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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14)화 (114/292)

114화 

연구실을 나서니 헤이든이 반색하며 눈을 마주쳐 왔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내 문밖에서 주인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드디어 밖으로 나오셨군요.”

“시아는?”

“방에 계십니다. 모실까요?”

헤이든은 주름을 접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요르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헤이든의 뒤를 따랐다.

고택의 복도는 예전과 다름없이 고풍스럽고 제 취향답게 괴짜스러웠다. 벽면을 따라 집 곳곳으로 이어진 파이프들과 태엽 장치들이 오랫동안 멈춰있었던 것만 빼면 말이다.

백발이 된 헤이든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새파랗게 젊던 견습 집사는 어느새 켈튼저를 책임지고 가문을 운영하는 노련한 집사가 되어있었다.

세월이 흐르긴 흘렀구나.

요르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제와 과거를 들춘다고 해서 죽었던 친구가 살아 돌아오거나, 이 세계에서 사라져 버린 마법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마주한다고 해서 현재가 달라지지는 않겠지.

그럼에도 한 가지 달라질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나일지도.’

* * *

시아는 제가 성급했음을 인정했다.

‘그만.’

요르문은 인상을 쓰며 관자놀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마도 시대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 특히 종말 직전은 더더욱.’

이런 요르문 님은 처음이었다. 그녀에게서 등 돌려 멀어지던 요르문은 울적하고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들어가 쉬어라. 나도 피곤하니까.’

이미 시험해 본 적이 있었던 것을 뭐 하러 또 했을까. 시아는 두 번째 시간 여행 직후 헤이든을 통해 현재의 사람이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헤이든은 요르문 님을 제외하고 켈튼가의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나요?’

‘…켈튼가에 몸담은 이래 단 한 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르문 님은 헤이든과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시간 여행에 언제나 함께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같이 슈테른베슈테크의 고성에도 가고, 이중 시간 여행까지 겪어봤던 사람이었으니까.

다무스에선 나만 빼고 모두 바뀐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지.

그래서 현재의 요르문 님도 바뀐 과거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를 누님이라 부르던 과거들을, 광룡의 봉인을 찾아다니던 과거들을.

“바보 같아. 의술사라는 애가 어떻게 사람의 트라우마를…….”

시아는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진정 그 기억이 남아있었다면 나를 양딸로 입양하지 않았겠지. 누님이라 부르던 사람을 딸로 바라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그 딸이 커서 다시금 과거로 간다는 걸 알고 있다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어. 광룡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 중에 요르문 님이 있을 거라고.”

시아는 서럽게 울었다. 죄책감과 미안함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뒤늦게 요르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곤 제가 얼마나 무례하고 모질었는지 알게 되었다.

요르문 님이 내게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호칭은 그저 호칭일 뿐이었다.

요르문 님은 나를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고 아껴주셨는데.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날 이렇게 키울 순 없었을 텐데.

성급했다. 나와 닮은 사람이 의술원에 누워있었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초조하게 굴었던 거다. 시간 여행이 또 무엇을 바꿔버렸나 싶어서, 닮았다던 그 사람이 혹시 평행 세계의 또다른 나 자신이 아니었나 싶어서.

“바보야, 이 바보……. 내게 중요한 건 현재란 말이야. 아무리 광룡의 부활을 막느니 뭐니 해도 그것 때문에 내가 살던 세계가 엉망이 되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냐고…….”

요르문 님이 실망하셨을 거야. 내가 그런 말을 해서.

시아는 한참을 침대 속에 웅크려 시트를 축축하게 적셨다. 진정될 때까지 울었을 땐 이미 해가 넘어가서 방이 어둑해진 후였다.

퉁퉁 부은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목도 잠겨 거칠거렸다. 시아는 수척해진 몰골로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요르문 님을 만나 사과해야 했다. 아직 잠자리에 들 시간은 아니니 지금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시아는 눈물 젖은 옷을 갈아입고는 비척비척 문가로 걸어갔다. 요르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미안한 마음을 전할지 생각하면서 문고리를 잡아당긴 순간이었다.

시아는 문을 활짝 열어젖힌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 시아야.”

요르문이었다.

“…요르문 님.”

노크하려던 손을 멈춘 채 어색하게 웃고 있는 요르문과 눈이 마주쳤다. 헤이든은 어느새 자리를 피해 사라진 후였다.

요르문도 한참을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는지 초췌한 몰골이었다. 시아는 그만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요르문은 당황했다. 동시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죄송해요. 요르문 님. 제가 이상한 소리를 했어요. 로건이 그렇게 돼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아까 한 말은 그냥 잊어주세요.”

시아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사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딸의 모습이 너무 초췌해 보여서 바짝 긴장했던 참이었다.

나 때문인가. 마음이 아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시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요, 소중한 가족이었다.

“힘들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헤이든에게 다 들었어요. 요르문 님이 어떤 세월을 살아오셨는지. 제가 너무 멋대로 제 말만 해서…….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 난 괜찮아, 시아야.”

요르문은 노크하려던 손을 엉거주춤 벌렸다. 어색하게 벌린 두 팔로 천천히 시아를 안아주었다.

시아가 다 큰 이후로 이렇게 품에 가득 안아준 건 처음이었다. 조그맣던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버렸구나. 울음을 삼키는 시아의 가냘픈 등이 파르르 떨린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미안해, 우리 딸.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울지 말렴. 응?”

“요르문 님이, 히끅, 잘못한 게 뭐가 있, 어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공주님 말 제대로 안 듣고 울렸으니까. …이 아버지가 잘못했어.”

그녀의 울음이 갑자기 멈췄다. 진정이 좀 된 걸까. 요르문은 시아를 토닥였다. 그때였다.

“히끅, 흑… 흐읍, 흐어어어어엉!”

“시아야, 왜 그래. 응?”

“역시, 흡, 신경 쓰고 계셨던 거였어요. 흐윽, 요르문 님은 요르문 님으로도 충분한데, 제가 괜히, 으흑, 아버지라고, 흐으어어어엉……!”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시아는 한참 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달래는 요르문도 괜히 감정이 복받쳐 시아 몰래 눈물을 훔쳤다.

복도를 지나던 사용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요르문은 민망해서 얼른 시아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눈치 빠른 헤이든이 따뜻한 초콜릿과 홍차를 가지고 시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두 사람이 모두 진정한 건 초콜릿과 견과류가 듬뿍 박힌 쿠키를 말없이 두 개나 먹어치우고 난 후였다.

“…죄송해요.”

“괜찮대도.”

시아는 겸연쩍게 웃었다. 퉁퉁 부은 눈두덩이 때문에 웃는 건지 눈을 감은 건지 구분되진 않았지만.

요르문은 피식하더니 시아의 빈 잔에 홍차를 따라주었다. 지금 보니 헤이든이 평소와 다르게 커피 대신 홍차를 내왔었다. 시아는 커피를 즐겨 마셨는데.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부티크에 들렀던 길에도 시아는 홍차를 주문했었지. 역시 헤이든은 대단하구나. 연륜 있는 노집사는 시아의 달라진 입맛도 금방 눈치챈 모양이었다.

향을 보아하니 레이디 마거릿이다. 라크시스가 즐겨 마시던 차이기도 했다. 요르문은 오래전 죽은 벗과 똑같이 각설탕 두 개에 우유를 조금 부어서 차를 홀짝이고 있는 딸을 바라보며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젠 좀 진정이 됐니?”

“네. 조금은요.”

시아는 결심한 듯 침대 옆에 고이 모셔둔 가방을 가져왔다. 요르문에게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시아 네가 시간 여행을 해서 과거의 나를 만났다는 거.’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안 믿어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아는 요르문에게 자초지종을 듣고는 시간 여행에 대해 함께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음을 깨달았다.

시아는 가방을 헤집어 물건들을 하나씩 꺼냈다. 그 과정에서 튀어나온 붉은 드레스와 오토마톤의 손목 따위에 요르문이 움찔거렸던 건 미처 보지 못했지만.

한참 후 시아가 테이블 위에 내려둔 건, 짙은 보라색 양장의 손때 묻은 노트였다.

“…모든 건 이 일기장 때문이었어요.”

“일기장? 그건 시아 네가…….”

요르문에게도 낯익은 노트였다. 저 노트를 사준 게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네. 제가 쓰던 일기장 맞아요. 학부 때부터 몇 년째 쓰고 있었고요.”

시아는 한숨을 쉬며 일기장을 펼쳤다. 그녀의 손끝에서 좌르륵 넘어가던 페이지가 한 부분에서 멈췄다.

시아는 일기장을 돌려 내밀었다. 요르문은 당황했다.

“나보고 네 일기를 보라고?”

고개 돌린 시아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아이작 교수 욕이 잔뜩 적힌 일기를 아버지에게 보이는 건 아직까지도 민망한 일이었다.

“여기 앞부분은 읽지 말아주세요. …부끄러우니까.”

부끄러워하는 딸아이도 얼마나 오랜만인가. 어릴 적 저택을 뛰어다니다가 도자기를 깨먹은 후로는 한 번도 못 봤던 것 같다.

요르문은 앞부분을 읽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일기장을 들었다. 그러곤 눈에 처음 들어온 구절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3587년 5월 17일]

[오늘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사실 아직도 꿈인 것만 같다.]

[라크시스 옌을 만났다. 진짜 고대 마법사 옌 말이다. 3517년 5월 17일. 정확히 70년 전 오늘로 되돌아가 살아있는 옌을 만난 거다.]

[눈을 떴을 때 난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 현장 한복판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 라크시스 옌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차탈 황제의 철도 사업에 동참했었으니까.]

* * *

“이게 무슨…….”

관자놀이가 송곳으로 찌르는 듯 욱신거렸다. 요르문은 바닥의 나뭇결을 눈으로 좇으며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요르문 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별거 아니란다.”

사실 괜찮지 않았다. 요르문이 본 일기장의 내용은 그가 살아온 세월과 일치했다.

시아가 과거를 바꿔버린 탓에 첫 번째 시간 여행 이후의 내용은 조금씩 달랐고, 중세로의 세 번째 시간 여행부터는 기록과 실제가 완전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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