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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13)화 (113/292)
  • 113화 

    “…시아야.”

    “넌 알잖아. 날 알고 있잖아. 우린 마도 시대에서 만났잖아, 그렇지? 네 친척 시아 켈튼 말이야. 같이 광룡의 봉인을 찾으러 다니던 가짜 친척.”

    뒤통수가 얼얼했다. 지금 시아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러나 이상하게 그녀의 말이 낯설지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요르문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시아를 바라보았다.

    “말해줘, 요르문.”

    그의 딸에게서 익숙한 인상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시아는 그런 요르문의 두 손을 붙들고 물었다.

    “대체 뭐가 달라진 거야? 이번엔 내가 뭘 바꿔버린 거니?”

    * * *

    “주인님, 식사 하시지요.”

    “입맛 없어.”

    어린아이처럼 투정하는 주인도 오랜만이었다. 요르문은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전원 나간 계기판과 레버들에 둘러싸여 멍하니 앉아있기를 벌써 반나절이다.

    마도 시대가 종말을 맞이한 이후 요르문이 발길을 끊었던 곳이었다. 연구실은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모든 것이 옛 모습 그대로 있었다. 헤이든은 고요함 속에 홀로 있는 주인이 마치 수명을 다해 정지해 버린 오토마톤 같다고 생각했다.

    헤이든은 들고 온 은식기를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담요를 챙겼다. 아흔이 훌쩍 넘는 노집사의 몸엔 오랫동안 주인을 보필했던 연륜과 매너가 배어있었다.

    “아가씨께서도 그러시더니, 이젠 주인님까지 이러시깁니까. 이 늙은이 걱정도 해주십시오.”

    시아를 언급하자 요르문의 등이 움찔거렸다.

    전쟁으로부터 안전할 것만 같던 모르간에서 벌어진 테러였다. 거기에 아가씨까지 휘말렸으니 두 분 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헤이든은 요르문에게서 미묘한 기류를 읽어냈다. 의술원에서 돌아온 시아와 요르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가씨께서 주인님께 마도 시대의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니?’

    ‘예에. 아가씨께서 엄청 충격받으셔서 방으로 들어가 버리시고 아마 주인님도…….’

    이런. 하녀 아이의 말을 듣고 헤이든은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이 저택에서 마도 시대를 언급하는 건 금기사항이었다. 마도 시대와 운명을 함께한 고대 마법사, 라크시스 옌 때문이었다.

    ‘헤이든, 자네는 그 녀석이 죽었다는 게 믿기나?’

    ‘라크가 초상화를 붙들고 폐인처럼 살았던 게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녀석도 외로웠던 거야.’

    한 세기를 넘어선 나이가 무색하게 주인은 여전히 그 옛날과 똑같은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요르문은 언제나 마음 일부를 과거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게으름을 피우며 의회에 나가고 일을 하며 생활하고 있지만 헤이든은 알고 있었다.

    제 주인이 아직까지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것을.

    느리게 늙어가는 마법사는 마음이 무뎌지는 속도까지 느린 모양이었다.

    헤이든은 말없이 요르문에게 담요를 둘러주곤 따뜻한 초콜릿을 쥐여주었다.

    “헤이든.”

    “예, 주인님.”

    요르문은 웅크린 채로 물었다.

    “…칠십 년 전에 말이야. 저택에 머물렀다는 내 친척 혹시 기억 나나?”

    헤이든은 요르문이 드디어 망상까지 하게 되었다며 속으로 혀를 찼다. 친척이라니. 하지만 유능하고도 연륜이 넘치는 노집사는 주인이 무안해하지 않도록 대답을 돌려 말했다.

    “얼마 전에 아가씨께서도 비슷한 질문을 하셨었지요.”

    “…그래?”

    요르문의 잔이 벌써 비었다. 헤이든은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초콜릿을 다시 한번 가득 부어주며 말했다.

    “이곳에서 일한 이래 제가 모신 켈튼은 주인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늙은이 속 썩이지 말고 이거라도 드시지요.”

    그래야 기운 내서 아가씨와 화해하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헤이든은 걱정스레 요르문을 바라보다 조용히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요르문은 주인을 신경 쓴 듯 집사가 아주 살짝 닫고 간 문을 응시했다.

    연구실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헤이든이 두고 간 접시 위에는 자신이 평소에 즐겨 먹던 오이 샌드위치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요르문은 달콤씁쓸한 초콜릿을 한 모금 홀짝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친척 누님이라.”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있었다. 아주 먼 옛날, 왜인지는 모르지만 줄곧 잊고 살았던 칠십 년 전의 사람이었다.

    중요하지 않아서 잊어버렸나. 얼굴도 목소리도, 하다못해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도 잘 모르겠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나요? 바뀐 과거 때문에 현재가 변하고 있는데, 내가 되돌아간 마도 시대는 분명 이곳과 연결되어 있는데…….!’

    ‘광룡이 부활하기 전 딱 오 년 동안이었어요. 라크랑 저랑 같이 봉인 찾아다니셨잖아요. 재키 레이븐도 잡고 중세로 시간 여행도 가고요. 메이슨 비렌체를 구해준 탐정 로렌 허슬러, 정말로 기억 안 나세요?’

    발명가 메이슨 비렌체가 무명이던 시절, 그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일이 있었던 건 안다. 3517년 희대의 살인마 재키 레이븐이 검거됐을 즈음에 그를 정식으로 후원하기 시작했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시아가 어떻게 안 거지?

    ‘어떻게 알았냐고요? 로렌 허슬러가 바로 저였으니까요! 메이덜린 경찰에게 대충 둘러대다 요르문 님 보좌관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이었거든요.’

    요르문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칠십 년 전의 어느 날을 찬찬히 곱씹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내 딸과 꼭 같은 이름이었어. 로렌 허슬러라고 하던 여자.

    ‘요르문 님은 제게 단 한 번도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하신 적이 없었죠. 절 이렇게나 사랑하고 아껴주시는데도. 이제야 알았어요. 우린 이미 과거에 만난 사이였으니까, 요르문 님은 오래전부터 절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시아가 이렇게 말했을 때, 요르문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아에게 아버지라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허락한 적이 없었다. 시아를 키우는 내내 그 아이를 싫어한 적이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는데도.

    친척 누님 시아 켈튼.

    생각해 내려 노력하고 나서야 희미하게 떠오르는 존재. 그러나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곧바로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허구의 인물은 아니었다. 분명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존재했으니까. 게다가 마류 이상 현상과 광룡의 봉인이라니. 그 정도의 사건이면 잊어버리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베일에 가려진 장면들과 어딘가 비틀린 사건들.

    라크시스와 어디를 갔고, 누구를 만났으며 무언가를 했다.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에서, 공동묘지에서, 다무스의 고성에서. 노든 대공을 만나고 메이슨 비렌체를 만났으며 괴담 수집가라던 루드윅 젤마니를 만났다. 마류 이상 현상을 마주하고 살인마를 잡았으며 중세로 되돌아가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그래, 이 모든 경험 속에는 한 명이 더 있었다.

    ‘…누님.’

    구멍이 뚫린 기억들은 모두 친척 누님인 시아 켈튼과 관련이 있었다.

    기억을 되살리려 애를 썼으나 그녀는 뭉개버린 반죽처럼 형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존재하되 철저히 외면받도록 만들어진 사람처럼.

    요르문은 그제야 제 기억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시아야.”

    요르문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나니처럼 풀어 헤친 셔츠 위에 가운을 질끈 동여매고, 오이 샌드위치를 입 안에 욱여넣었다.

    연구하면서 먹을 땐 몰랐는데. 허기가 져서 그런가, 맛있었다. 뜨끈한 것이 울컥 올라와 목이 메었다.

    시아가 입양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낯을 가리던 딸아이가 쭈뼛거리며 연구실을 찾아왔었다. 드디어 마음을 열어주나 싶어 기대하던 찰나, 어린 시아는 조몰락거리는 손으로 접시를 내밀었다.

    접시 위에 있던 건 오이 샌드위치였다.

    문 너머로 사용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어린 아가씨를 응원하러 동행해 준 것이었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딸의 두 볼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날, 요르문은 종말 이래 처음으로 가슴 깊이 차오르는 따스함을 느끼며 웃을 수 있었다.

    그 후로 요르문은 연구실에 계속 오이 샌드위치를 올리라고 명했다. 집사를 통해 시아가 뿌듯해한다는 보고를 매번 들으며 말이다.

    요르문은 숨을 가다듬었다. 의지가 선 몸이 똑바로 기립했고, 꽉 쥐었다 편 손아귀에 피가 돌았다.

    “…누님이든 딸이든.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린 가족으로 만날 운명이었다는 거니까.”

    라크시스가 연인을 만나 초상화의 망령에서 헤어 나왔듯, 요르문 역시 시아를 만나 종말의 아픔에서 비로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과거에 매몰되어 사랑하는 딸을 슬프게 할 순 없었다. 시아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어야 했다.

    그의 딸은 허튼소리를 할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뒤늦게 깨달은 왜곡된 제 기억도 확인해 봐야 했다.

    요르문은 오랜만에 연구실 깊은 곳에서 빛바랜 상자를 꺼내왔다. 뽀얗게 쌓인 먼지를 손으로 쓸어내고 덮개를 열었다.

    먼지가 끼어 녹슨 경첩이 삐거덕거렸다. 상자 속에는 처음 넣은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벨벳 주머니가 있었다.

    주머니 안에 있던 것은 손잡이에 섬세한 새 장식이 달려있는 황동 열쇠였다.

    “오랜만이네.”

    마도 시대가 종말을 맞이하고, 그에게 소유권이 넘어온 장미 정원의 하얀 저택은 라크시스가 요르문에게 남긴 유산이었다.

    폐허가 된 수도를 잠시 떠나 남부의 별장에 머무르던 때, 라크시스 옌의 유언을 집행하러 변호사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유언, 이라고요?’

    ‘예. 돌아가신 라크시스 옌 경께서는 모르간의 저택과 로튼데일 상점가 부지 및 특허권 일체를 로드 요르문 켈튼께 남기셨습니다.’

    저보다 오래 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고대 마법사가 광룡의 부활 전 손수 재산을 정리해 두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죽을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었던 녀석이었는데.

    요르문은 뒤늦게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라크가 제 죽을 날을 대비해 둔 것도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 때문이었다면.”

    만약 시아가 정말로 시간 여행을 해서 과거의 라크시스를 만났다면, 아마도 그가 언제 어떻게 죽게 되는지 말해주었을 것이다.

    3587년에 살고 있는 딸, 시아 켈튼은 마도 시대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라크시스는 가만히 앉아서 죽을 날을 기다릴 성격이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해서 광룡의 부활을 막으려 했을 터였다. 세상 혼자 사는 것처럼 굴기는 했어도 고대 마법사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대한 애착과 의무도 분명 가지고 있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죽을 준비를 미리 해두었다니.

    요르문은 열쇠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여전히 눈 그늘이 턱 밑까지 내려온 얼굴이었지만 연구실에 틀어박히던 순간보다는 한층 결연해진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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