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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17)화 (117/292)
  • 117화 

    “그런데 편지를 남긴 사람을 찾으려고 했더니,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라 놀랐던 거지?”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와 똑 닮은, 어쩌면 또 다른 나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무려 마도 시대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내게 남긴 거긴 했지만.

    [이 일기를 3587년의 시아 켈튼이 읽고 있다면, 내 계획은 성공한 거겠지.]

    [부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아주길.]

    일기를 쓴 사람을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묻고 싶었다.

    왜 하필 나인가요?

    내가 정말 마도 시대를, 라크시스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시아는 다 마신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 사실 못 찾아도 괜찮아요. 편지는 별 내용 아니었거든요.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헬릭스 전하.”

    헬릭스는 대답 대신 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별 내용이 아닐 리 없다. 대마법사를 끼고 황자를 불러내면서까지 찾으려 했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고작 시시콜콜한 안부를 물었을 리가.

    하지만 헬릭스는 캐묻지 않았다. 시아가 비밀로 하려고 하는 데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렇게 갈리프도흐로의 방문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헬릭스는 시아의 눈치를 보며 혀끝에서 말을 굴렸다.

    저녁에 시간 되냐고 물어볼까. 같이 식사나 하자고 말이야. 시아가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 타이밍을 재고 있던 참이었다.

    “잠깐.”

    저 멀리 유리창 너머로 무언가가 움직였다.

    “방금 누가 있지 않았어?”

    “네?”

    헬릭스가 손을 뻗어 수국관을 가리켰다.

    “…저기가 네 방이었다며. 4025호.”

    갑자기 무섭게 왜 그러세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는데.

    “……!”

    진짜였다.

    오싹했다. 반신반의하며 올려다본 창문에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공사 현장의 인부라기엔 장비 하나 없는 실루엣에 지나치게 긴 머리까지.

    흐릿해서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분명 자신과 닮았다던 그 사람이었다.

    헬릭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야. 네가 찾던 사람.”

    구름이 걷히며 햇빛이 수국관 전면을 훑으며 펼쳐졌다. 창문에 반사된 빛에 잠시 눈을 찡그린 찰나, 그림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텅 빈 창문을 보자마자 시아와 헬릭스는 눈을 마주쳤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목울대가 울렁이고, 숨을 가득 삼킨 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국관으로 뛰어올라 갔다.

    “전하! 어디 가십니까아아!”

    분위기 좋으라고 근처에서 꽃을 사서 오던 레논은 절규했다. 데이트 좀 하고 있나 싶었더니!

    결국 레논은 따라 나온 기사에게 꽃을 내던지고는 점처럼 사라져 버린 주인과 레이디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멀리 못 갔을 텐데.”

    “흐, 지금 수국관은 공사 때문에 여기 중앙 계단 빼곤 다 막혀있다고 했어요.”

    시아는 헉헉거리며 두리번거렸다. 헬릭스가 어찌나 빠른지 전력을 다해 뛰었는데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인부들도 퇴근한 시간이라 사 층은 텅 비어있었다. 배관을 찾는다고 벽을 뜯어놓은 탓에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전까진 전공책과 노트를 들고 활보하던 곳이었는데. 걸음을 뗄 때마다 일어나는 먼지가 구두 코에 뽀얗게 묻었다.

    스산한 바람이 일었다. 공사 때문에 대부분의 창과 문이 열려있던 탓이다. 노을이 격자무늬를 그리는 복도에서 저 멀리 한 부분만 유독 어둡다. 유일하게 닫혀있는 문 하나가 드리운 그림자였다.

    대학 시절 내내 수국관에서 살았던 시아는 닫힌 방이 어디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문제의 4025호였다.

    “…저기예요. 제가 지냈던 방.”

    원인 모를 불길함이 오싹 돋아났다.

    이곳이 여느 때의 기숙사였으면 방문이 닫혀있는 것이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사 중인 수국관의 많고 많은 방 중에서, 하필 수상한 그림자를 발견한 방만이 닫혀있었다.

    그리고 그게 한때 내 방이었다는 게 문제지.

    시아와 헬릭스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4025호엔 분명 무언가가 있다. 물론 우연히 방문이 닫혀있을 수도 있을 터다. 예컨대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든가 하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동물적인 직감은 두 사람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냈다.

    4025호에 그들이 찾던 존재가 있을 것이다.

    시아와 헬릭스는 행여 바스락거리는 소리라도 날까 봐 조심스레 복도를 걸어 방으로 다가갔다. 당당하게 걸어가 문을 열어젖히고 안을 들여다보아도 됐는데 왜 이렇게 숨게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 기숙사 방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시아는 손가방을 든 팔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긴장해서 그런 거겠지. 팔목 마디마다 힘줄이 아려왔다. 시아가 주먹을 꽉 쥐며 팔에 힘을 주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긴장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팔이 아팠다. 하긴 두 사람은 첩보 영화에서 적진을 급습하는 스파이 같은 모양새이긴 했다.

    헬릭스는 말없이 그녀의 팔을 감싸 쥐며 떨림을 멎게 도와주었다.

    “시아야, 숨 쉬어.”

    “…네.”

    지나치게 조심한 것치고 복도에는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 괜히 긴장했나 속으로 민망해하며 4025호에 다다랐을 때였다.

    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

    몸이 낚아채이듯 끌려갔다. 헬릭스는 시아를 데리고 순식간에 문이 열릴 벽면에 바짝 붙어 숨었다.

    ‘안에 사람이 있어요!’

    ‘우리가 본 게 헛것이 아니었어.’

    두 사람은 속삭이며 경첩과 아슬아슬 닿는 부분에 귀를 밀착시켰다. 역사 깊고 고풍스러우나 그만큼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4025호의 방문은 안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했다.

    젊은 남자였다.

    [드디어 만나는군요.]

    느릿하게, 또박또박 흘러나온 음성은 상당한 미성이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남자가 준수한 외모일 거라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젊은 뉴스 진행자 같은 목소리는 정중하고 듣기 좋았으나 왠지 모르게 서늘하게 들렸다. 마치 독을 품은 꽃처럼, 상대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어조였다.

    시아는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내가 여기까지 달려온 건 나와 닮은 사람 때문이었는데.

    그렇다면 저 남자는 누구지?

    그때였다.

    […네가 살아있을 거라 생각했지.]

    대답이 들려왔다.

    남자의 상대는 시아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소름이 돋았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던 거야. 헬릭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시아를 바라보았다.

    철컥. 살얼음 같은 정적을 뚫고 실린더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장전된 리볼버가 흘린 죽음의 냄새가 이곳까지 풍기는 것 같았다.

    총구는 어디를 향해있을까.

    미성의 남자?

    아니면 나와 닮은 여자?

    후자일 경우 의문을 해결해 줄 유일한 존재가 죽어버리게 된다. 그게 아니더라도 총알이 날아가는 순간 이곳은 살인 사건의 현장이 될 터였다.

    남자가 종달새처럼 웃었다.

    [그럼 제가 당신을 죽일 거란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총구 앞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과 닮은 여자였다.

    시아는 곧바로 움직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남자를 저지하려 했으나 헬릭스가 가로막았다.

    ‘전하!’

    ‘위험해, 시아야. 너까지 다치면 어쩔 셈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부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된 것도 아니었고, 시아와 헬릭스 모두 무방비한 상태였다. 자칫 휘말려서 황자가 총을 맞게 된다면 그것만큼 큰일도 없었다.

    시아는 어쩔 수 없이 멈춰서 4025호 안의 대화를 마저 엿들었다. 그러곤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시아 켈튼. 아니, 갈리프.]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일까.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들어버린 탓이다. 시아는 머릿속이 급격하게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시아 켈튼?

    갈리프?

    두 이름이 왜 동시에 나오는 거지. 무슨 관련이 있다고. 4025호의 방문 너머로 끝없이 들려오는 대화는 예상을 뛰어넘은 탓에 받아들이기 벅찼다.

    하도 놀라서 머리가 멍했다.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 * *

    수국관 4025호의 시아 켈튼.

    그녀는 갈리프였고, 시아 켈튼이었다.

    3522년, 마도 시대의 종말.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은 폐허 더미에 멍하니 앉아 갈리프는 생각했다.

    ‘내가 살아있다니.’

    먼 발치에 떨어져 있는 낡은 일기장이 보인다. 저 일기장을 가져오는 대가로 난 영원히 소멸되었어야 했는데.

    어째서일까. 나는 어떻게 살아있는 것일까.

    태고의 천칭. 이 작은 우주의 근원이자 별들의 균형을 이루는 초월적인 법칙.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천칭의 법칙을 통해 존재한다. 낮과 밤, 불과 얼음, 여름과 겨울, 삶과 죽음.

    태고의 빛(Galipe)과 어둠(Kayal) 역시 천칭에서 비롯되었다. 인간들은 창조의 권능을 가진 빛과 소멸의 권능을 가진 어둠이야말로 우주를 이루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태고의 존재요, 우주의 절대자는 사실 태고의 천칭이었다.

    천칭의 미묘한 이치와 엄정한 기준은 절대적이었다. 천칭을 매단 작은 점에서 일어난 폭발로 우주가 생겨난 이래, 가장 위대하다는 빛과 어둠도 천칭의 접시를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천칭은 우주의 균형을 수호하는 심판자였다. 거대한 별부터 죽음의 별, 하다못해 우주에 떠다니는 먼지조차 천칭이 세워놓은 균형의 법도를 어기지 못했다. 접시가 기울면 무언가는 태어나고, 무언가는 죽음을 맞는다. 그것은 균형의 우주에서 태어난 모든 존재가 감내해야 할 운명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런 태고의 천칭이 또 한 번 그녀의 거래를 들어주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균형을 어그러뜨리는 거래에도 천칭이 응해준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첫 번째 거래는 다음과 같았다.

    [라크시스 옌의 영혼을 구원하는 대신 신으로서의 모든 것을 대가로 지불한다.]

    그것은 수천 년도 훨씬 전의,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그녀가 아직 온전한 신이자 태고의 빛인 갈리프였을 때였다.

    “울리아트, 이 작은 생명을 보십시오. 갈리프 님은 정말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분홍빛 코에 복슬한 털이 아주 귀엽습니다. 갈리프 님은 어떻게 토끼를 만드실 생각을 했는지.”

    “다무스, 형제여. 갈리프 님이 만드신 모든 생명은 귀하고 아름답지요. 토끼가 밟고 선 땅 밑의 지렁이도, 심해를 가르고 헤엄치는 눈 없는 물고기도 모두 귀하고 아름다운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울리아트도 인간들 얼굴 엄청 따지지 않나? 저 녀석 말이야, 얼마 전엔 자기 신전에 찾아온 예쁘장한 소년에게 평생 자기를 모시는 사제가 되라는 신탁을…….”

    “팔리야! 누가 들으면 오해합니다! 갈리프 님이 제가 영혼을 차별하는 사도라고 생각하면 어쩔 겁니까?”

    “깔깔깔! 그러게 누가 그런 신탁을 내리래? 변태같이!”

    차원 너머 신들의 세계. 그래봤자 동그란 우물과 열 개의 왕좌가 전부인 신전이었지만 사도들은 언제나처럼 옹기종기 모여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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