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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21)화 (121/292)
  • 121화 

    천칭이 균형을 위해 빛들을 어둠의 먹이로 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서있는 곳은 다름 아닌 어둠의 배 속이었다.

    끝없는 시간을 어둠의 배 속에서 지내며 미옌은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어둠이 잡아먹은 영혼을 이 배 속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미옌은 곧 어둠이 그의 식사를 제게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왜일까.

    영혼의 본질이 무엇인지 내가 알게 될까 봐?

    어둠과 일부러 가까워진 후 그의 식사를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미옌은 허무하리만치 잔인한 사실을 알아내고 말았다.

    영혼이란 정해진 양만큼의 기름이 든 등불과 다름없는 존재다. 모든 영혼은 똑같은 에너지를 지닌 채 태어난다. 어느 정도 환생을 반복하여 에너지가 소진되면 전생이 어쨌든 간에 무조건적으로 소멸할 존재였던 것이다.

    어차피 어둠의 먹이가 될 것들을 동정하고 증오하며 함께 울고 웃어주었다. 그것들 때문에 사도의 의무를 저버리고 형제들에게서 버림받으며, 종국에는 어둠 속에 버려지고 말았다.

    갈리프는 모든 걸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천칭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던 걸까?

    어둠이 걱정했던 것과 달리 미옌은 다행히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가엾은 사도는 오금도 못 펴고 주저앉아 있었다.

    너무 겁을 줬나 싶어 걱정이 되면서도 식사를 방해받았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어둠은 빽 화풀이를 했다.

    [내가 갈리프의 창조물들을 집어삼키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 네가 한동안 영혼들을 빼돌려서 난 무척이나 배고팠었거든.]

    “…배가 고팠다고.”

    [그래. 알았으면 꺼져. 너부터 먹어치우기 전에.]

    이내 어둠의 식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고요한 가운데 건조한 부름이 어둠을 멈춰 세웠다.

    “이봐. 어둠.”

    [카얄이라고 했잖아. 몇 번을 말해줘도 몰라?]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되지?”

    [그야 토해내지. 그렇다고 영혼을 토해내진 않아. 어둠을 뱉어내지.]

    모든 건 균형을 이뤄야 하거든. 어둠을 먹으면 빛을 토하고, 빛을 삼키면 어둠으로 소화하지.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건 갈리프도 마찬가지일 텐데. 아냐?

    우물거리며 대꾸하다가 문득 미옌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은 짤막한 목을 움직여 위를 올려다보았다.

    미옌이 제 정수리 바로 위쪽에서 어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빛이 없는 곳인데도 그림자가 드리워진 기분이었다.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섬뜩했다.

    “네가 말했지. 갈리프 님은 날 버린 게 아니라고.”

    […너 언제 여기까지 왔어.]

    “그런데도 날 찾으러 오시질 않는단 말이야.”

    [잠깐, 너…….]

    어둠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끄으읍, 큭, 우으으아……. 그만해, 미옌. 그만…….]

    순식간이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머리가 으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미옌이 어둠을 낚아채 토끼 같은 머리통을 짓이겨 입을 벌리고 제 권능을 억지로 떠넘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를 제지하기도 전에 입 안으로 뜨거운 불덩이가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볼이 찢어지고 목구멍이 터질 듯이 불룩해졌다.

    지나치게 큰 빛이었다. 어둠의 몸이 시뻘건 열로 붉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분신과 연결된 거대한 배 속에 태양 같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바닥이 요동치며 위아래가 끊임없이 바뀌었다. 어둠의 배 속에서 소멸을 기다리던 영혼이 난데없는 열기에 악을 쓰며 도망을 쳤다.

    이윽고 어둠의 뱃가죽 한 구석에 구멍이 뚫렸다. 뚫린 구멍으로 용암이 솟구쳐 무수한 빛들이 흘러들었다.

    구멍의 틈새로 은하가 흐르는 검보랏빛 우주가 비쳤다. 탈출구였다.

    “네가 지금까지 날 먹지 않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 말로는 잡아먹는다느니 하면서 위협했지만 말이야.”

    어둠 속에 들어온 이래 처음 보는 바깥세상의 빛이었다. 그의 금발이 오랜만에 찬연히 반짝거렸다.

    미옌은 잔인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내가 지나치게 큰 빛이었던 거야. 그렇지?”

    [이런 바보 같으니……!]

    “날 한 번에 소화시키면 균형이 깨어질까 봐 그랬던 거잖아.”

    [그만해! 이러다가 정말 큰일나! 갈리프의 대지를 태양도 낮도 없는 땅으로 만들 거야?]

    영혼을 과하게 먹으면 어둠을 토한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토끼의 찢어진 볼 사이로 시커먼 어둠이 진액처럼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닿기만 해도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어둠의 진액 때문에 미처 도망치지 못했던 영혼들이 어둠의 배 속에서 모래처럼 산산이 바스라져 소멸했다.

    사방이 아수라장이었다. 인간들이 보았다면 분명 지옥이라고 기록했을 모습이었다.

    예상했던 바였고, 바라던 바였다.

    천칭의 균형.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버리면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겠나. 과한 빛을 먹으면 어둠 역시 그만한 어둠을 내놓아야 하겠지.

    미옌은 손을 뻗어 진액을 받아마셨다. 놀랍게도 그의 몸은 소멸되지 않았다. 빛의 사도의 힘을 내버린 탓에 지금의 미옌은 텅 빈 그릇과 다름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네가 토한 어둠은 내가 가져가겠어. 날 먹은 대가로 뱉어낸 거니까.”

    미옌은 어둠이 흘린 힘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갈리프의 사도일 때와는 또 다른 압도적인 힘이 혈관을 타고 맹렬하게 전신을 내질렀다.

    ‘…상쾌하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왜곡하고 소멸하는 어둠.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또 다른 태고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강하고 위협적이었다.

    미옌은 그대로 어둠을 빠져나갔다.

    균형 잃은 천칭이 기우는 소리가 온 우주를 찢어버릴 듯 날카롭게 울렸다. 그가 어둠에게 사도의 권능을 내버린 탓이었다.

    미옌은 경멸의 웃음을 터뜨리며 광활한 우주를 가로질러 쏜살같이 날았다.

    지금 당장, 만나고 싶은 존재가 있었다.

    * * *

    신전은 텅 비어있었다.

    “…다들 일하러 갔나.”

    차라리 다행이었다. 형제들을 만나봐야 좋을 일은 없었다. 서로 무시하든지, 싸우든지. 어둠의 힘을 한껏 받아마시고 왔으면서도 미옌은 여전히 그 옛날, 형제들의 차가운 시선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차원의 세계는 그가 떠나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태양의 마차가 낮을 가로지르면 별을 호령하는 달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미옌은 사계절이 순환하는 바닥을 오랜만에 감상했다. 이슬비가 내리다 돌연 눈발이 날리고 펼쳐진 초원 위로 노란 봄꽃이 한가득 넘실거린다.

    따뜻하고도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미옌은 고향의 냄새를 폐부 깊이 들이쉬었다.

    구름을 지붕 삼아 끝없이 위로 뻗은 신전의 기둥 밑으로 단출한 우물과 눈에 익은 열 개의 왕좌가 둥글게 자리하고 있었다.

    갈리프와 아홉 사도의 자리였다.

    미옌은 신성한 단상 위에 올라 가장 중앙에 위치한 갈리프의 왕좌로 천천히 걸어갔다.

    갈리프는 없었으나,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 갈리프의 흔적을 마주하고 싶었다.

    갈리프를 만나고 싶어 달려온 건 맞았다. 그러나 막상 차원의 세계에 도착하고 나니 두려웠다.

    권능을 내버린 사도를, 당신은 어떻게 바라볼까. 난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만나고 싶었습니다.

    절 용서하셨습니까?

    왜 저를 찾으러 오지 않으셨습니까.

    다시 저를 받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갈리프, 라고 외치기만 해도 금방 나타날 텐데.

    당신도 내가 이곳에 온 걸 알까. 혹 알고 있다면 일부러 날 만나러 오지 않는 걸까.

    미옌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왕좌의 발치에 엎드렸다. 갈리프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왕좌를 끌어안고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문득 시야에 무언가가 거슬렸다.

    ‘뭐지?’

    별천지이긴 하나 기둥과 왕좌, 우물을 빼면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에 거슬리는 게 있다고.

    설마, 형제들이 날 지켜보고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눈물이 메말라버렸다. 미옌은 홱 몸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형제들은 없었다. 그러나 형제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하, 대체…….”

    열 개의 왕좌, 아무것도 없어야 할 맨 마지막 자리 끝자락에 무언가가 있었다.

    뼈대가 세워지고 있던 열한 번째 왕좌였다.

    그때, 신전 바깥에서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옌은 황급히 몸을 피해 갈리프의 왕좌 뒤로 숨었다.

    영혼의 인도를 마치고 돌아온 사도들이었다.

    “내가 막내 탈출이라니! 내가, 이 몸이! 형이라니!”

    으하핫핫하! 아홉 번째 사도, 나타가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막내라는 단어와 영 어울리지 않는 구릿빛 피부의 근육질 사도는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맨 마지막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린애 취급을 받아오며 살았다. 이제 형제들의 심부름꾼 노릇은 끝이다 이거야!

    그런 나타의 등을 팔리야가 찰싹 때렸다.

    “아, 왜 때리십니까!”

    “으이구, 새로운 형제를 챙길 생각은 안 하고. 언제 철들래?”

    나타가 얼얼한 등을 문지르며 서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무스는 온화한 낯으로 은근슬쩍 팔리야의 편을 들었다.

    “나타. 열 번째 사도가 될 아이는 연약하고 가냘프지. 네가 많이 도와주어야 할 텐데 말이다.”

    “사도면 다 똑같은 사도지, 혼자 연약하고 난리래요?”

    나타가 툴툴거렸다. 다무스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며 온화하게 말했다.

    “그 앤 인간이었잖니.”

    ‘인간?’

    왕좌 뒤에 숨어있던 미옌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인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갈리프의 힘을 떼어 만든 위대한 별만이 오로지 사도가 된다. 권능을 받고 영혼을 인도할 자격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줄 아는가.

    미옌의 몸에서 어둠이 일렁거렸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다무스의 멱살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대체 이곳이 어떻게 미쳐 돌아가기에 인간 따위가 왕좌를 부여받게 됐단 말인가.

    한때 갈리프의 사도로서 긍지를 가지고 살았다. 태고의 빛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 분의 뜻에 따라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던 적이 있었다.

    사도는 갈리프의 창조물 중 가장 위대하고 강했다. 수백억 개의 영혼을 모아도 사도 하나의 티끌만큼도 빛을 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감히 인간이 사도가 된단 말인가.

    고작해야 어둠의 먹이가 될 뿐인 빛알갱이 주제에.

    미옌은 분노했으나 실낱같은 이성이 가까스로 다리를 붙들었다. 동시에 방금 전 실수로 흘려버린 어둠을 형제들이 눈치챌까 속이 졸아들었다.

    왜 이따위 걱정을 하고 있는 거지. 난 태고의 어둠을 가진 존재인데. 뒤처질 게 없음에도 형제들 앞에 자꾸만 작아지는 스스로가 한심해 화가 났다. 배신자로 낙인찍혀 버려졌던 기억이 생각보다 뇌리에 깊은 상처를 남겼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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