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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22)화 (122/292)
  • 122화 

    미옌은 이를 악물고 일단 사도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사도들은 저들끼리 웃고 떠드느라 미옌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 다들 왜 나한테만 그러쇼? 이봐요. 팔리야 형제님, 다무스 형제님. 당신들은 날 막내라고 애지중지 보살펴준 적이 있나? 없잖아!”

    “네 덩치를 생각해, 나타. 내가 너같이 징그러운 녀석을 어떻게 업어주고 재워주고 하겠냐. 인간들에게 물어봐. 네가 내 동생처럼 보이는지.”

    팔리야가 핀잔 조로 키득거렸다.

    “팔리야 누님도 너무하쇼. 날 때부터 이런 모습인 걸 어쩌라고요! 그래, 지금이라도 좀 업혀봅시다. 누님, 이리 오쇼. 얼른.”

    나타가 눈에 힘을 주고 팔리야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근육질의 덩치에 깔린 팔리야가 비명을 질렀다.

    “야! 당장 내려와! 아흐, 나, 나, 허리 작살 나! 울리아트! 나타 좀 말려봐! 빨리이이!”

    업혔다고 표현할 수도 없는 꼴이었다. 나타의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체격이 워낙 많이 차이 났던 탓이었다.

    “큽.”

    “다무스 너 지금 웃었어? 웃었냐고!”

    “크흠, 아닙니다.”

    한바탕 소란이 가라앉았다. 숨 돌린 것도 잠시, 사도들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우물에 빙 둘러섰다.

    인간은 끊임없이 죽고 또 태어난다. 다시 영혼을 거두러 갈 시간이었다.

    “자, 일단 일하러 갑시다들.”

    “잔느 강 쪽은 갈리프 님이 계시지? 그럼 난 남쪽으로 간다!”

    “치사하게 먼저 가깁니까! 팔리야, 같이 가쇼!”

    그렇게 사도들이 사라진 신전은 텅 비어 고요했다. 미옌은 우물의 차원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왕좌의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갈리프를 그리워하며 왕좌를 끌어안고 울던 방금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미옌은 메마른 낯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서 따뜻한 색을 모두 빼낸 것 같았다.

    “…잔느 강이라.”

    잔느 강은 후에 공장지대로 유명한 메이덜린을 가로지르는 강이다. 미옌은 오래전 그러했듯이 우물 속에 천천히 발을 담갔다.

    사도가 될 예정이라는 인간은 분명 갈리프와 함께 있을 터다. 그렇지 않고서야 갈리프가 직접 대지에 내려갈 일은 없을 테니까.

    우물 속에 펼쳐진 차원의 통로 너머로 풍경이 어렴풋이 비쳤다. 온통 흙으로 지어진 집들 가운데 주인 바뀐 황금성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주홍빛 강이 여린 지반을 세차게 파내며 흐른다. 오래전 강둑이 무너져 수많은 죽음을 낳았던 바로 그 강이었다.

    우물은 한때 사도였던 존재를 기억했다. 미옌은 우물이 열어준 길에 몸을 맡기며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친히 낯짝을 확인해 주지. 마지막 형제여.”

    * * *

    “라크. 오늘도 다쳐서 온 거니?”

    주렴을 걷으며 방으로 들어오던 라크시스는 움찔 멈춰 섰다. 눈이 사방에 달렸나. 가시덤불 위를 구른 탓에 등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샤샤리아가 하필이면 까마득한 절벽에 피어있었다. 고통을 잊게 해준다는 희귀한 약초는 황금성의 높으신 분들에게 값비싸게 팔렸다.

    떨어지기 직전 가까스로 넝쿨을 붙잡아 죽는 건 면했지만, 발밑의 가시덤불을 피하지는 못했다.

    등이 쓰라렸다. 갈리프가 준 연고를 챙기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상처가 시뻘겠을 것이다.

    그렇지만 라크시스는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 괜히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 부리는 허세였다.

    “이 정도는 다친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절 어린애라고 생각하실 건지.”

    은발의 여인이 살포시 웃었다. 얄팍한 거짓말에 속아주겠다는 뉘앙스다. 정말로 눈이 사방에 달렸나. 괜히 부끄러웠다.

    사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오늘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가, 당신이 구원해 준 생을 얼마나 땀 흘려 보람차게 살았는가. 등의 상처를 은근슬쩍 내보이며 안겨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 꿈을 포기했다. 입구에서부터 장난치는 아이들의 함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더 들어가니 앓는 사람 반 건강해진 사람 반으로 발 디딜 틈 없이 집 안이 꽉 차있었다.

    그녀의 주변엔 언제나 사람이 가득했다. 라크시스는 그게 좋으면서도 싫었다. 그녀에게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 라크시스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동시에 라크시스에게서 은발의 여인을 빼앗아가는 경쟁자였기 때문이었다.

    은발의 여인, 갈리프는 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의원이었다.

    “그럼 왜 찾아온 거니.”

    피부가 찢어져 엉엉 울던 아이가 눈물을 뚝 그쳤다. 은발의 여인은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어미와 자식에게 미소 지으면서도 라크시스에게 눈길을 주었다.

    성장하여 벌어진 어깨와 섬세한 근육들이 얇은 튜닉 너머로 비쳤다. 선이 굵어진 얼굴이며 목울대가 그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면서도 동시에 사내다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새카만 머리카락 밑으로 한층 깊어진 눈우물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그 눈빛은 때때로 퇴폐적으로 느껴질 만큼 매력적이고 위험했다.

    비쩍 말라 들판에 버려졌던 노예 아이였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라크시스는 고작 약초꾼이었다.

    그럼에도 라크시스는 이 땅의 그 누구보다도 고귀한 존재처럼 보였다.

    저 멀리 실루엣만 보이는 황금성의 주인조차 고개를 조아려야 할 것만 같았다. 역설적이지만 어린 라크시스가 매질을 당하고 들개의 밥이 되었던 이유도, 지나치게 아름다운 노예에게 불쾌함을 느낀 귀족 때문이었다.

    라크시스가 갈리프의 방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짓궂은 웃음기를 만면에 띤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몸을 물렸다.

    새카만 남자와 새하얀 여자.

    정반대의 색을 가진 두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에게 지독히도 어울렸다. 태양의 뒤를 달이 따르고, 빛의 뒤편엔 어둠이 있듯 두 사람은 오로지 두 사람만으로 완성된 그림을 만들 수 있었다.

    인간이 아닌 듯한 기묘한 분위기가 마침내 상쇄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차마 그 사이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환자들이 몰려나간 갈리프의 방은 썰렁하리만치 적막했다.

    라크시스는 그제야 한결 편해진 태도로 갈리프의 옆에 가만히 앉았다.

    “꼭 다쳐야만 당신을 찾아올 수 있는 겁니까?”

    갈리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놀란 눈치였다. 라크시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스쳤다가 사라졌다.

    기분이 좋았다. 언제나 무심한 듯 보이는 갈리프였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동요하는 대상은 라크시스뿐이었다.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억지로 숨긴 미소는 결국 잉크 스미듯 만면에 번져나갔다. 라크시스는 갈리프의 옆에 조금 더 바싹 붙어 앉았다.

    “갈리프.”

    “응.”

    기다란 손가락이 은발을 걷고 귓가를 맴돌았다. 아마 꽃이겠지. 자주 있는 일이었으나 갈리프의 귀는 또 붉어지고 말았다.

    라크시스의 청량한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그는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릴세라 정성스레 꽃을 꽂고 있었다.

    정염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정갈한 손길이었으나 오히려 그 탓에 야릇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섬세하고도 예민한 감각을 지녔고, 지나치게 제게 집중했다.

    약초꾼이 아니라 예술가가 되었어도 좋았겠어. 혹은 수학자라든가. 머리가 좋으니 대학자가 될 수 있을 텐데.

    애써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헛된 일이었다. 라크시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가만히 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사스러우리만치 아름답다. 사실 인간이 아니라 악마와 어울리던 요정이었다든가.

    타고나길 앵두 같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혈관이 비쳐 붉어 보일 만큼 얇은 피부라지.

    저곳도 뜨거울까. 그의 체온만큼.

    갈리프는 지극히 인간다운 감정을 느꼈다. 드넓은 우주에서 대지를 관망하기만 할 때는 몰랐던 것들이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무수한 영혼들을 인도하면서도 그녀로 하여금 심장이 뛰도록 만든 존재는 없었다.

    ‘오직 이 아이 때문이었지.’

    흘긋 시선을 마주치자 라크시스가 눈을 접으며 웃는다. 갈리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심장이 뜨거웠다. 그를 볼 땐 언제나 그랬다.

    라크시스는 그런 남자였다.

    “다 됐어요.”

    “고마, …어?”

    꽃이라고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만졌던 것은 딱딱하고 매끄러웠다. 잘 가공된 광석 내지는 금속일 터다. 그 말인 즉 보석이란 소리였다.

    “역시 어울리네요.”

    당황한 갈리프가 보석을 빼려고 하자 라크시스는 재빨리 청동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언제 또 닦아놨는지 반질반질 얼굴이 비쳤다.

    라크시스의 눈을 닮은 푸른 보석이었다.

    “이건…….”

    황금성에 사는 인간들에겐 발밑에 채는 보석이었다. 사파이어도 이름난 보석도 아니었지만 평범한 약초꾼에겐 꽤 값나가는 물건이다.

    갈리프가 미미하게 인상을 쓰며 입을 벙긋거리는 순간이었다. 라크시스는 그녀의 잔소리를 잽싸게 자르며 은발의 끝자락을 살며시 들었다.

    “좋은 향이 나요. 갈리프.”

    라크시스는 실크 같은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갈리프에게선 언제나 따스한 햇살 냄새가 났다.

    창공의 태양보다도 거대한 빛이라더니. 갈리프의 체향은 그 말이 진실이라는 걸 입증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네게서도 향이 나. 새벽녘 이슬 어린 숲이 떠오르지.”

    “안아봐도 됩니까.”

    대화가 어긋났다. 두 사람은 어긋난 대화조차도 즐겼다.

    어느새 라크시스의 팔은 갈리프의 허리에 감겨있었다.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언제는 안 그랬던 것처럼 구는구나.”

    갈리프는 피식 웃으며 라크시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깃털이 팔랑이는 듯 부드러운 손길에 라크시스는 제 몸을 그대로 맡겼다. 나른하면서도 포근했다. 그녀의 마력이 흘러 들어오는지 상쾌하기도 했다.

    문득 갈리프에게 종종 엉겨 붙는 어린아이들이 떠올랐다. 당연한 일이다. 대가 없이 병을 치료해 주는 의원에게 호감을 보이는 건.

    아니면 당신이 상냥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 내게 그러하듯 그 아이들에게도 사랑을 나누어주었다면.

    라크시스는 갈리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곤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에겐 허락하지 마세요.”

    “무엇을?”

    대답하기 부끄러웠다. 나는 당신 주변의 모두를 질투하고 있는데.

    “그냥, 다요. 제가 당신에게 하는 모든 것들을요.”

    “욕심이 많네.”

    갈리프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내 그녀는 제 다리를 내어 라크시스를 뉘었다.

    장신의 남자는 누워있는 모습도 느슨하니 매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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