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12)화 (112/292)
  • 112화 

    로건의 수술은 잘 끝났을까. 이 시간대의 패트릭 녀석은 수술방 경력도 상당했다고 들었다.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나 때문이야, 내가 과거를 바꿔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면.

    라크시스의 위로가 없으니 다시금 불안해졌다. 그렇게 초조하게 떨면서 벽에 기대 힘없이 주저앉았던 순간이었다.

    딩동― 딩동딩동 딩동―

    호출 벨이 울렸다.

    시아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하필 기대도 호출 벨이 달린 벽에 기댔다.

    “아, 진짜!”

    시아는 부리나케 가방을 온몸으로 감싸 안고 책상 밑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누가 달려오기 전에 빨리 숨어야 했다. 텅 빈 아이작 교수님 오피스에 혼자 이러고 있었던 걸 들키기라도 하면.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시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야, 네가 가봐.”

    “나도 무섭다고! 원장님 지금 수술방에 계시잖아.”

    이윽고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럼 여기서 호출 벨 누른 건 대체 누군, 어머! 켈튼 선생님!”

    새된 비명이 들렸다. 시아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들켰다.’

    시아는 책상에 반쯤 숨은 채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미처 넣지 못한 붉은 드레스 자락이 가방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상태였다.

    방에 들어온 건 접수처의 메이였다.

    “하, 하하하……. 안녕, 메이.”

    “그레이엄 선생님, 찾았어요! 켈튼 선생님 여기 계세요!”

    그래도 나랑 함께 일한 세월이 있는데 그렇게 곧바로 사람을 부르기야? 배신이야, 배신. 같이 대머리 독수리 욕까지 했었으면서!

    시아가 말릴 새도 없이 메이는 고래고래 시아의 존재를 알렸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의술원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아,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그중 가장 먼저 달려온 건 패트릭 그레이엄이었다.

    “…패트릭.”

    “너, 내가 진짜. 하… 얼마나 걱정했는데!”

    수술이 끝나자마자 달려왔는지 대충 갈아입은 가운이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정말이지 초췌해 보였다.

    “미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혹시 로건 수술은 잘 끝났어……?”

    “지금 네 기사 걱정할 때가, 후. 아니다. 됐어. 살아있으니까 됐다고. 난 정말이지 내가 사람을 잘못 본 줄 알고 네가 그렇게 다친 걸까 봐, 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였다.

    “무슨 소리긴.”

    문밖의 쨍한 조명을 등지고, 지금 이 순간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실루엣이 나타났다.

    다 벗겨진 머리에 성격만큼이나 매섭게 휜 매부리코를 사이에 두고 싸늘하기 그지없는 시선이 날아와 박혔다.

    아이작 맨틀러였다.

    “켈튼 선생이 내 오피스에 숨어드는 취미를 가진 줄은 몰랐는데.”

    “교수님, 그게 아니라.”

    “자네는 대체 정신머리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대체 그 꼴로 어딜 그렇게……!”

    “죄송합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시아는 바닥에 닿을 듯 연거푸 몸을 숙였다. 그 순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상체가 일으켜졌다.

    그 실체를 확인하고 시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이작 교수가 황당하단 눈빛으로 제 몸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네, 몸이.”

    “…네?”

    “교수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시아는 무사했다고요. 그 사람은 시아가 아니에요. 제가 멀쩡히 살아있는 시아를 두 눈으로 똑똑히…….”

    패트릭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작도 믿기지가 않는 현실을 애써 인정하고 있단 표정이었다.

    “나도 안다. 지금 보고 있잖나.”

    대체 둘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사이 사람들은 점점 몰려들었다.

    회복과 켈튼 선생님 찾았대! 그 환자, 켈튼 선생님 아니었다는데? 거봐, 내 말이 맞지. 내가 분명 켈튼 선생님 봤었다고 했잖아. 아니, 그런데 그 환자 누가 봐도 켈튼 선생님이었어!

    모여든 족족 이상한 말만 잔뜩 해댄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것도 시간 여행의 여파인 건가. 시아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였다.

    “시아아아―!”

    인파를 비집고 나타난 요르문이 시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양부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 * *

    “나랑 닮은 사람이 실려 왔었다고?”

    시아는 텅 빈 응급실 침대를 바라보며 멍하니 물었다.

    “그래. 그 폭발 현장 한가운데에 있었다더라. 너도 알지? 데번셔 인더스트리의 그 데번셔가 즉사한 거.”

    서대륙 측의 테러로 무기 무역상인 데번셔 인더스트리의 경영자가 죽었다고 했다.

    그간 서대륙 전쟁에서 제국이 공식적인 참전을 선언하지 않으면서도 데번셔 인더스트리를 통해 자유국가 연합에 계속 무기를 대고 있었으니, 제국이 오죽 눈엣가시 같았겠는가.

    게다가 돌연 국제 평화와 정의를 운운하며 참전하더니 승전국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날름 프리드실 공국을 가져가 버렸다. 바닷길을 이어주는 중요한 땅을 제국이 빼앗아갔으니, 서대륙 측에서는 어지간히 안달이 났을 터였다.

    시아는 패트릭이 데려간 응급실 한구석에 멍하니 서있었다.

    응급 환자가 누워있었던 현장답게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문제의 그 환자가 누워있었던 자리랬다. 이 정도 출혈이면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운명하는 게 일반적이다. 검댕으로 오염된 시트를 걷는 손길이 분주했다. 패트릭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바로 뒤에 있던 마차였대. 그 환자가 있었던 곳이.”

    “그 정도면 현장에서 죽었을 텐데.”

    현장에서 한참 떨어져 있던 시아에게도 화마가 덮쳐들었던 폭발이었다. 그 정도 위력의 폭발 중심지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실려 온 환자 얼굴 보니까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

    “그 정도로 나랑 닮았었어?”

    “어. 완전히. 쌍둥이인가 싶을 정도로.”

    이윽고 패트릭이 한 말은 뒷골을 내리친 것처럼 충격적인 말이었다.

    “모든 게 일치했어. 네 머리칼이며 키, 얼굴 심지어 혈액형까지도.”

    “설마.”

    “진짜야. 못 믿겠으면 이걸 봐.”

    패트릭은 환자 기록 차트를 내밀었다. 신원 미상의 환자는 이십 대 후반 추정의 여성으로, 의술원에 등록된 시아의 의료 정보와 모든 것이 일치했다.

    패트릭 말로는 화상과 골절로 잔뜩 부어오른 얼굴이 아니었다면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말은 얼굴이 부어올라도 그 환자가 시아 켈튼이라고 확신할 만큼 나와 닮았단 거잖아.

    소름이 돋았다.

    “그 사람 지금 어디 갔는데?”

    “없어져서 찾으러 다닌 거였어.”

    “없어졌다고?”

    시아는 병동 복도 의자에 주저앉았다. 패트릭이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다 주었다. 시아는 말없이 커피를 따 벌컥벌컥 마셨다. 달고 쓴, 일하다 숨통이 조여올 때나 먹는 공산품의 맛이었다.

    패트릭은 제 커피도 뽑아서 시아 옆에 앉았다.

    “수액이며 회복 마정석까지 죄다 깔끔하게 빼놓고 사라졌더라. 모니터까지 꺼버리고. 그래서 너라고 생각했어. 그 환자가 진짜로 의술사인 시아 켈튼이니까 그런 식으로 의술원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는 캔을 따지 않고 계속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넌 내가 로건 데려온 걸 알았었잖아.”

    “나도 네가 멀쩡한 꼴로 네 기사 데려온 거 알고 있었는데.”

    패트릭은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엔 그게 생각이 안 날 정도였어.”

    시아는 한참을 바닥만 쳐다보았다. 희고 검은 테라조 타일이 아득하게 이어져 있었다.

    제 머릿속 같았다. 사고가 멈춘 백지 같은 뇌 속에 급류에 휩쓸린 자갈처럼 와르르 쏟아져 들어온 사건들. 아직 슈테른베슈테크에서 겪은 일들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열차에서 루드윅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 때문에 받은 충격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는데.

    ‘발자크 에이클레이 말이에요, 제 벗이었어요. 사관학교 동기에다 절 여기까지 오게 만든 친구인 발자크 로스였다고요!’

    문제는 발자크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게 요르문과 루드윅 둘뿐이라는 거였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다무스 신전에 가느라 사제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본 적이 없었다.

    라크시스야 내가 떠난 후에 어떻게든 발자크의 얼굴을 확인해 뒀겠지만.

    ‘지금 문제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니.

    문득 중세의 시간 여행을 겪고 난 후의 세 사람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마도 시대엔 존재하지 않았던 그녀와 달리 마도 시대에 살고 있었던 라크시스와 요르문, 루드윅. 세 사람은 마치 평행 세계의 자신과 하나가 된 듯한 경험을 했다고 했지.

    병실에서 도망친 폭발 현장의 생존자. 모두가 시아 켈튼이라고 여길 만한 사람.

    시아는 도리질을 쳤다. 머리가 아파왔다.

    패트릭이 걱정스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시아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로건은?”

    “수술은 잘 끝났어. 너도 알겠지만 그 정도면 후유증은 상당할 거야. 통증이 꽤…….”

    “…고마워. 패트릭.”

    패트릭은 제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감사를 전하는 시아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울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 것 같은 표정이다. 힘들겠지. 테러 현장이라니. 그런 일을 겪었으면 누구라도 힘들 거야.

    그때 차이지 않았더라면. 만약 지금 내가 시아의 남자 친구였다면.

    시아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패트릭은 그녀를 제게 기대게 하고픈 마음을 숨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뭘. 어떤 환자든 난 최선을 다했을 거야.”

    * * *

    “시아, 너 좋아하는 동대륙식 면 요리 먹고 갈까?”

    요르문은 조심스럽게 딸의 상태를 살폈다. 로건이 회복 중인 걸 확인하게 한 후 시아를 겨우 설득해 의술원을 나오는 길이었다.

    시아가 중환자실에 누워있다는 소식에 사색이 되어 달려갔었다. 다행히도 테러 현장에서 실려 왔다는 환자는 시아가 아니었고, 그의 소중한 딸은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히 살아있었다.

    “아니면 그때 먹었던 양고기스튜는 어떠니? 공원에 체리꽃이 예쁘게 폈던데, 좀 걷다 갈까?”

    “요르문 님.”

    내내 바닥만 보고 걷던 시아가 우뚝 멈춰 섰다.

    “응. 시아야.”

    “폭발 사고 나기 전에 제가 뭘 하고 있었나요?”

    “어, 어? 그야 아르카나에 미스 로젠버그 만난다고 나간다면서…….”

    “제가 왜 마리를 만나러 나간다고 했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요르문은 물기 어린 목소리에 날카로운 의심이 담긴 걸 알아챘다.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시아는 지금 자신을 추궁하고 있었다.

    뭘 잘못한 걸까. 내가 말실수라도 했나.

    “그쪽 가문에 혼담이 들어왔잖니. 시아, 정말 괜찮은 거 맞니? 힘들면 제발 말해주렴. 응? 시아야. 난 네가 제일 걱정이야.”

    “요르문 님, 아니 요르문.”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아무리 친부가 아니라지만 시아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이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