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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25)화 (125/292)
  • 125화 

    갈리프가 신으로 추앙받고 그녀의 사도들이 고대 마법사라 불릴 정도의 마력과 권능을 지녔던 것은, 갈리프가 무한한 빛을 창조할 수 있는 태고의 존재였고 사도가 그녀의 힘에서 비롯된 일부였기 때문이었다.

    권능을 잃은 지금, 어둠의 배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가진 빛을 다 써버리고 나면 갈리프에겐 오직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운명만 남는다.

    그럼에도 갈리프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알아. 알고 있어.”

    어둠은 등골이 싸늘해졌다. 갈리프는 별이 들어오는 제 입 구멍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설마…….]

    “나 인간으로 살아보려고. 찰나의 시간만이 남더라도, 그렇게 한번 살아보려고.”

    […야, 갈리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화났을지도 모르겠네.”

    폭풍전야와도 같은 고요함이었다. 갈리프는 어둠과 눈을 마주치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돌아가겠다고 약속했거든. 라크에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둠이 급하게 입을 오므려보았지만 빛이 진행하는 속도를 이길 수가 없었다. 검은 촉수들이 사방에서 솟구쳐 갈리프의 꽁무니를 쫓아갔지만 그녀는 퐁, 하고 어둠의 입 밖으로 튀어 올랐다.

    어둠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갈리프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잠시만! 그 앤 못 만나! 그 애의 영혼은 천칭 위에서 소멸됐어! 영원히 소멸됐다고!]

    라크시스 옌의 영혼은 온 우주에서 소멸되었다.

    영원한 소멸. 그것은 단순히 명을 다한 영혼이 어둠에 먹혀 사라지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둠에 먹힌 영혼은 언젠간 소화되어 밖으로 나온다. 모든 기억도, 빛도 잃은 채 우주의 어둠이 고스란히 비칠 만큼 투명한 영혼만 남아 우주를 떠돌아다니게 되지만 어둠의 바깥으로 나갈 순 있었다.

    그러나 라크시스 옌의 영혼은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스스로의 영혼을 제물로 천칭에게 소원을 빌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랐다. 다만 천칭의 언저리에서 먹을 별들을 기다리다가 한때 갈리프의 마지막 사도가 될 예정이었다는 영혼을 목격했을 뿐이다.

    ‘저거, 죽었나?’

    먹게 된다면 배 속에서 갈리프와 만나게 해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라크시스의 영혼은 그대로 불타 사라졌다. 접시에 오르지도 못한 채 영원히 소멸되고 만 것이다.

    라크시스가 소멸되는 순간, 어둠은 천칭이 기우는 것을 보았다. 거대한 접시 양쪽에 천천히 고이고 있는 건 미옌이 가져간 자신의 어둠의 권능과 천칭이 내내 소유하고 있던 갈리프의 빛이었다. 그 말인즉 광룡이 죽었다는 말이었고,

    ‘저 인간이 광룡을 처치했어?’

    라크시스 옌이 광룡을 죽였단 말이었다.

    자신의 힘을 모조리 가져간 광룡을 고작해야 사도 수준의 인간이 막아내다니.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라크시스의 영혼이 영원히 소멸되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어둠 역시 광룡의 죽음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을 것이다.

    미옌이 가져갔던 어둠이 천칭으로 되돌아오고 있으니 머지않아 갈리프도 자신도 예전의 권능을 되찾을 터.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어둠은 그날 목격한 것을 함구했다.

    고작 영혼 하나였다. 어차피 오랜 시간이 지나면 라크시스라는 인간 따윈 자연스레 잊어버릴 것이다. 갈리프는 저와 똑같이 영원을 사는 신이었으니까.

    그러나 갈리프의 집념이 이렇게나 강할 줄은 몰랐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어둠은 갈리프가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 *

    돌아간 곳에 라크시스는 없었다.

    “그 사람이, 죽었다고요?”

    “아카데미생이 그런 것도 몰라? 하긴 넌 길거리 출신이었지! 시궁쥐가 그런 걸 가르쳐줬을 리가 없잖아!”

    패트릭이 깔깔거리며 외쳤다. 그의 패거리가 덩달아 그녀를 조롱했다.

    “조용, 조용! 학교에 적응 중인 친구가 있으면 도울 생각을 해야지, 패트릭.”

    “아, 예에예에. 그래야죠, 교수님. 시아는 친구니까.”

    패트릭은 빈정거리며 시아를 흘긋거렸다. 지금쯤이면 화나서 부들거려야 되는데. 이상하게 오늘의 시아 켈튼은 얌전했다.

    왜 저러지? 뭐 잘못 먹었나?

    “자, 다시 교과서를 펼쳐라. 627쪽까지 했었나? 그래. 3522년을 기점으로 마도 시대 말기는 끝나고, 근대로 넘어오게 된다. 연도 중요하니 잘 외워둬라.”

    역사 수업은 재개되었다. 교수는 시아가 계속 신경 쓰였다. 입양아에 아카데미 편입생이라 해도 요르문 켈튼의 법적인 딸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요르문 켈튼이 제 양딸을 끔찍이 아낀다던데. 켈튼가는 패트릭의 그레이엄가보다 여러모로 대단한 가문이었다.

    괜히 대마법사의 눈에 잘못 들었다가 정년도 못 채우고 직장을 잃을 순 없었다.

    “어쨌든 마법사 라크시스 옌의 희생으로 멸망을 피했지만, 증기기관과 마도구로 발전해 온 제국이 주춤하게 되는 건 사실이야. 이때까지만 해도 메이슨 비렌체는 무명의 발명가였는데…….”

    시아는 교과서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불성실한 수업 태도를 끔찍이 싫어하는 교수였으나, 그는 그런 시아를 내버려 두었다.

    ‘패트릭 때문이겠지. 이따 녀석에게 한 소리 해야겠군.’

    그녀가 충격을 받은 이유가 라크시스 옌이라는, 이제는 활자 따위로 가끔씩 언급되는 위인의 죽음 때문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 *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어둠의 배 속보다 시간이 곱절로 빠르게 흘렀다. 어둠 속에서 오래 있었으니 대지 위의 시간도 많이 흘렀을 거라 짐작은 했다.

    그러나 라크시스에겐 사도의 권능이 있었다. 약초꾼으로서의 생을 마감했을 때 라크시스가 천칭에 오르지 않고 곧바로 차원의 세계로 올 수 있도록 오래전 사도의 권능을 영혼에 심어두었던 것이다.

    발현되지 않아 내내 검은 머리였을 뿐 라크시스는 사도와 다름없었다. 평범한 인간보다 몇 배는 오래 살 터였고, 그걸 알기에 그에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던 것이었는데.

    ‘죽었다고.’

    역사책 속에서 그는 세상을 구원한 고대 마법사가 되어있었다. 사도의 상징인 은발을 지녔으며,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오다 광룡과 함께 최후를 맞이한 위인으로 기록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던 걸까.”

    눈물이 툭 흘렀다.

    조금 더 일찍 카얄의 배 속에서 빠져나왔다면. 내가 라크시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나러 왔었다면.

    라크시스는 살아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대지가 어떻게 되든, 그 사람만은 살렸을 테니까.

    은발의 고대 마법사가 제국을 구한 일화는 생각보다 유명했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니 사실 말은 다 한 거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갈리프는 이렇게 아카데미에서 배우기 전까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광룡의 부활이 비극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국 문명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셀 수 없는 목숨이 스러져버린 그날의 일을 고통 없이 기억하며 살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칠십 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갈리프에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인간에겐 대를 거듭할 수 있는 긴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고대 마법사의 죽음을 잊고 살았다.

    한 가지 충격적인 건 요르문 켈튼이 라크시스의 오랜 벗이었단 사실이었다. 라크시스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심해 그간 저택의 사용인들이 그날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뒤늦게 몰려온 상실감은 갈리프를 좀먹었다. 끝없는 죄책감이 그녀의 목을 옥죄어 왔다.

    “…라크는 나를 수천 년이나 기다려왔을 텐데.”

    오로지 라크시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려온 대지였다. 신으로서의 힘도 모두 포기하고, 인간의 모습으로라도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사랑해.

    앞으로 함께 행복하기만 하자.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소망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시아 켈튼으로서의 갈리프는 그날 원인 모를 병으로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지고 만다. 육신을 벗어나 천칭으로 향한 영혼 때문이었다.

    요르문은 절규했고, 저택의 분위기는 장례식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로라하는 의술사들도 시아를 포기하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 시아 켈튼에게 처음으로 가족이 되어준 요르문에겐 미안한 일이었다.

    갈리프는 천칭으로 달려가 환생한 영혼들의 자취를 모조리 훑었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말인즉슨 어둠에 먹혀 소멸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곧장 카얄에게 향했다.

    [벌써 돌아왔어? 생각보다 단명했네.]

    “…그 정도는 이야기해 줄 수 있었잖아.”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갈리프가 반가워 통통 뛰어왔던 어둠은 재빨리 모른 체했다. 그녀의 얼굴엔 노기가 서려있었다.

    “라크시스가 죽었다며, 네가 먹었다며. 작별 인사 정도는 하게 해줄 수 있었잖아! 왜, 사도를 먹을 수 있으니 좋았어? 별미를 빼앗길까 봐 일부러 말 안 했니?”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갈리프.]

    “진정 못 해! 라크는 어디에서도 환생하지 못했어. 사도씩이나 되는 거대한 빛을 가지고도 다시 태어나지 못했다고. 네가 먹은 거잖아. 먹이가 그렇게 탐났니?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줄곧 지켜봤으면서 어떻게…….”

    갈리프는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온 우주가 절절하게 울릴 정도로, 천칭의 접시조차 그 진동에 떨릴 정도로 몇 날 며칠을 하염없이 울었다.

    어둠은 저를 원망하는 그녀를 고스란히 받아주었다. 라크시스의 죽음을 숨긴 건 사실이긴 했으니까.

    어느덧 인간처럼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게 된 형제였다. 한때는 천칭이나 다름없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정하고도 공평한 신이었는데.

    갈리프가 ‘감정’을 느끼게 된 건 어쩌면 좋은 신호일지도 몰랐다. 지금의 아픔이 거름이 되고, 그녀의 창조물들에게는 더 나은 대지를 만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홀로 소멸된 라크시스에겐 안된 일이었다.

    “어디로 보냈어?”

    [뭐를.]

    벌게진 눈을 치켜뜬 갈리프는 여전히 울음을 참고 있었다.

    “네가 소화시킨 영혼. 빛을 잃은 라크의 영혼만이라도 만나고 싶어.”

    결국 어둠은 모든 걸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그 아인 내가 먹은 게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네 마지막 사도는 천칭과 거래를 했어. 너에게도 그 애에게도 안된 일이지만, 라크시스는 내가 먹고 배출한 찌꺼기조차 되지 못하고 영원히 소멸됐다고.]

    어둠이 겨우 고백한 진실은 생각보다 잔인했다.

    광룡의 부활과 라크시스의 소멸. 권능의 회복.

    갈리프는 뒤늦게 미옌에 의해 사라졌던 권능이 다시금 제게 돌아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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