크. 자네는 잘 지냈는가?”

    수풀 우거진 장미 정원 가운데엔 라크시스의 비석이 있었다. 관리하는 사람을 따로 두었는데도 장미 정원은 라크시스가 살아있을 적만 못했다.

    홍차 향이 날 것만 같았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장미 내음에 오랜 친구의 웃음소리가 묻어나는 듯했다.

    요르문은 라크시스의 이름을 조용히 쓸어보며 한참을 비석 앞에 앉아있었다.

    이윽고 요르문은 저택에 들어섰다. 먼지 한 톨 없이 관리된 저택은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쓸쓸하게 보였다. 중앙 계단을 올라 이 층의 어느 방 앞에 선 요르문은 품에서 새 장식이 달린 황동 열쇠를 꺼냈다.

    은발 여인의 초상화가 걸린 방이었다.

    다른 곳은 사용인에게 맡겨두었으나 이 곳만큼은 아무도 드나들지 못 하게 했다. 주인 잃은 지 오래된 방이니 차라리 관리를 맡기는 게 여러모로 편했을 텐데.

    요르문은 본인이 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스스로도 이유를 몰랐다. 평생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완벽한 신사로 살아온 라크시스에게도 약한 부분이 있었다는 걸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오래된 열쇠 구멍에 황동 열쇠를 끼워 돌리던 순간이었다.

    “…열려있잖아.”

    잠금장치는 이미 풀려있었다. 손으로 툭 건드린 문이 녹슨 경첩 소리를 내며 열렸다.

    요르문은 뒤늦게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발견했다.

    ‘누구지?’

    감히 라크시스의 저택에 숨어들다니. 그것도 금지된 방에.

    고요하게 분노하는 요르문의 주위로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핏자국의 주인은 필시 이 저택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 저택의 주인이 죽은 것도, 이 방에 관리인이 드나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대담하게 기어들어 온 것이겠지.

    쥐새끼 같은 놈.

    요르문은 동그랗게 떨어진 피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커튼 뒤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불청객은 요르문이 온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한 손에 마력을 모은 채 다른 손으로 커튼을 거칠게 잡아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아.

    요르문은 희게 질려 주춤 물러섰다. 그가 본 건 피투성이가 된 시아 켈튼, 갈리프였다.

    “…네가 여기 오는 건 처음이네.”

    갈리프가 희미하게 웃었다. 요르문은 무의식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에 있는 건 제 딸이 아니라, 오래전 과거에서 만났던 친척 누님이라는 것을.

    “당신이 진짜 누님이로군요.”

    “후후, 그 애도 네 누님이긴 하지.”

    요르문은 황급히 주저앉아 갈리프의 상처를 확인했다. 총상이 분명한데 놀랍게도 아물어가고 있었다. 마치 죽은 라크시스처럼.

    “…누가 이랬어요. 누가 누님을 이렇게 만든 거예요?”

    그녀에게서 낯선 분위기가 느껴졌다. 시아와 똑같이 생겼으나 시아가 아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갈리프는 대답 대신 중얼거렸다.

    “난 어쩌면 벌을 받고 있는 걸지도 몰라. 끝없이 시간을 반복하다 보면 닳아 없어지는 기분이 들거든.”

    그녀는 라크시스보다 더 까마득한 옛날을 회상하는 중이었다.

    속죄하겠노라 다짐했었다. 모든 것을 잃고 나니 스스로가 얼마나 모자란 신이었는지 깨달았다.

    천칭에게 청했던 거래 역시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자신의 멍청한 선택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반복하실 겁니까.’

    또다시 라크시스가 죽어버린, 이젠 얼마나 반복되었는지 모를 어느 시간 속.

    갈리프는 폐허에서 울부짖었다.

    ‘라크시스의 영혼을 구원할 때까지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시간을 되돌려 봤자 달라질 게 무엇이 있다고…….’

    ‘그가 죽고 나서야만 저는 갈리프가 됩니다. 라크가 죽어버리고 대가로 바쳤던 제 힘이 돌아와야만 기억이 되살아난다고요.’

    라크시스의 구원을 대가로 내걸었던 신으로서의 모든 것. 거기엔 지금까지 갈리프로 살아왔던 모든 시간과 기억도 포함되어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 다시 한번 시아 켈튼으로 살아가며 시간 여행을 한다 한들 소용이 없었다. 시아 켈튼에게는 갈리프로서의 힘도 기억도 없었으니까. 광룡이 어떻게 다시 부활했는지, 라크시스가 왜 죽음을 자처했는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감히 우주의 법칙을 어그러뜨리려 한 벌을 이렇게 받는 걸지도 몰라. 이미 소멸한 사람,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발버둥 친 죗값을 평생 치르는 거겠지.

    갈리프는 라크시스의 시신을 끌어안았다. 아름답던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카얄이 그의 심장에 꽂은 서늘한 칼날이 눈에 익었다.

    오래전, 미옌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사용했던 천칭의 접시 조각이었다.

    내가 죽고 난 이후 미옌은 이걸 줄곧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지.

    미옌의 증오가 작은 파편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날 얼마나 증오했을까. 라크시스를, 내가 멋대로 구해버린 이 남자를 얼마나 미워했을까.

    미옌에게 심장을 꿰뚫리기 전, 라크시스는 분명 미옌이 들고 있던 천칭의 조각을 알아보았다. 내겐 옛날 기억이 없다고 해놓고, 그는 갈리프를 죽인 작은 날붙이를 알아보았다.

    그럼에도 라크시스는 제게 달려드는 미옌을 피하지 않았다.

    사랑은 약점을 만든다. 라크시스는 어쩌면 자신의 최후를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죽어가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갈리프는 그저 하염없이 라크시스의 얼굴을 보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광룡을 막기 위해 대륙의 모든 마력과 제 영혼을 바친 남자의 머리칼은 이제 어둠보다 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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