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아직 시작되지 않은 시간 여행이 적힌 부분을 봤을 땐 금기된 서적을 엿본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게다가 문제의 슈테른베슈테크에서의 이중 시간 여행. 바뀌기 전 중세를 기억하는 건 우리들뿐일 거라며 자부심을 갖던 루드윅에, 특등칸을 예매하지 못해 불만이었던 라크시스까지 모두 기억이 나는데.
‘누님만 없어.’
힘주어 생각하지 않으면 자꾸만 잊어버린다. 다무스발 아르카나행 열차에서 누군가가 가방을 붙잡고 홀연히 사라지는 장면이 아스라이 멀어졌다.
과거의 요르문은 분명 친척 누님인 자신을 만났다. 그러나 친척 누님인 자신은 그 모든 순간에서 일부러 지워진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누님을 생각하려 하면 자꾸만 머리가 아팠다. 부작용이라도 겪는 사람처럼 말이다.
‘게다가 난 중세에서 마도 시대로 돌아갔을 땐 바뀐 중세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는데.’
종말 이후에 바뀐 것들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시아에게 고백했다던 패트릭인지 뭔지 하는 놈팡이가 원래는 그녀를 괴롭히던 불량아였고, 재키 레이븐이 등장하는 소설이 원래는 슈나이더 경감의 연작이 아니었다는 것 등 말이다.
‘시아는 모든 시간 여행에서 바뀐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어.’
시아의 시간 여행은 마치 노지를 질주하는 전차 같았다. 그녀가 지나간 세월이 유일한 역사가 되고, 그녀가 건드린 시간만이 유일하게 변하여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마치 시아가 이 우주의 주인공인 것처럼.
그런데 어째서 시아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그녀의 고민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저는 왜 아무것도 모를까요. 답답해요. 시간 여행에 휘말린 건 저인데, 왜…….’
요르문은 그제야 시아가 의술원을 나오는 길에 자신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었던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무엇이 바뀌었는지 시아 본인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그런데 이런 건 어디서 난 거니?”
문제의 일기장은 태평하게 테이블에 누워있었다. 요르문은 인상을 쓰며 모든 사태의 원흉인 일기장을 가리켰다.
“동창회 날 갈리프도흐에 갔다가 받았어요. 제 기숙사 방을 물려받은 후배가 이름을 보고 찾아주러 왔었나 봐요.”
“네, 기숙사 방……? 후배가?”
“대학 다니던 때 쓰던 방에서 발견됐대요. 요르문 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죠? 전 이 일기장을 의술원 가서도 계속 썼었거든요.”
시아는 푸념 조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도 상식 밖의 일을 겪다 보니 이 정도 일은 괴이한 축에도 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요르문은 잠자코 듣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잠깐, 시아야. 네가 갈리프도흐에서 어느 기숙사에 있었지?”
“저요? 어… 수국관이요.”
“정확히 몇 호실이었는지 기억나니?”
“4025호실이요. 그런데 그건 왜…….”
요르문은 이를 악다물며 욕을 짓씹었다.
“젠장, 대체…….”
“왜 그러세요?”
“지금 수국관 공사하잖니. 넌 졸업해서 모르겠구나. 배관 문제 때문에 공사하느라 올해부터 삼 층 위로 전부 폐쇄됐어.”
뭐?
내가 썼던 기숙사 방이 폐쇄됐다고? 하지만 홈커밍데이에서 분명 헬릭스 전하께서는.
‘갈리프도흐 기숙사에 두고 간 거 아니었어? 네 방을 물려받은 학생이 청소하다가 발견했다고 전해달랬어.’
‘홈커밍데이라 네가 올 줄 알고 직접 주려 했는데 홀 안에 차마 들어올 순 없었다더라.’
노란 샹들리에 빛이 번지는 거대한 홀. 왁자지껄한 인파 속에서 내게 샴페인과 일기장을 내밀던 황자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시작된 날이었다.
일기장과 똑같이 하루가 흘러갔다. 시비 거는 패트릭을 만났고, 마리와 카트린과 술을 마시고는 마차에 탔다. 자정의 아르카나 시계탑 종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기절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칠십 년 전의 라크시스 옌이 눈앞에 있었다.
시아는 핏기가 사라진 낯으로 중얼거렸다.
“잠, 시만요. 그럼 황자 전하께 찾아온 건 누구…….”
“황자라니, 설마 헬릭스 황자를 말하는 거니?”
시아는 숨을 삼키곤 겨우 진실을 토해냈다.
“…제게 일기장을 전달해 준 사람은 황자 전하였어요.”
요르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심각한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내 턱을 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다. 지금 내가 당장 연락을 넣고 오마.”
요르문이 이렇게 거침없이 행동하는 모습이 오랜만이라 낯설었다. 방을 박차고 계단을 내려가는 요르문을 황급히 따라가며 시아가 외쳤다.
“요르문 님! 어디 가세요?”
응접실에서 사용인들과 새로 들인 가구를 배치하던 헤이든이 재깍 다가왔다. 요르문은 헤이든을 지나쳐 수화기를 집어 들며 성마른 손길로 다이얼을 돌렸다.
“잠깐만요, 대체 어디에 연락하신다는 거예요?”
대마법사와 연결되어 어쩔 줄 모르는 교환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자동 교환기가 발명되고, 교환소가 사라진 지 벌써 수년째였지만 아직까지도 중앙 교환소를 통해야만 연결될 수 있는 기관이 딱 하나 남아있었다.
- 지금 회의 참관 중이시라 곧바로 연락이… 로드 켈튼께서 전화하셨다고 남겨드릴, 아, 급한 사안이셔서…….
시아는 요르문이 어디에 전화했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설마.”
이내 전화가 연결되었다. 수화기 너머로 밝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 안녕하십니까, 로드 켈튼. 급한 용무라고 들었습니다. 시아와 관련된 일이라고…….
창가에 비스듬히 기댄 요르문은 시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요, 급한 일입니다. 헬릭스 황자 전하. 잠깐 시간 좀 냅시다.”
* * *
“설마 시아와의 첫 춤을 허락하지 않겠다, 그런 말을 하러 오는 건 아니겠지.”
황자의 보좌관 레논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꽃단장을 하고 티 테이블에 앉아있는 헬릭스를 보곤 기가 막혔다.
로드 켈튼과 그의 딸이 황궁에 찾아오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의회에도 출석하지 않는 희대의 방탕 귀족이 황궁에 직접 출두하겠다고 했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다름 아닌 황자를 만나기 위함이라니.
황자가 회의 참관을 마치지도 않고 뛰쳐 나가려는 것을 겨우 막은 게 이 정도였다. 헬릭스는 시아가 황궁에, 그것도 자신을 보러 온단 소식에 잔뜩 들떠 일정을 죄다 취소하고는 유리온실 한가운데 떡하니 들어가 그녀를 기다렸다.
황자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레논은 죽을 맛이었다.
“설마요. 암만 로드 켈튼이 불성실한 귀족이라고 해도 사교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시아는.”
“레이디 켈튼도 켈튼가의 일원인 이상 사교계를 완전히 배제하고 살아가실 순 없겠지요. 대마법사라고 해도 황자 전하를 어떻게 하시진 못할 겁니다.”
따사로운 온기 속에서 나비가 날아다녔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 향이 사방에 은은하게 배어있었다. 황실 정원사가 정성 들여 가꾼 유리온실은 역대 황제들이 가장 신경 써서 관리하던 황가의 보물과도 같은 곳이었다.
황궁 요리사가 급히 솜씨를 발휘한 티 푸드들이 보기 좋게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귀빈을 대접할 때 쓰는 다기들까지 오랜만에 빛을 보았다.
레논은 꾸민 듯 안 꾸민 듯 엄청나게 공들여 무심하게 치장한 헬릭스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온실에 들어온 내내 황자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그 손 좀 어떻게 해보세요. 산만해 죽겠습니다.”
“레논. 나, 티 나나?”
“무척이요. 황궁에 소문 다 나겠습니다.”
“소문? 무슨 소문.”
태연한 척하면서 소문이라는 말에 덜컥 긴장하는 게 뻔히 보였다. 레논은 한숨을 쉬며 헬릭스의 손을 꽉 붙잡아 진정시켰다.
“황자 전하가 레이디 시아 켈튼을 사모하는 것 말이에요. 물론 황제 폐하께선 이미 아시는 것 같지만요.”
“어머니께서?”
“알면 어떻습니까. 오히려 좋아하실걸요. 전하께서 황위를 잇는 데 대마법사라는 든든한 세력이 함께하게 되는 거니까요.”
그때 시종이 다가와 레논에게 귀엣말을 했다.
“두 분 켈튼 모두 도착하셨답니다. 이쪽으로 오시는 중이라는군요.”
온실 속 작은 정원에서 흐르는 개울 소리에 풀잎이 자박자박 밟히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인기척이 나자 헬릭스는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헬릭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뒤돌아본 오솔길 끝에 시아가 걸어오고 있었다.
【 일기장 속의 시아 켈튼 】
헬릭스는 금세 낙담했다.
“…그러니까 일기장을 건네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러 오신 거군요.”
“죄송하지만 제겐 중요한 일이라서요. 황자 전하. 혹시 누군지,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나시나요?”
아까까지만 해도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헬릭스는 차를 홀짝였다. 입맛이 썼다.
그래도 첫 춤을 거절하러 온 게 아니라 다행이다. 눈앞의 두 사람은 내일의 연회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지만. 헬릭스는 시아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예쁜 사람이다. 내 눈에만 예뻤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학부에서 유명했던 건 안다. 양부와 정반대의 색을 가진, 요르문 켈튼의 딸. 스쳐 지나가는 소문에도 시아의 이름은 자주 등장했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것도 그렇게 알았다.
‘전하, 그렇게 앓으시지만 말고 데이트 신청이라도 해보세요. 이 세상에 황자를 마다할 여자가 어디 있다고요!’
‘그 남자에게 의술원 준비로 바빠서 연애는 힘들다고 했다며.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아이고 이 답답아! 레논이 뒤돌아서 가슴 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헬릭스는 애써 무시했다.
언젠간 때가 오겠지. 그녀가 곁에 둘 사람을 원할 때가.
그러나 사랑에 적절한 시기 따윈 존재하지 않는단 걸 헬릭스는 몰랐다. 그가 때를 기다리는 사이에 시아가 누굴 만나게 됐는지 알면 땅을 치고 후회할 터였다.
“얼굴은 정확히 모르겠어. 잠깐 본 거라 기억이 안 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가요.”
헬릭스는 시아가 실망하는 모습에 아차 싶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일기장을 건네받은 학생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아, 맞아. 키가 좀 큰 여학생이었어. 시아 너와 비슷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머리도 너처럼 길고 어두운 색이었고.”
“저랑, 비슷했다고요?”
너와 닮은 분위기의 사람이라 멈춰 섰다고 한다면,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헬릭스 전하!’
‘…시아?’
네가 날 부르는 줄 알고 뒤돌아보았어. 그런데 아니어서 실망했다고 한다면, 청승맞아 보일까.
헬릭스는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랬던 것 같네. 순간 시아 너라고 착각할 뻔할 정도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