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27)화 (127/292)

127화 

그러나 갈리프는 살아있었다. 세월을 견디며 마침내 끝까지 자라난,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나 그만큼 단단해진 고목은 새순 돋는 계절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빈 왕좌를 지키며 살아가겠습니다. 모습조차 갖추지 못한 그 사람의 자리를, 제가 저버린 첫째의 자리를 닦으며 살아가겠습니다.”

툭.

발치에 동그란 물 자국이 번져나갔다.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에 용암 같던 마음을 실어 보낸다.

달구어졌던 머리가 천천히 식어간다. 갈리프는 가슴에 손을 얹고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께 돌아갈 영혼은 이제 제 손을 거둘 것입니다.”

그 순간이었다.

시야가 저편에서부터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이다 넘어졌다.

모여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차 희미하게 들렸다. 속이 울렁거렸다. 익숙한 감각이다.

시간 여행의 시작이었다.

“잠시만요, 저는 이미……!”

갈리프는 허우적거리며 외쳤다. 천칭이 기우는 금속성 소음 너머로 태엽 되감기는 소리가 차르르 들렸다. 마침내 철컥, 하고 태엽이 맞물리자 괘종시계의 묵직한 추가 운동을 시작한다.

기묘한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거래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갈리프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속죄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했는데……!”

새하얀 빛이 망막 안에 가득 들어찼다. 갈리프는 저항할 수 없었다. 까무룩 정신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음성이 잔상처럼 남았다.

[다시 시작되리라.]

* * *

‘…어쩌면 이번에는.’

수국관 4025호의 시아 켈튼은 상처투성이였다.

의술원에서 급히 도망쳐 나온 탓이다. 마법 덕분에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러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폭발의 여파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땐 시아 켈튼을 알아보는 이가 많은 의술원의 병실 한구석에 누워있었다.

이래선 안 됐다. 이곳의 시아 켈튼은 제가 아니라 이제 막 중세에서 돌아올 또 다른 자신이었다. 괜히 자신이 오해를 사서 이곳의 시아 켈튼이 곤란해지는 일은 없어야 했다.

무엇보다 중세에서 돌아온 시아 켈튼과 마주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병실의 기계를 꺼버리고 곧장 빠져나왔다. 이 정도면 잘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꼬리를 밟힌 모양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곳의 시아 켈튼이 황자와 함께 공사 중인 수국관에 찾아왔다.

눈치챈 건 아니겠지. 창문 너머로 내려다본 시아 켈튼은 파릇한 시간 여행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의지와 힘이 깃든 그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기특하면서도 동시에 씁쓸했다.

라크시스를 잃고 홀로 살아남아 또다시 시간이 반복되기를 기다리면서 제 마음은 이미 닳을 대로 닳아버렸으니까.

그래도 일기장 하나를 건넸을 뿐인데 많은 것이 바뀌어왔다. 그녀가 인지한 시간의 변화가 벌써 수만 갈래였다. 아직까진 광룡이 부활해 마도 시대가 멸망한 일이 역사 속에 그대로 못 박혀있었다. 하지만 다무스가 지켜낸 봉인을 이 시간대의 시아 켈튼은 무사히 지켜냈다. 게다가 라크시스가 카얄을 피해 미리 빼돌린 봉인 또한 여러 개였다. 이번 시간대에 부활한 광룡도 지금까지 반복되었던 시간에 비해 많이 약해져 있었다. 시아 켈튼이 남은 시간 여행을 무사히 마친다면, 어쩌면 광룡은 부활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번엔 라크시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를 살리고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드디어 만나는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4025호의 시아 켈튼, 아니 갈리프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엔 그녀의 첫 번째 사도, 미옌이 서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미옌은 저처럼 고생을 많이 한 듯 보였다. 목덜미에 자리한 짙은 화상 자국은 자신이 시간 여행을 할 땐 없었던 흉터였다.

이 시간선의 시아 켈튼이 과거를 바꿔서 생긴 결과였다. 갈리프로서의 기억이 없었던 시아 켈튼일 때엔 광룡인 그를 죽도록 증오했는데.

중세의 다무스에서 형벌을 받다 생긴 흉인가 보다. 천사 같은 외모에 썩 어울리지 않은 화상 자국이 이젠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네가 살아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럼 제가 당신을 죽일 거란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미옌. 이제는 스스로를 카얄이라 칭하는 사도가 천천히 총을 겨눴다. 품에서 꺼내는 시늉조차 없는 걸 보니 애초부터 그녀를 쏘려고 준비해 온 모양이다.

하긴, 이미 여러 번 죽이려고 들었지. 이번 아르카나 시내에서 벌어진 테러 역시 날 노리고 녀석이 저지른 짓이니까.

“시아 켈튼. 아니, 갈리프.”

카얄의 손가락이 해머 위를 미끄러져 갔다. 철컥. 약실이 돌아가고 시커먼 총구가 상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다.

쇠비린내가 나는 검은 구멍은 카얄의 마음을 잠식시킨 어둠 같았다.

그가 어둠을 섬기게 된 건 아마도 나 때문이겠지.

입맛이 썼다.

이젠 도망갈 곳도 없었다. 설령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한들 카얄은 또다시 저를 죽이러 쫓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젠 도망치는 것도 그만할 때였다.

갈리프는 천천히 카얄을 향해 다가갔다. 마침내 그녀의 이마가 차가운 금속 구멍에 툭 닿았다.

갈리프는 그녀를 쏴달라는 것처럼 총구를 머리에 댄 채 가만히 있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카얄이 움찔거렸다. 갈리프는 힘겹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만하자. 너도 지치지 않았니.”

카얄의 눈동자가 떨렸다.

방아쇠만 당기면 당장 죽여버릴 수도 있다. 총알 하나로 저 동그란 머리통은 산산조각 나겠지. 지금의 갈리프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니까.

갈리프의 손을 내려다보는 사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비웃는 것 같다가도 울듯이 입술을 깨물던 카얄은 내밀어진 손을 비정하게 쳐냈다.

“모든 게 당신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공명정대하고 무결한 신인 척했으면서! 왜, 왜! 날 그 꼴로 만들고 죽이려 든 거냐고!”

카얄은 울부짖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 같은 비참한 얼굴을 하고는 총을 내팽개쳤다.

곧장 갈리프의 멱살을 붙잡아 올렸다. 상처투성이인 시아 켈튼의 몸뚱이가 맥없이 끌려왔다.

“선악? 심판? 당신의 세계는 모두 거짓이었어. 가엾은 영혼을 속이고 사도를 눈먼 위선자로 만들었지. 난 단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 정의에 따라 심판을 했을 뿐이었어.”

그렇게도 미워하던 갈리프가 한 줌 갈대처럼 맥없이 흔들렸다. 위대한 태고의 신이 이리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 고작 자신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다니.

“그런데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당신의 법칙을 어그러뜨린 날 잔인하게 버렸지. 사도의 권능을 빼앗고 어둠에 던져넣었잖아, 안 그래?”

카얄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볼품없어진 제 몸뚱이를 조소했다. 갈리프가 사랑하던 모든 것을 파괴하려 했으나, 역으로 모든 것을 잃은 건 자신이었다.

사도의 자격. 사랑하는 여덟의 형제들. 나의 신. 이젠 어둠에게조차 버림받고 인간처럼 이 땅을 떠돌고 있었다.

난 대체 무엇을 위해 이 지경까지 왔는가?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무한한 어둠 속에서 난 줄곧 당신에게 용서받길 기다렸어. 그 춥고 외로운 곳에서 당신만을 기다렸다고. 창조주에게 버림받는 기분을 알아? 난 정말로 당신을 경외하고 사랑했어. 태고의 빛, 그 파편으로 태어나 오로지 당신의 뜻만을 따르고자 했었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미안한 표정을 짓는 갈리프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이럴 거면 애초에 왜 날 버린 건가.

이제 와 그런 눈으로 바라볼 거면 왜 날 저버린 거냐고.

“…어떻게 인간 따위에게 사도의 자리를 주려고 한 거야. 입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갈리프. 감히 인간 따위에게 내 빈자리를 주려고 했느냔 말이야!”

“…네 자리는 그대로 남겨두었어. 난 널 버린 적이 없단다.”

탕―!

총성이 울렸다.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카얄이 갈리프를 내던지고 총을 주워 쏴버린 것이었다.

갈리프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벽에 기댄 몸에서 하염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탕, 탕탕―

분풀이에 가까운 총질이었다. 빈 약실이 쩔꺽거릴 때까지 방아쇠를 당긴 카얄은 치명상을 입고도 목숨이 붙어있는 갈리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엔 핏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희미하게 미소를 띤다.

“미옌.”

“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외침과 동시에 얼음이 치솟았다. 차가운 불꽃. 서대륙 전쟁에서 제국군의 참호를 초토화시켰다던 바로 그 불꽃이었다.

마구잡이로 치솟는 얼음에 수국관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사 지지대로 세워둔 파이프들이 맞부딪혀 챙챙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졌다. 마루를 찢으며 솟구친 얼음이 창문을 부수자 유리가 사방으로 날았다.

“난 당신이 준 이름을 버렸어. 난 이제 어둠의 사도, 카얄이라고!”

어디서 나는 건지 모를 경보 소리가 4025호에 쨍하니 울려댔다. 불길처럼 흔들리는 얼음이 갈리프의 피부를 사정없이 찢었다. 그럼에도 갈리프는 신음 한번 없이 카얄의 마법을 받아냈다.

“…난 너를 미워한 적이 없단다.”

그녀가 괴로이 웃는 꼴이 짜증 났다.

날 미워한 적이 없다니. 다 거짓말이다.

당신은 이미 한 번 날 버렸지. 그 미소는 다 거짓말이잖아.

“…하, 거짓말 마! 지금도 죽이고 싶잖아. 내가 당신의 세상을 멸망시켰어. 내가, 이 내가! 당신이 사랑하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렸다고!”

카얄은 지척에 솟은 얼음을 부러뜨려 갈리프를 향해 냅다 내리찍었다. 송곳 같은 얼음이 그녀의 손바닥을 관통해 벽에 꽂혔다.

의술사의 생명은 이제 끝이다. 갈리프가 처음으로 신음하자 카얄은 비릿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의 얼굴을 맞닿을 듯 자세히 관찰했다. 갈리프가 괴로워하는 걸 똑똑히 보고 싶었다.

그러나 갈리프는 덜덜 떨면서도 참고 있었다.

“이래도 날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 이제 솔직해져 보는 건 어때? 당신은 불완전한 신이잖아. 모든 것을 초월한, 공정하고 대단하신 창조주가 아니었잖아!”

초점을 잃어가는 갈리프의 눈동자에 카얄이 고스란히 비쳐들었다. 그녀의 동공에 물막이 맺히고, 이지러지는 제 모습을 보자 속이 울렁거렸다.

갈리프가 울고 있었다.

“차라리 내게 침이라도 뱉으며 저주하라고. 당신의 피조물을 죽이고, 당신의 세상을 파괴한 나를 증오한다고 말해!”

치솟던 짜증이 불편하고도 뜨거운 것으로 변해 용암처럼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자국마다 새카맣게 타들어 간 마음 사이로 오래전 응어리진 감정이 모습을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