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태어난 이래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사도였고, 영생을 사는 신의 조각이었으니까.
다리가 모래처럼 바스라졌다. 정신이 번쩍 든 미옌의 낯이 사색이 되었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갈리프 님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세요…….”
그러나 갈리프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미옌이 아무리 애원하고 절규해도 손끝 하나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느새 목 끝까지 어둠이 차올랐다. 죽음이 코앞이었다.
“갈리프 님―!!”
틈새에 완전히 빠지기 직전, 절망 어린 미옌의 눈에 갈리프가 비쳤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정말로 미안하구나, 미옌.”
【 사도 카얄 】
죽음은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소멸됐을 줄 알았는데. 미옌은 차차 돌아오는 사지의 감각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창백하긴 했어도 손바닥에 도는 온기는 그대로였다.
시력도 어느샌가 회복되었다. 어둠에 익숙해졌는지 온통 시커먼 색 일색이라 생각했던 공간 속에서 희끄무레한 덩어리 하나가 보였다.
자그마한 짐승 같기도, 먼지를 뭉쳐놓은 것 같기도 했다. 반질거리는 눈알을 깜빡이며 퐁퐁 뛰어 다가오더니 미옌 앞에서 멈춰 선다.
훗날 중세로 시간 여행을 하는 시아가 만나게 될, 바로 그 어둠 덩어리였다.
[드디어 왔네?]
“…네가 어둠이냐?”
김이 샜다. 모든 빛에게 영원한 소멸을 선사하는 어둠이니 당연히 거대하고 압도적인 존재일 거라 상상했는데.
눈앞에 있는 건 방정맞은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깔깔대는 먼지 덩어리였다.
[말버릇 하고는. 카얄. 날 카얄이라고 불러.]
“하, 어둠 주제에 이름까지 있다고.”
카얄, 태고의 어둠은 미옌을 이끌고 제집으로 향했다. 새의 둥지 같은 조그마한 짚 뭉치였다. 앞으로 지내게 될 곳이라 공들여 마련했다나 뭐라나.
어이가 없었다. 왕좌와 거대한 기둥이 있었던 사도들의 신전과 새삼 비교가 됐다.
어둠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이 나서 주절거렸다. 제게 잡아먹히러 오는 영혼 이외에 온전한 형태로 살아있는 말 상대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빛에게도 갈리프란 이름이 있잖아. 쌍둥이인데 누군 이름이 있고, 누군 없으면 좀 그렇지 않겠어?]
“쌍둥이?”
[너희들 식 표현으로 그렇다는 거지. 우린 우주가 생겨날 때 동시에 태어났거든.]
그러나 어둠은 곧 미옌을 제 영역에 받아들인 걸 후회하게 된다.
“지긋지긋해! 이딴 곳에서 뭘 하란 말이야…….”
[아악! 내 배 속에서 그만 좀 난리 쳐!]
미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어둠의 공간을 헤집어놓고 다녔다. 바닥을 쥐어뜯질 않나, 벽을 때리고 권능으로 불꽃을 소환해 사방을 지져놓았다.
“날 여기서 내보내 줘! 다시 대지로 돌아가게 해달란 말이야!”
물론 미옌이 갇힌 곳은 위아래의 구분이 불분명한 어둠 속이었지만, 태고의 어둠 카얄은 그를 제 배 속에 고이 모셔둬야 하는 입장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괴로워해야만 했다.
결국 어둠은 다시 한번 조그마한 먼지 덩어리의 모습으로 제 배 속에 갇힌 미옌 앞에 나타나 소리쳤다.
[어차피 넌 내가 내보내 주기 전까진 여기서 못나가. 너, 벌받는 중이라며. 이런 식으로 구는데 천칭이 널 용서해 주겠니?]
어둠은 식식거리며 미옌의 발목을 깨물었다. 미옌은 비명을 질렀다. 고작해야 토끼만 한 크기의 어둠이 물었던 자리가 메마른 모래가 흩어지듯 뻥 뚫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
소멸이었다.
미옌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저런 모습이라 잠시 방심했는데, 태고의 어둠은 태고의 어둠이었다. 언제든 저를 소멸시킬 수 있는 위대한 존재.
지금까지의 반항이 다 무의미해져 버린 기분이었다.
녀석은 날 봐주고 있었던 거였어. 어린아이 떼쓰는 것에 장단을 맞춰준 것뿐이잖아.
그 후 미옌은 우울한 낯으로 공간 한 구석에 틀어박혔다. 화가 난 어둠도 한동안 미옌을 찾지 않았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둠은 지나치게 조용한 미옌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고를 칠 땐 속이 훤히 보여 그나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쉬웠는데.
계란인 양 몸을 둥글게 말고 하루 종일 자신이 영혼을 소화시키는 걸 지켜만 보는 미옌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내가 깨물어서 겁먹은 건가.
결국 어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무해한 모습으로 미옌 앞에 나타났다.
작고 귀여운 토끼였다.
[야, 괜찮아?]
검은 솜뭉치가 눈을 깜빡이며 그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미옌은 눈동자만 굴려 잠시 어둠을 바라보다가 한층 더 몸을 웅크렸다.
“…갈리프 님은 날 잊어버리셨나.”
[잊었을 리가. 걘 널…….]
중얼거리는 미옌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있었다. 어둠은 그제야 그가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걸 깨달았다.
미옌은 고독이 만든 그늘에 잠식되어 있었다. 당연했다. 별들이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제자리를 찾아온 게 벌써 여러 번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까마득한 후손의 후손이 벌써 호호백발 노인이 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동안 미옌은 내내 이곳에 있었다. 갈리프도, 형제도 만나지 못한 채 사도로서 그 무엇도 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어둠은 그가 저지른 잘못을 오랜만에 떠올려 보았다. 영혼을 멋대로 빼돌리고 심판해 천칭이 기울어버렸댔지.
그 자리에서 천칭에 올라 소멸되어도 할 말이 없는 중죄였다. 천칭이 기운 탓에 죄 없는 별들이 그가 빼돌린 영혼 대신 내 먹이가 되었으니까.
갈리프가 애원하며 미옌을 삼키지 말아 달라고 했을 때도 솔직히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잘못한 본인이 벌을 받아야지, 안 그래?’
‘내가 데려올게. 어긋난 운명의 영혼들을 찾아올게. 그때까지만 기다려줘. 미옌이 소멸되지 않도록…….’
솔직히 미옌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면 아주 오랜 세월을 영혼 없이 살 수도 있었다. 그만큼 사도는 대단한 존재였고, 한때 사도를 먹어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미옌이란 놈은 첫인상부터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갈리프를 봐서 겨우 참아주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배 속에서 난동을 부려?
오만방자한 네놈 하나 때문에 우주가 엉망이 되었는데.
그래서 한동안 미옌을 미워했었다. 갈리프의 부탁이라 먹지도 못하는 것을 달래고 돌봐줘야 했으니까.
그러나 오랜만에 보는 미옌은 지나치게 수척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지독한 외로움이 제게도 물씬 와닿았다. 아무리 그가 사도라고 해도 태고의 어둠 앞에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미옌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처럼 떨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가엾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하. 내가 뭘 바라겠어. 애초에 그릇된 신이었다고. 날 여기에 버려두고 잘살고 있겠지. 다른 형제들은 갈리프에게 아부를 잘하는 편이었으니까.”
[미옌. 있잖아. 천칭은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해.]
“…알아. 그래서 어쩌라고. 대단하신 갈리프의 천칭을 누가 움직이겠어.”
[그게 아니라, 으.]
어둠은 미옌의 발치에 동그랗게 앉아 머리를 툭 기댔다.
[천칭은 누군가가 만든 게 아니야. 이 우주가 점에서 시작될 때부터 존재했어.]
그 말에 미옌은 내내 수그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너와 갈리프는 태고의 빛과 어둠이잖나.”
[그건 맞지만 최초의 존재는 아니지. 천칭은 우주의 균형을 이루는 절대적인 법칙이야. 나와 갈리프도 천칭의 뜻에 따라 태어났고, 그렇기에 천칭을 거스를 수 없다고.]
어둠은 미옌의 기분이 좀 나아진 것처럼 보이자 안심했다. 아닌 척하면서도 그가 은근히 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갈리프는 널 버린 게 아니야. 그러니까 너도 여기서 얌전히 있어. 괜히 내 배 속을 어지럽히지 말고.]
넌 갈리프 다음으로 거대한 빛이라 질량이 크단 말이야.
“…알았다.”
어둠은 이내 통통 튀어 시커먼 공간 속으로 녹아들었다. 다시금 혼자 남겨진 미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갈리프 다음으로 거대한 빛이라.”
그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날 이후 미옌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온 듯 보였다.
예전처럼 발악하며 난동을 피우지도, 둥지에 음침하게 처박혀 있지도 않았다. 간간이 허공을 향해 카얄, 하고 어둠의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묻곤 조그마한 토끼의 모습으로 나타난 어둠과 시시덕거리며 지냈다.
어둠은 그런 미옌과 꽤 가까워졌다.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또다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어둠은 이제 미옌에게 제법 많은 것들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짐승 같은 놈.”
[식사하는데 말 걸지 말아 줄래? 입맛 떨어지니까.]
어둠은 토끼의 모습으로 제 앞에 떨어진 빛알갱이들을 주워 먹었다. 천칭의 심판으로 제게 보내진 영혼들이었다.
미옌은 맨바닥에 주저앉아 어둠에게 먹히길 기다리는 영혼들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한때 인도자로서 제가 마주했던 무수한 영혼들과 다를 바 없는 것들이었다.
왱알거리는 조그만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오래전 강둑에서 죽은 여자와 비슷한 말이 들렸다.
‘이렇게밖에 못 살아보고 죽어야 한다니. 애초부터 공평하지 못한 세상이었는데.’
미옌은 말없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아귀가 하얗게 변해 파르르 떨리는 걸 등 뒤로 숨겼다. 애써 평소처럼 웃으며 장난스레 어둠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렇게 영혼을 먹어대고도 또 먹는 거냐.”
[뭐래. 지금 이런 거밖에 못 먹는 거 안 보여?]
그때였다.
“…이런 거라니, 넌 이 아이가 고작 먹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미옌은 체념하듯 조소하고 있었다. 부정한 심판에 반항하던 예전과는 분명 다른 태도였으나, 어둠은 그런 미옌에게서 본능적인 불길함을 느꼈다.
바닥을 오물거리던 어둠이 고개를 들었다. 흰자위 없는 새까만 눈동자가 초점 없이 반질거렸다.
[이봐, 미옌.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은데.]
어둠은 조그마했으나 존재감이 확실했다. 미옌은 발치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토끼의 시선에 주춤 물러났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 너머로 모든 것을 소화시키는 태고의 어둠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어둠을 목격하는 순간, 얼음장 같은 소름이 전신을 휩쓸었다. 압도적인 힘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미옌은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영혼이니 삶이니 하는 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이 빛 덩어리들은 내 양식일 뿐이야. 너희들 식으로 얘기하자면 에너지랄까.]
에너지. 그저 힘이란 말인가.
볼썽사납게 경련하는 카얄의 입꼬리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