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23)화 (123/292)
  • 123화 

    “재워줄까?”

    “당신 마음대로.”

    라크시스는 제 가슴팍에 닿은 기다란 은발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역광이 드리워진 갈리프의 얼굴을 눈으로 수없이 덧그렸다. 아예 뇌리에 새길 작정으로 하염없이 보고 또 봤다.

    당신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수마가 몰려왔다. 갈리프가 머리를 살살 쓸어내리는 통에 라크시스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잠이 들었다.

    행복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행복하고 싶다.

    당신과 함께 행복하고 싶어.

    그러나 라크시스의 소박한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라크시스가 약초를 캐러 절벽으로 향하고, 갈리프는 마을의 환자들을 돌보던 날이었다.

    떠나는 라크시스를 배웅하고 갈리프가 돌아섰을 때였다.

    “날 대신한 게 고작 저런 인간입니까.”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실루엣. 그러나 지금 여기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

    그녀의 첫 번째 사도, 미옌이었다.

    “네가 어떻게…….”

    “당장 대답해요! 날 버리고 선택한 게 고작 저런 거였냐고!”

    미옌은 갈리프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사나운 목소리는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바람결에 찬란한 금발이 휘날렸다. 그러나 빛을 잃은 영혼에는 태고의 어둠이 가득 차 흘러넘쳤다. 그에게서 사도의 권능이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미옌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되고 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널 대신한 게 아니야. 나는 그저 네가 대지에 남겨둔 영혼을 찾으러 다니다가…….”

    “저놈에게 반했다?”

    미옌이 이죽였다.

    “…뭐?”

    정곡을 찔렸다. 갈리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직접 내려와 보니 어떻습니까. 인간들의 삶을 지켜보니 어떻냐고요. 순환되는 에너지에 불과하다 치부하기엔 이들은 참 기구하고도 복잡한 시간을 살아내지요.”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치다.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갈리프를 보니 헛웃음이 났다. 어둠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도 영혼의 정체를 영원히 몰랐겠지.

    차라리 다행이다. 갈리프의 사도로 살았더라면 그녀의 기만에 평생 놀아날 뻔하지 않았는가.

    혈관 속에 흐르는 어둠이 이토록 만족스러울 줄이야.

    “그래, 노예 녀석이 가여우셨습니까?”

    “미옌.”

    “지금껏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을 맞다가 들판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말입니다.”

    이 세상은 갈리프의 위선이었다. 선하게 살 이유도, 악을 멀리할 이유도 없는 곳인데 인간들은 어리석게도 신을 믿었다. 신이 만든 세상 속에서 불공평한 삶을 살다가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것이다.

    죽음 후엔 소멸뿐인데도.

    미옌은 조소했다.

    “죽고 나면 흙으로 돌아갈 육신이라 하셨지요. 삿된 것에 마음을 쓰지 말라 한 건 당신이었습니다.”

    “…….”

    “막상 피 흘리는 인간을 보니 마음이 약해지셨습니까? 아름다운 껍데기를 보니 마음이 동하셨냔 말입니다.”

    라크시스라는 노예 녀석의 얼굴이 똑똑하게 기억이 난다. 수없이 많은 인간을 인도해 왔던 제게도 인상이 깊게 남은 외형이었으니까.

    고작 그런 것에 갈리프가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난 대의를 위해 한 행동이었는데, 당신은 흙으로 돌아갈 껍데기 따위에 홀려서는.

    실망이다.

    당신도, 당신이 만든 이 세계도.

    갈리프는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그 노예는 진작 죽었어야 할 영혼이었다. 잔인한 채찍질을 못 견디고 자연스럽게 숨을 거두었어야 했었다.

    원래였다면 구해주는 이 하나 없이 들판에서 죽는 것이 노예의 운명이었거늘. 당신이 세상사에 끼어든 바람에 죽었어야 할 놈이 살아남았잖은가?

    궤변이었다. 갈리프는 다친 노예를 구했을 뿐이었지만 미옌은 이미 죽은 영혼을 빼돌렸다. 멋대로 부활시키고 새 육신을 주었다.

    그러나 미옌은 제 궤변 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자신을 버린 갈리프를 미워하기도 벅찼다.

    “당신도 나와 똑같아.”

    내뱉은 말에 갈리프가 상처받은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속이 후련했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정리된 것 같았다. 죄스러운 마음이며 갈리프에게 절절매던 과거가 모두 한 줌 재로 산화되어 흩어져갔다.

    이제 할 일은 하나였다.

    갈리프가 만든 세계를 어둠 앞에 놓아두는 것. 모든 빛을 공평하게 집어삼키는 어둠이야말로 진정한 심판자였다.

    “그러니 이젠 내가 심판하겠어.”

    미옌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 *

    지옥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모두가 평범한 일상 속에 있었다. 노예는 채석장에, 왕은 황금성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화창한 햇살이 상앗빛 지붕을 비추고 강이 마을을 굽이쳐 흐르던 날이었다.

    별안간 하늘이 갈라졌다.

    갈라진 틈 사이로 나온 소름 끼치는 비명이 공기를 찢었다. 우주 저편의 어둠이 쏟아져 순식간에 밤을 드리우고 대지의 한곳에 고이기 시작했다.

    어둠이 고여 든 자리에 나타난 건 고대의 벽화나 동굴 따위에서 보던 상상 속의 용이었다. 그건 한때 태고룡이라 숭상받던 은백의 용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소멸시키기 위해 지상에 내려온 어둠, 바로 광룡이었다.

    검은 하늘을 가르고 이내 갈리프의 사도들이 나타났다.

    천사를 목격한 사람들은 종말이 찾아왔다며 신을 부르짖으며 발버둥 쳤다. 광룡이 뿌린 불길이 지나간 자리엔 재만 남았다. 도망치던 자도, 기도하던 자도 모두 흔적도 없이 타버리고 말았다.

    사제와 마법사들의 같잖은 마력은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결국 황금성마저 녹아내렸다.

    고대 마도 시대의 진정한 멸망이었다.

    “갈리프 님은 어떻게 된 거야! 태양이 지고 있다고!”

    나타가 절박하게 외쳤다. 빛의 사도는 빛이 함께할 때 가장 강했다. 그러나 우주를 메우던 별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태양도 마찬가지였다.

    나타의 권능에서 나타난 수천 갈래의 창이 광룡을 향해 퍼부어지고 있었으나 광룡은 포효를 되지를 뿐 멀쩡했다.

    방심한 사이 광룡이 뿜어낸 불길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방어할 틈도 없었다. 나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거대한 검이 광룡의 브레스를 가르고 날아가 시뻘건 아가리에 박혔다.

    광룡이 몸부림치는 소리에 나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불길을 가르고 제 앞에 서있는 건 형제, 팔리야였다.

    그녀의 몸도 성치 않았다. 바라본 뒷모습은 이미 지쳐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잔뜩 갈라져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타를 깨웠다.

    “정신 바짝 차려, 나타. 저건 우리 같은 사도가 아니야. 갈리프 님과 맞먹는 어둠이라고.”

    팔리야의 눈짓에 나타는 뒤늦게 아수라장이 된 들판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애타게 찾던 갈리프가 피를 흘리며 누워있었다.

    그녀는 칼에 찔려 죽어가고 있었다. 인간의 육신만 스러진 게 아니라, 갈리프의 존재 자체가 저물어가는 중이었다.

    나타는 갈리프의 심장을 관통한 칼에서 아득하고도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가만 보니 칼도 아닌 것 같다. 차가운 금속 파편처럼 생긴 날붙이의 형태를 살피던 나타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칼이 아니라 천칭의 접시 조각 일부였다.

    균형을 목적으로 하는 우주의 주인. 상반된 것이면 무엇이든 무게를 달아 교환하고 거래하여 종국에는 완벽한 균형을 맞추어내는 존재.

    갈리프의 힘은 지금 천칭의 접시에 올라있었다. 태고의 빛이 접시에 올랐으니, 그와 동등한 양의 어둠 역시 천칭에 오를 터.

    미옌은 빛의 권능을 천칭에 지불하고 막대한 어둠을 삼켰다. 아마 지금쯤 우주 저편의, 토끼의 모습을 하고 있는 태고의 어둠 카얄 역시 급격하게 힘을 잃고 괴로워하고 있을 터. 천칭에 오른 갈리프의 빛은 미옌이 죽어 그가 집어삼킨 어둠이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갈 때까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갈리프의 빛으로부터 힘을 끌어다 쓰는 사도들에겐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나타의 눈이 뒤집어졌다.

    “미옌 이 개자식! 넌 오늘 곱게 못 죽을 줄 알아!”

    한편, 불길과 재가 난무하는 하늘 밑에서 라크시스는 주저앉아 있었다. 도망치는 사람들이 끝없이 곁을 스쳐 갔지만 라크시스는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갈리프가 칼에 찔렸다.

    그것도 자신을 지키려다가.

    “갈리프, 어째서…….”

    흙바닥이 피로 검게 젖어 들었다. 라크시스는 행여 도망치는 인파에 갈리프가 깔릴까 이를 악물고 온몸으로 막아냈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했다.

    라크시스는 갈리프의 등을 감싸 안았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선혈이 흥건하니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어째서 평소처럼 회복하지 못하는 거지?

    갈리프는 신이잖아. 손끝으로 스치기만 해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신이잖아.

    왜 피가 멈추지 않는 건데.

    바싹 말라 찢어진 입술로 갈리프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손이 라크시스의 얼굴을 힘없이 스쳤다.

    “…괜찮아. 다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당신 지금 죽어가잖아,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렸으면서!”

    아. 갈리프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뒤이어 느리고 가는 호흡이 세상의 저편으로 이어지는 실처럼 이어진다.

    “…미안해.”

    라크시스는 그것이 곧 죽음을 앞둔 자의 마지막 고백임을 알았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그녀가 저를 먼저 떠나리라는 건.

    한때 농담처럼 그녀에게 건넸던 속마음이 떠올랐다.

    당신은 신이니 내가 죽고 나서도 만나러 갈 수 있겠네. 내가 백발의 노인이어도, 실낱같은 영혼의 모습이어도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해 줘.

    이젠 다 소용없었다.

    “왜 날 지키려고 한 거야. 내가 고맙다고 해줄 줄 알았어? 당신이 다치면 어떡하냐고. 당신 없이 나만 살아남아서 어쩌란 말이야!”

    라크시스는 미옌이 애초에 갈리프를 노렸다는 걸 몰랐다. 혼자였던 갈리프에겐 약점이 없었지만, 라크시스가 곁에 있는 순간부터 갈리프는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미옌은 일부러 갈리프의 시야 안에서 라크시스를 공격했다. 그녀는 마법을 쓰기에 지나치게 가깝고, 라크시스가 휘말려 다칠 것 같은 거리에서 빈틈을 보였다.

    미옌의 예상은 정확했다. 갈리프는 온몸으로 라크시스를 감쌌고, 미옌의 칼은 갈리프의 등을 파고들어 폐를 찢고 빛나는 심장을 그대로 관통했다.

    ‘훌륭한 미끼로구나. 형제여.’

    라크시스는 갈리프를 찌르고 가버린 미옌을 그저 강도 혹은 괴한이라 생각했지만 갈리프는 심장을 강타한 고통을 느끼며 찰나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예견했다.

    모든 것이 미옌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 나도, 이 대지도, 사도들도. 빛과 우주도.

    라크시스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