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16)화 (116/292)
  • 116화 

    시아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역시 원하는 답이 아니었나 보다. 그녀가 요르문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주고받는 게 보였다.

    “저와 닮았다면 혹시 의술원의 그 환자가…….”

    “그럴 가능성이 높지.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을 어떻게 찾느냐는 말이야.”

    소곤거리는 소리에 저절로 귀가 기울여진다. 헬릭스는 맥락도 모르는 대화를 잠자코 듣다가 가만히 손을 들었다.

    “그 사람을 꼭 찾아야 되는 겁니까?”

    “…네. 찾을 수 있다면요.”

    이미 일주일도 더 된 일이었다. 더군다나 홈커밍데이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갈리프도흐의 출입자가 통제되지 않았다.

    시아는 이미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학교 내에 경비원들이 곳곳에 상주하고 있긴 하지만, 그분들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정 인물을 구태여 기억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일기장을 부탁한 것 외에 딱히 눈에 띌 만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요르문도 더는 소득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시아와 요르문은 자리를 뜰 채비를 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는데도 맞이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헬릭스 전하.”

    “…나야말로 고마웠지.”

    “전 요르문 님과 먼저 일어나볼게요. 일단 갈리프도흐에 다시 가보려고요.”

    그때였다.

    “시아야.”

    순간 소매가 붙들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먼저 일어서 있던 요르문도 멈춰 섰다. 시아는 안타깝게 들리기까지 하는 목소리에 몸을 일으키다 움찔거렸다.

    결 좋은 금발이 선 굵은 얼굴 위로 기울었다. 왜 그렇게 자신을 보는지 모를 정도로 애타는 모습이었다.

    이런 시선을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다. 헬릭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조금 더 애처롭고, 열기가 가득한. 어쩌면 지독할 정도로 휘감겨오는 감정을 담아서.

    쏟아지는 별 밑에서.

    넘실거리는 튤립 속에서.

    은발을 지닌 아름다운 마법사가 자신을 그렇게 본 적이 있었다.

    “나도 같이 가.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몰라.”

    시아는 얼떨결에 승낙했다.

    헬릭스로부터 라크시스를 떠올린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 * *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인 거죠! 다행이다 뿐이겠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이렇게 도와주셨는데!”

    레논은 수국관 공사 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서는 호들갑을 떨었다. 시아는 수국관의 경비와 학생들을 붙잡고 질문 중이었다.

    놀랍게도 갈리프도흐에 도착한 건 시아와 헬릭스 그리고 공기 정도의 취급을 받는 보좌관 레논뿐이었다.

    헬릭스가 시아를 따라간다고 했을 때, 요르문은 반대하려 했었다. 헬릭스가 시아에게 다가올 연회에서 첫 춤을 신청한 걸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상치 않아.’

    시아를 바라보는 헬릭스의 시선이 보통이 아님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시아가 좋아하는 남자도, 이 사람 아니면 안 되겠다며 울고불고 매달린 남자도 아니었다. 요르문에게 헬릭스는 그저 같은 대학을 다니다가 제 딸에게 반한 놈팡이에 불과했다.

    황자라는 신분 외에도 준수한 외모에 상당한 학식과 재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언제나 최우선 순위의 배우자감으로 꼽히는 사람이 헬릭스였으나, 요르문 켈튼 역시 그런 방면에서는 헬릭스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마 요르문은 시아의 짝으로 눈에 차는 사람을 평생 만나지 못할 터였다.

    헬릭스가 그렇게 시아를 따라나서려 했을 때였다.

    ‘황자 전하. 이 문제는 제가 시아와 알아서 해결하겠습…….’

    ‘로드 켈튼, 여기 계셨군요! 황제 폐하께서 로드 켈튼을 찾으십니다.’

    유리온실로 뛰어든 시종이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헉헉거리며 요르문을 붙잡았다.

    ‘안 돼. 나 바쁘다고 전해.’

    사실 그간 황궁의 부름도 매번 무시해 온 터라 찔리는 것이 많았다. 요르문은 시아와 함께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이윽고 유리온실에 들어온 사람을 보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황제를 이렇게까지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건 자네밖에 없을걸세. 요르문 켈튼.’

    요르문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는 황제였다.

    “어머니가 날 도우려고 일부러 찾아오신 건 아닐 거야. 로드 켈튼이 워낙 황궁에 발길이 뜸하다 보니.”

    “이 와중에 사실관계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악!”

    헬릭스가 사람 좋게 웃었다. 레논은 결국 폭발하며 헬릭스의 양어깨를 붙들고 이를 악다물었다.

    아무리 제 상관이지만 정말이지 이런 데선 둔해빠졌다.

    “기회입니다, 전하. 꼭 고백하세요. 제발 이번엔 꼭 뭐라고 한마디라도 하시깁니다?”

    “…나도 그러고 싶다.”

    황자의 얼굴이 푹 익었다. 후계자 수업이니 뭐니 다른 건 다 잘하면서 좋아한단 말 한마디는 왜 못할까.

    레논은 또 한 번 잔소리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꽉 붙든 어깨를 슬며시 놓고, 응원하듯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러고 싶으면 하시면 됩니다. 자자, 어서 가세요. 이러다 추리영화 한 편 찍고 끝나겠어요.”

    헬릭스는 레논의 흘긋거림 끝에 있는 시아를 바라보았다.

    유백색 원피스를 입고 탐문수사를 벌이는 시아는 마치 로렌 허슬러 같았다. 하얗고 조그마한 손가방이 묘하게 마도 시대 레이디 양장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 때문인가. 앨런 어셔의 소설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시아는 그런 모습도 예뻤다.

    헬릭스는 소리 없는 응원을 들으며 시아에게 다가갔다. 시아는 나이 지긋한 경비원과 대화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못 보셨다고요.”

    “그럼. 아가씨같이 생긴 학생이 어디 흔해야지. 내가 지나가다 아가씨를 봤으면 분명 기억했을걸?”

    시아는 한숨을 쉬며 인사하고는 돌아섰다. 그러다 바로 뒤에 서있던 헬릭스에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미안. 놀랐어?”

    헬릭스는 고개를 살풋 숙여 시아를 살폈다.

    “일이 잘 안 풀렸나 보네.”

    “네. 아무도 못 봤대요. 그럴 수밖에요. 하긴 공사 중인 기숙사에 사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공사 중이라니?”

    시아는 아차 싶었다. 시간 여행의 여파로 생겨난 일은 되도록 주변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또 무엇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헬릭스가 이미 들어버렸다. 시아는 애써 아무 일도 아닌 척했으나.

    “공사 중인 기숙사에 누가 살고 있다는 거야?”

    “그게…….”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간 방금 만났던 경비원이 기숙사 관리 소홀로 일자리를 잃게 될 것만 같았다. 시아는 결국 에둘러 사실의 일부를 말해주었다.

    “전하께 일기장을 준 후배 말이에요. 제가 살던 기숙사 방을 물려받아 쓰다가 일기장을 발견했다고 했잖아요.”

    “응, 그랬지.”

    파이프 골조에 빙 둘러싸인 수국관은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는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시아는 사 층의, 한때 제 방이었던 4025호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제 방은 올해부터 공사 때문에 폐쇄된 저 방이거든요. 그러니까 전하께 거짓말을 하면서 일기장을 전해달라 부탁한 거죠.”

    헬릭스는 시아의 말을 이해하느라 잠시 멈춰 섰다. 뒤늦게 이해한 사건의 전말에 뒷골이 당겼다. 그 사람은 뭐 하러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일기장을 준 거지? 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시아는 무사히 일기장을 찾았다. 그러면 된 거 아닐까.

    혹시 누군가 일기장에 심한 장난이라도 쳐서,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범인을 잡으려고 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화가 났다. 시아가 요르문의 친딸이 아니라는 이유로 괴롭히던 무리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모양이었다. 요르문 켈튼까지 나서서 범인을 찾으려고 하는 걸 보면.

    하지만 그런 일이었다면 요르문은 진작 공권력을 이용해 딸을 괴롭힌 놈들을 밟아두었을 것이다. 흥분한 헬릭스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모자란 놈들. 시아, 그놈들은 평생 반성하지 않을 거야.”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보기 드물게 황자가 화를 냈다. 시아는 당황했다.

    “차라리 일기장에 적힌 글씨로 놈들 필적 대조를 하는 게 낫겠어. 이건 고소해야 돼, 시아야. 한번 크게 망신당해야 정신 차리겠지.”

    어쩌면 정신을 못 차릴 수도 있지만. 시아는 그제야 헬릭스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깨닫고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이건 패트릭 때문이 아니라.”

    “패트릭? 설마 패트릭 그레이엄?”

    아차, 바뀐 시간에서 패트릭은 아무 잘못 없댔지.

    “아아뇨, 아니에요. 잘못 말했어요.”

    “그럼 앨리어스?”

    “그게 누군데요?”

    헬릭스는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시아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위로하듯 말했다.

    “…아니야. 네가 잊어버렸으면 됐어. 그런 자식은 기억하지 않아도 돼.”

    앨리어스인지 뭔지. 이번엔 네가 날 괴롭혔냐.

    헬릭스의 반응을 보아하니 바뀐 시간대의 시아 켈튼도 패트릭 같은 자식을 만났던 모양이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애꿎은 사람 괴롭히는 머저리.

    어떻게 이렇게 비슷할까. 아무리 과거를 바꿔도 나는 의술사 시아 켈튼이 될 운명이었나 보다. 나를 괴롭힌 녀석들도 어쨌든 존재하고, 마리나 카트린 같은 친한 친구들도 그대로였으니까.

    시아는 헬릭스를 다독였다.

    “전 괜찮아요. 옛날 일인 걸요.”

    “내가 만약 너와 아카데미를 같이 다녔다면 그런 녀석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두지 않았을 거야.”

    황자의 목소리가 우울했다.

    시아는 그런 헬릭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 사람 하나는 착하고 괜찮다. 지금도 그렇다. 모른 척 넘어가도 될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려고 한 거였다.

    전하의 연인이 될 사람은 정말 행운이겠네. 저렇게 모든 걸 다 갖춘 남자도 드무니까.

    시아는 샐쭉 미소 지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네요. 그래도 저 켈튼의 딸이었어요. 그래서 사실 패, 아니 앨리어스가 제게 뭘 어쩌지도 못했는걸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되는 건지.”

    “저 정말 괜찮아요. 진짜로요.”

    대화가 어색하게 끊겼다. 시아와 헬릭스는 수국관 내정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볼일이 끝났으니 헤어지자고 하기엔 애매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레논이 발 빠르게 근처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사 왔다. 헬릭스와 시아는 한 뼘 정도 떨어진 상태로 한참을 말없이 커피만 홀짝였다.

    흐드러진 이팝나무에서 꽃잎이 하나둘 날렸다. 멀찍이서 레논이 입 모양으로 무어라 하는 게 보였다. 시아에게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라고 성화인 거겠지.

    헬릭스는 무릎에 떨어진 하얀 꽃잎 하나를 만지작거리다 가만히 말문을 열었다.

    “그럼 그 일기장은.”

    아, 이거요. 시아가 열없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에 편지가 좀 적혀있었는데, 누가 남겼는지 궁금해져서 그랬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