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갈리프는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칭으로 향했다.
한낱 영혼의 모습으로 마주한 천칭은 심판대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제 몸과 똑같은 크기의 빛이 사막의 모래알처럼 끝없이 와글거리고 있었다.
광활한 접시 위에 스스로 올라 제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의 차례가 되었을 때였다.
균형에 이상을 감지한 천칭이 불안정하게 좌우로 기울기 시작했다. 인간만 한 영혼에 담긴 태고의 권능 때문이었다.
갈리프는 귀가 찢어질 듯한 금속성의 소리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까마득히 먼 우주 어디에선가, 천칭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고, 그녀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선 하염없이 기우는 것을 반복하며 묻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면서도 묻는다. 불가능한 소망을 빌었다는 걸 천칭은 분명 알고 있을 터다.
[작은 영혼은 네 창조물을 지키기 위해 영원한 소멸을 택했다. 일개 별의 힘으로 균형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
맞는 말이었다. 사실 라크시스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미옌이 광룡의 힘을 고스란히 되찾아 부활했다면 아마 신과 같은 강한 존재가 되었을 터. 도박에 가까운 거래를 천칭에 제안하지 않고는 미옌을 막을 수 없었을 터였다.
라크시스를 만나기 이전의 갈리프였다면 균형을 위한 사도의 희생을 그저 최선의 방법이었다며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갈리프는 달랐다.
[덕분에 너의 대지는 무사한데도.]
“…이젠 대지보다 더 소중한 것이 생겼으니까요.”
갈리프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결국 천칭은 타협점을 찾아 제안했다.
[라크시스 옌의 영혼을 구원하는 대신 신으로서의 모든 것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할 텐데.]
“…그건 이미 내어놓기로 마음먹었으니 상관없습니다.”
언어로 구성되지 못한 목소리가 뇌리에서 울려 퍼진다. 천칭과의 대화는 태고의 빛인 갈리프에게도 힘겨운 일이었다.
식은땀이 뚝뚝 흘렀다. 육신이 겪던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이다.
[우주 밖의 규칙을 끌어오는 일에는 치명적인 대가가 따르노니.]
우주 밖의 규칙이라니. 그것은 갈리프에게도 관할 밖의 영역이었다. 갈리프는 맹렬하게 천칭의 말을 해석했다.
삶은 죽음으로, 과거는 미래로. 자연의 순리였고 천칭의 법칙이었으며 이 우주에 속한 모든 것들은 이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주 밖의, 우주보다 더 큰 세상의 논리를 적용시킬 수 있다면?
인간의 밀알만 한 뇌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주 밖 별천지의 철리를 이용할 수 있다면.
가령 라크시스가 아직 살아있을 때로 돌아가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설마 시간을 거스르게 해주겠다는 걸까.’
천칭은 매우 위험한 제안을 하고 있었다. 시간을 역행하는 건 금기된 일이었다. 과거로 돌아갔을 때 발생하는 수많은 패러독스와 과거의 본인을 만났을 때 벌어지는 충돌은 갈리프의 존재 자체도 위험하게 만들 수가 있었다.
정신이 찢겨나갈 수도 있고 동 시간대의 도플갱어 중 하나가 영영 사라질 수도 있다.
지금껏 시간이 되돌려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 결과는 예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갈리프는 수락했다.
라크시스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것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갈리프의 영혼은 녹아내리기 직전이었다. 권능을 담았다고는 하나 이미 너절해질대로 너절해져 인간과 다름없게 된 연약한 영혼은 천칭의 거대한 힘을 질기디질긴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아득해지는 시야 너머로 끊임없이 기울어지는 바닥이 보였다. 그녀 때문에 불안정해진 천칭의 접시가 대답을 재촉했다.
고민은 필요 없었다. 갈리프는 산화되는 정신을 느끼며 이렇게 말했다.
“거래하겠습니다. 천칭이여.”
* * *
천칭과 거래한 후 갈리프는 또다시 종말 이후의 시아 켈튼으로 되살아났다. 길거리에서 발견되어 고아원에 가게 되고, 요르문 켈튼의 눈에 띄어 입양되면서 갈리프도흐를 졸업해 의술사로 살아갔다.
모든 것이 인간으로서의 첫 번째 생과 같았다. 스스로 앓아 죽으며 천칭을 향해 돌진하기 전까지의 삶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었다.
다만 모든 기억이 사라진 채였다.
자신이 갈리프였다는 것도, 라크시스를 만나기 위해 천칭과 거래했다는 것도 모두 잊은 채 평범한 인간으로 살았다.
갈리프는 완벽하게 시아 켈튼이 되어있었다.
그러던 스물여덟의 어느 날, 시아 켈튼은 돌연 칠십 년 전의 과거로 떨어지게 된다.
‘…깨어나신 거 알고 있습니다.’
먼지투성이의 인부 쉼터와 어울리지 않는 순백의 마법사였다. 밖에선 폭죽이 터지고 아르카나 중앙역의 첫 삽을 축하하는 환호성이 터졌다.
그곳에서 그녀는 라크시스 옌을 처음 만났다.
시간도 장소도 불규칙적인 시간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도착지엔 언제나 라크시스 옌이 있었다.
오만하고 귀족적이며 아름다운 마법사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홀렸다고 해도 좋았다. 그는 장난스러우면서도 다정했고, 언제나 그녀를 눈에 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모두들 그가 아직 죽은 옛 연인을 잊지 못했다고 입을 모아 말했는데.
어느 날, 시아는 자신을 향한 라크시스의 눈빛이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시아 켈튼은 라크시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지.’
시간을 되돌린 것이 무색하게도 라크시스는 또다시 부활한 광룡을 막다가 죽어버렸다.
그것도 시아 켈튼과 그녀가 사랑한 피조물들을 지키다가.
‘라크. 이렇게 죽어버리면 내가 고맙다고 할 것 같아? 난 너만 있으면 되는데, 너만 살아있으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치를 만한 대가라고 생각하는데.’
라크시스는 마지막으로 환하게 미소 지으며 천칭으로 향했다.
‘사랑했어, 그리고……. 사랑해. 시아.’
그가 광룡을 저지하고 영원한 소멸을 맞이한 후, 시아의 머릿속엔 갈리프로서의 기억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시계추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래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아주 천천히, 권능이 돌아오고 있었다. 미옌이 태고의 어둠을 얻기 위해 천칭에 바쳤던 제힘이었다. 광룡이 죽고, 광룡의 어둠이 태고로 돌아가면서 그녀의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갈리프로.
창조의 권능을 가진 태고의 빛으로.
하지만 난 이미 시간을 되돌리는 대가로 신으로서 모든 것을 내어놓았는데. 라크시스를 구하는 대가로 나의 모든 것을 천칭에 올렸는데.
평생 검붉은 색으로만 알아왔던 머리카락에 차가운 달빛이 돌았다. 갈리프의 힘을 상징하는 은발이었으나,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이 힘이 돌아왔단 건 천칭과의 거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라크시스는 또다시 영원히 소멸되어 버렸고.
그건 결국 내가 라크를 구하지 못했단 말과 같잖아.
“…이대로 끝인가요.”
차라리 기억이라도 지워주지. 라크시스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갈리프로서의 과거 따윈 영영 잊고 살게 해주지.
마음을 채 고백하지도 못하고 라크시스를 떠나보낸 시아 켈튼으로 살게 해주지.
“정말로 이게 끝인 거냐고…….”
갈리프는 한순간에 삶의 목적도 이유도 잃었다.
바스러져 폐허가 된 아르카나 광장에 넋을 잃고 앉았다. 조각나 쓰러진 동상이 마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잿더미 속의 은발 여자는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종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구원자가 나타났다며 웅성거렸다. 라크시스 옌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안심하기까지 한다.
아우성이 피부에 달라붙어 머릿속에 왱왱 울린다. 라크시스 옌이 죽었어! 어떡하지? 여길 봐, 고대 마법사야, 은발이라고! 광룡이 나타났을 때 같이 싸우지 않고 뭐 한 거야? 라크시스 옌이 죽어갈 때 어디서 뭐 한 거냐고.
아무렴 어때. 광룡은 죽었어. 앞으론 이 사람이 우릴 지켜주겠지.
이 여자도 신의 사도라는 고대 마법사일 테니까!
갈리프는 그 모든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헛웃음이 났다.
“하, 하하…….”
미칠 듯이 괴로웠다. 예리한 칼날로 심장을 후벼파고 여린 속살을 지옥 불에 집어넣은 것만 같았다. 가슴을 마구 쥐어뜯는데도 타는 듯한 아픔이 사라지지 않는다.
양심이라는 불벌레가 심장을 헤집고 머릿속에서 깔깔거렸다.
너도 미옌이랑 똑같아. 첫째에겐 그토록 모질게 굴곤 인간을 사랑하다니. 저토록 이기적인 존재들을 위해 널 가장 따르던 미옌을 내버린 거야.
그래서 벌을 받은 거야. 네 죗값까지 라크시스가 모조리 짊어진 거지.
아하하하, 불쌍한 갈리프.
멍청한 갈리프!
죄책감이 지나간 자리마다 새카만 자국이 낙인처럼 남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인간으로 살아가면서까지 라크시스를 살리려고 결심한 그날부터일까.
죽어가던 노예 아이를 처음 만난 그날일까.
균형을 맞추기에 급급해 미옌을 어둠에 밀어 넣은 그날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심판을 약속하고는 영혼을 그저 천칭에 올리기만 했던 지난 모든 나날들에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이제야 알겠어.”
모든 건 자신 때문이었다.
그녀는 천칭과 같은 물리법칙이 아니었다. 살아있으며,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모든 것에 공평할 수도, 완벽한 정의를 내세울 수도 없다.
미옌을 어둠에 보내고 뒤돌아 울었던 것도, 라크시스를 사랑하게 된 것도, 라크시스를 살리기 위해 힘을 내다 버린 것도.
그토록 보듬어왔던 인간들이었는데. 그들이 라크시스의 죽음을 외면하자 한없이 미워하게 된 것도.
사도들에게 진실을 숨기고 차마 제 손으로 하고 싶지 않았던 영혼의 회수를 떠넘긴 것도.
어쩔 수 없었다며, 이게 최선이었다며 선택한 길이 언제나 행복한 결말로만 이어지지 않았던 것도.
모두 그녀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깨달았다. 갈리프는 그녀 역시 애초부터 인간과 다름없는 존재였다는 걸 인정하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라크시스와 저의 운명이었군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꿀 수 없었던 걸 보니.”
갈리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받아들이겠습니다. 후회할지언정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그녀는 눈이 녹은 자리에 서있는 고목처럼 보였다. 수척해진 얼굴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누군가는 겨우내 눈발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 죽었다고 생각할 모습이었다.
“평생 그 남자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겠지요. 영혼조차 소멸되어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