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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24)화 (124/292)
  • 124화 

    “날 두고 가지 마. 갈리프, 제발. 아직 사랑한단 말도 못했어, 아무것도 고백하지 못했다고…….”

    “다 나 때문이야. 미안해.”

    “당신이 뭐가 미안한데! 칼에 찔린 건 당신이잖아. 갈리프, 날 봐. 이대로 죽지 마… 정신 차려, 나와 함께 하기로 했잖아. 제발…….”

    갈리프는 희미해지는 시선 속에서 라크시스를 찾았다. 불과 어둠이 난무하고 돌과 재가 떨어지는 하늘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힘겹게 싸우는 사도들보다도 눈물을 떨구는 라크시스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나 정말 인간 같잖아. 마음을 준 상대가 가장 먼저 보이고, 그 사람만 생각나고, 걱정되고, 미안하고, 또 사랑하고.

    문득 라크시스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시작은 동정이었다.

    미옌이 빼돌린 영혼을 회수하러 들판에 내려갔을 때, 라크시스는 피투성이가 된 채 헐떡이고 있었다. 가녀린 등은 온통 채찍으로 터져있었고 실핏줄이 터진 흰자위는 퉁퉁 부은 눈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갈리프가 온 줄도 몰랐을 터였다. 그 정도로 고통이 심해 보이는 상태였다.

    회수 대상은 아니었으나, 내버려 두면 죽을 게 분명했다. 이른 안식을 주리라 마음먹고 라크시스의 영혼을 거두려 했을 때였다.

    ‘…드디어 자유로워질 수 있어.’

    그 말에 멈칫했다. 대부분은 살고 싶다, 억울하다 매달리는데. 하다못해 잘 살았으니 후회 없다고 말하는데.

    소년은 후련해 보였다.

    체념한 건지 해탈한 건지 속내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소년의 목소리가 얇디얇은 종이에 비친 풍경처럼 흐릿했다. 그의 영혼과 똑같이, 무채색의 깃털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문득 이 목소리에 색이 입혀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일어나. 내 손을 잡으렴.]

    그러나 소년은 제 손을 거부했다.

    ‘난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니.]

    ‘그 고운 발로 날 계단처럼 밟아 마차에 오르겠지. 보석으로 치장한 가녀린 손으로 내 뺨을 때리며 즐거워할 테고.’

    갈리프는 심장을 뿌리째 뒤흔드는 떨림을 느꼈다. 급하게 읽어내린 소년의 삶이 뇌리를 마구 찔렀다.

    그저 남들보다 아름다운 얼굴로 태어난 게 전부다. 죄가 있다면 가장 미천한 계급으로 태어났다는 것일 뿐. 채 자라지도 못한 몸으로 소년이 겪어왔던 폭력과 고통이 고스란히 피부를 타고 전해진다.

    멀리서 볼 땐 아름다웠던 대지가 돌연 추악하게 느껴졌다. 우주의 저편에서 은하가 흐르는 것만 보았을 땐 몰랐던 기분이었다.

    미옌. 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러니 그냥 죽게 내버려 둬.’

    [이름이 뭐니.]

    소년은 빈정거렸다.

    ‘이름을 알려주면 날 위한 묘비라도 세워줄 건가.’

    [묘비뿐이겠어. 네가 죽으면 슬퍼해 줄 거야. 너라는 사람이 이 땅에 살다 갔다는 걸 기억해 줄 거야. 네가 웃을 때 입꼬리가 어떻게 올라갔는지, 무엇을 가장 맛있게 먹었는지, 누구의 사랑을 받다 갔는지 모두가 기억하게 해줄 거야.]

    소년의 눈이 커졌다.

    ‘내가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뒤늦게 올려다본 여자는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황금성의 귀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말 그대로 하늘에서 강림한 신 그 자체였다. 결이 다른 눈부심이 막연한 믿음을 주었다.

    그녀가 한 말이 정말로 현실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몰라.

    부르튼 입술을 짓씹던 소년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크시스. 다들 날 그렇게 불렀어.’

    [라크.]

    갈리프는 한참이나 이름을 혀끝에서 굴렸다. 자유로운 종달새가 생각나기도, 그의 눈동자처럼 푸른 물결이 생각나기도 했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내밀어진 손을 잡은 라크시스는 기대에 부응하듯 열심히 살았다. 들판에서 구해줬을 땐 너무 말라 몰랐는데, 살이 오르고 나니 생각보다 키도 체격도 컸다. 성인에 가까운 나이였던 라크시스는 뒤늦게 배우기 시작한 글과 마법을 빠른 속도로 흡수했다.

    재능도 충만했다. 라크시스는 가르치는 맛이 나는 제자였다.

    의원을 차린 갈리프를 돕는다며 약초를 캐러 다니던 것이 어느덧 라크시스를 어엿한 약초꾼으로 만들어주었다. 잔근육이 붙은 몸은 점차 사내의 것으로 변해간다. 함께 침대에 누울라치면 자리가 비좁아 웅크려 누워야만 했다.

    그렇게 자라난 남자가 오직 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존재를 자식처럼 여겨오던 신은 처음으로 인간 같은 사랑을 시작했다.

    한때는 그런 자신을 부정하기도 했었다. 태고의 빛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감정을 느끼고 감정에 휘둘려도 되는가. 나는 과연 신의 자격이 있는가.

    그러나 갈리프는 곧 깨달았다.

    이지를 가진 존재는 필연적으로 감정을 가진다. 이성과 감정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으니까.

    수많은 인간들도, 사도도, 신인 자신도 질량이 다를 뿐 빛이라는 점에선 똑같은 존재였다. 균형의 법칙 그 자체인 천칭을 제외하고 무정할 정도로 완벽하게 공평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다.

    출혈이 심해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갈리프는 과거를 회상하며 열없게 웃었다. 감정을 자각한 스스로를 인정하는 웃음이었다.

    “네 덕분에 무지에서 깨어날 수 있었어.”

    갈리프는 가빠오는 호흡을 느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영혼은 그저 영혼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니더라고.”

    “그게 무슨 말인데……. 알아듣게 말해줘…….”

    “살아보니 삶이란 게 뭔지 알겠더라.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보고.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사랑하기도 했지.”

    “대체 무슨…….”

    볼 위로 떨어지는 라크시스의 눈물이 뜨거웠다. 용암이 피부를 파고드는 것 같다. 눈물에 담긴 감정이 가슴을 녹이고 숨겨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사랑해.”

    사랑은 나직이 고백되었다.

    “라크. 널 사랑해.”

    그것은 갈리프가 처음으로 전한 진심이었다.

    “아, 아아…….”

    라크시스는 복받쳐 흐느꼈다.

    손을 뻗어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고운 얼굴이 자신 때문에 볼썽사납게 얼룩진 게 미안했다.

    “울지 말고. 다시 돌아올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 수천 년을 기다리래도 기다릴 테니까…….”

    날 기다리는 건 아주 힘들고 긴 세월이 될 텐데. 우주가 다시 균형을 찾기까진 억겁의 시간이 필요한데도. 넌 죽고 죽어 나와 함께한 모든 과거를 잊을지도 몰라. 네 곁에 있어줄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날 위해 울어준 널, 수천 년을 기다려주겠다 맹세한 지금의 너를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갈리프는 미소를 띤 채 눈을 감았다.

    【 고해 】

    어둠, 카얄은 제 배 속으로 들어온 갈리프를 태연한 척 맞이했다.

    […왔어?]

    토끼보다 훨씬 작아져 이젠 계란처럼 보이는 어둠이 눈을 깜빡이며 나타났다. 미옌이 천칭을 이용해 제힘을 모조리 긁어간 탓이다. 갈리프는 엷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어둠을 지나쳐 둥지 같은 보금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어둠은 갈리프를 일부러 평소처럼 대했다. 아마 그녀도 짐작하고 있을 터다. 빛을 잃은 갈리프의 모습은 우주의 모든 존재를 경악하게 만들었으니까.

    찬연한 은발이 검붉게 변했다.

    갈리프를 이루던 빛의 권능이 미옌에 의해 천칭의 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옌이 죽어 그의 몸에 갇혔던 어둠의 권능이 제자리로 돌아오기 전까진 갈리프는 영원히 저 모습일 터였다.

    검붉은 머리카락의 갈리프가 낯설었다. 한편으론 그녀와 자신이 이제야 쌍둥이 같아 보인다는 얄궂은 생각도 들었다.

    “미안해.”

    [미안하긴. 그 애가 영악했던 거지.]

    갈리프는 물을 퍼 올리듯 어둠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힘을 모조리 잃은 어둠은 토끼는커녕 형체만을 겨우 유지한 채 이젠 손바닥보다도 작아져 있었다.

    “너도 나도 만신창이네.”

    어둠은 우울하게 귀를 말았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네 힘은 천칭에 속해있고, 내가 토한 어둠은 미옌이 가져갔거든. 미옌이 가져간 어둠을 회수해 오면 천칭에게서 빛을 돌려받을 순 있겠다마는…….]

    “괜찮아.”

    거짓말.

    올려다본 갈리프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콩만 한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둠은 그녀에게 더는 말을 걸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인간들의 셈법으로 수십 세기가 훌쩍 지난 때였다.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갈리프는 비교적 데리고 있기 편한 존재였으나, 이상하게도 어둠은 미옌보다 갈리프가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녀의 손톱이 울퉁불퉁 짧아져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갈리프는 항상 초조해했다. 죽은 별들이 들어오는 입을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미옌 때문에 구멍이 뚫려 얇아진 위벽을 쓸어보기도 했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 거지.’

    어둠은 곧 그녀가 밖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카얄, 빛 하나 정도는 밖으로 내보내 줄 수 있지?”

    [왜.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그냥 가만히 있어. 나도 아직 너덜거린다고. 천칭이 허락하지 않을 거야. 괜한 짓을 했다가 그나마 남은 빛마저 소멸되면 어쩌려고 그래.]

    사실이었다. 좋게 생각해서 내보내 주고 싶어도 미옌이 저지른 짓 때문에 어둠은 아직 작은 불균형도 버티지 못했다.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어둠은 갈리프가 내보내달라는 빛이 그녀 자신인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갈리프는 빈껍데기만 남은 신이었다. 순리를 거슬러 어둠을 탈출하다간 그나마 남은 빛마저 틀림없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산화할 터다.

    그렇게 되면 갈리프에겐 정말 영혼만 남는다. 아주 찰나의 순간만 남아 한 세기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의 영혼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고작 그 세월을 위해 탈출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가만히 기다리면 곧 권능이 돌아올 텐데 말이야.’

    아무리 태고의 권능을 훔쳐 달아났다지만, 미옌은 자신이나 갈리프와 달리 일개 사도에 불과했다. 별은 언젠간 죽는다. 그건 미옌도 마찬가지였다.

    갈리프는 아직 모르는 듯했지만, 미옌은 이미 죽었다. 그가 가져갔던 어둠도 머지않아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고, 갈리프 역시 천칭으로부터 빛을 돌려받게 되겠지. 그렇다면 지금의 고통도 불균형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으면 알아들었겠지. 어린 사도도 아니고, 갈리프니까.

    그러나 갈리프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괜찮아. 빛을 잃어도.”

    [뭐? 상관없어? 빛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모든 빛은 본질이 같다. 미옌이 천칭에서 깨달았던 것처럼, 빛이란 에너지였고 생명력이었으며 마법이었고 영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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