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요르문이 나서는 게 보였다. 그를 마주하고 이자벨라 황녀가 실성한 걸 보니, 모든 진실을 말했나 보다. 제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미인이라고 알려진 황녀인데 막상 여기 와선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네. 왕성 기습과는 별개로 황녀의 얼굴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상황 정리가 얼추 된 것 같으니 슬슬 나가볼까.
루드윅은 기둥 밖으로 나섰다. 이자벨라를 슬쩍 보곤 단상 주변을 둘러보려는 순간이었다.
‘……!’
그가 목격한 건 창에 꿰뚫린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였다.
분명, 저자가 봉인을 노린 고대 마법사 카얄이라고 했었지.
루드윅은 덜덜 떨며 미친 듯이 뒷걸음질을 쳤다.
‘아냐, 제발 아니라고 해줘. 저놈이 사도 카얄이라고? 백작을 수십 번도 더 죽여온 검은 마법사라고?’
창에 꿰뚫려 온몸이 피로 물든 남자는 다름 아닌 루드윅의 사관학교 동기, 발자크 로스였다.
날 못 봤겠지, 못 봤을 거야. 아니, 보면 어때? 저 정도면 이미 죽었는데. 지금 죽으면 미래에는 없는 놈이 되잖아. 어떻게 이름도 똑같을 수 있어.
발자크 에이클레이와 발자크 로스.
그러고 보니까 내게 고성에 얽힌 괴담을 소개해 준 것도 발자크였잖아.
왜지? 검은 마법사는 백작을 죽이고 현자의 별을 손에 넣었는데. 이번에야 레이디 켈튼과 라크시스 옌 경이 미궁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지만, 지금까지 백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회귀에서 검은 마법사는 언제나 광룡의 봉인을 손에 넣었잖아.
불현듯 깨달음이 루드윅의 뇌리를 스쳤다.
‘…아냐. 그게 아니었어!’
백작은 왜 무한한 회귀를 겪게 된 걸까. 사도 다무스는 카얄로부터 광룡의 힘을 지켜야만 했다. 만약 검은 마법사가 미궁 안에 도달할 때마다, 놈의 손에 봉인이 넘어가기 직전 사도 다무스가 시간을 되돌린 것이라면?
‘과거의 카얄도 결국 봉인을 얻지 못한 거였어!’
백작의 무한한 회귀로 인해 카얄 역시 미궁을 열지 못했다. 이자벨라를 이용해 다무스 왕국을 집어삼키고, 영지민을 선동하여 아스타로부터 현자의 별을 빼앗았지만 다무스에 의해 시간이 되돌려지며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것이다.
카얄은 직접 미궁에 들어가길 포기했다. 다무스가 봉인을 지키기 위해 다른 시간대에서 중세로 이방인을 불러들이는 걸 알아채곤, 오랜 세월을 기다리며 자신 대신 미궁에 들어가 줄 인간을 찾았던 것이다.
중세로의 회귀에 당황해하지 않고, 신화적 지식이 풍부하며, 동시에 낯선 곳에서의 기묘한 모험을 즐기는 사람. 봉인이 잠들어 있는 지하 미궁을 찾아내 카얄에게 바쳐줄 인간.
‘그건 나잖아.’
마법사는 오래 산다.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는 여기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발자크 로스라는 이름으로 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저 대신 중세의 다무스 신전으로 가줄 희생양으로 루드윅을 골랐다.
본인도 괴담을 좋아한다며 제게 친하게 지내자 했었지. 신기한 괴담이 벌어지고 있다며 씨즐턴의 고성에 찾아가라고 했다. 오랜 벗 발자크는 분명 고성의 삼 층 끝방에서 중세로의 시간 여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깊은 배신감과 공포가 루드윅을 뒤덮었다.
발자크가 날 이용했다니. 그런데 그놈의 정체가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 광룡 카얄이라니. 저주의 화신이요, 창조주를 배신한 사도 미옌이었다니.
제 친구의 얼굴을 하고선 창에 꿰뚫려 죽은 카얄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마비된 것만 같다. 루드윅의 눈엔 이제 눈물이 고여있었다.
‘아니, 지금 여기서 뭐 하나? 이제 와서 미라가 무서운 거야?’
‘그, 그게 아니라.’
그래서 요르문이 핀잔 조로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발자크 로스, 브라이던힐에서 가장 친했던 동기 녀석이 …사도 카얄이었어요.’
* * *
시아는 루드윅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중세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면 저한테도 말해줬어야죠. 다들 저만 빼고…….”
라크시스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그 직후 곧바로 마도 시대로 돌아와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사흘 내내 깨어나지 못했고요.”
“누님, 죄송해요.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누님이 쓰러져서 경황이 없었어요.”
그럼 어쩔 수 없었던 거네. 시아는 잠시 민망함을 느끼다 다시 한번 루드윅을 붙잡고 물었다.
“그래서, 이 열차 안에선 어쩌다 마주쳤던 건데요?”
“특등칸을 예매했던 손님이 바로 발자크였어요.”
화장실을 들렀다가 잠시 식당칸에서 가볍게 배를 채우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요르문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좁은 복도 한가운데서 마주 오는 사람과 그만 어깨가 부딪히고 말았다.
‘그래서 레이디 켈튼은 고대 마법사님과, 아. 죄송합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 어? 자네, 루드윅 아닌가?’
루드윅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설마.
‘날세. 발자크 로스.’
뒤돌아본 곳에는 마도 시대의 신사답게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가 실크햇을 살짝 쥐고 서있었다.
화려한 금발과 금욕적인 외모…가 다가 아니었다. 그의 왼쪽 귀 뒤에서부터 목덜미 절반을 뒤덮은 자글자글한 화상자국이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분명 중세에 가기 전에 만났던 발자크에겐 화상 흉터가 없었다.
‘바, 발자크 자넨 어쩌다 그렇게 다치게 됐는가?’
‘이거? 아주 오래전 일이긴 한데.’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안부도 묻지 않고 대뜸 화상자국 이야기부터 꺼냈는데도 발자크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기색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태도가 가장 수상했는데 말이다.
그는 화상자국을 쓰다듬으며 가늘게 웃었다.
‘날 배신한 사람이 있었지. 그 사람 때문에 뒤통수를 맞았어. 화형당할 뻔했거든.’
‘…화형이라니,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짓을.’
‘그러니까 옛날 일이라고 했잖아. 이렇게 살아있으니 이젠 상관없는 일이지.’
그 기억에 순간 움찔거리며 몸을 뒤로 물렸다. 브라이던힐 동기인 발자크는 그런 루드윅에게 손을 내민 채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악수를 거절받으니 상처도 이런 상처가 없군. 친구.’
루드윅은 고개 숙인 채로 눈을 질끈 감고 제 과거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놓았다. 발자크 로스를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친해졌으며 그가 지금 제국에서 어떤 사람인지까지 아는 건 전부 쏟아냈다.
“고향은 아무도 몰라요. 가족도 없고요. 가문에서 남긴 재산으로 사업을 불려 최근 사교계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단 얘기만 건너 들었어요.”
바닥까지 기억을 싹싹 긁어모아 이야기를 마친 루드윅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레이디 켈튼?”
시아가 없었다.
놀란 루드윅이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고 객실 밖으로도 나가보았지만 시아는 어디에도 없었다.
요르문은 루드윅의 코트 자락을 잡아당겨 앉혔다.
“누님은 원래 시대로 돌아갔어.”
“…정, 말요?”
나도 이렇게 사라지는 건 처음 보는데 말이야. 요르문은 멍한 얼굴로 시아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았다.
눈 한 번 깜빡했을 뿐인데 흔적도 없이 떠나버렸다. 루드윅의 얘기가 끝나기 전 갑자기 가방을 꽉 끌어안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시간 여행은 작별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시아의 이번 시간 여행이 대략 일주일 정도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 시간이 다 지나가 버렸나 보다.
미처 가방에 담지 못한 앨런 어셔의 연작들만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가버릴 수가 있죠?”
“난들 아나. 애초에 시간 여행이라는 게 과학적으로든 마법으로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니까.”
요르문이 툴툴거렸다. 오직 라크시스만이 익숙한 듯 여상히 대꾸할 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돌아올 거야. 그래서 로드 젤마니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라크시스는 태연하게 다시 대화를 환기시켰다. 카얄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마도 시대에도 여전히 활보하고 있으니 중요한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라크시스의 목소리에도 미련은 잔뜩 남아있었다.
【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
밖이 어수선했다.
시아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사무실에서 나는 전형적인 묵은 종이 냄새가 가장 먼저 감각을 깨웠다. 건물 전체에 밴 약품 냄새가 뒤따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의술원으로 무사히 돌아온 것 같았다.
“내 오피스가 아닌데…….”
넓었다. 거기다 가구며 명패 하나까지 제 사무실과는 다르게 비싸 보였다. 여전히 시야가 흐릿한 상태로 시아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책상 뒤로 줄줄이 걸린 액자가 왠지 낯이 익다. 가만히 보니 흰머리를 깔끔하게 넘겨 올린 노부인의 사진이었다. 유리함에는 세줄 짜리 훈장이 떡하니 전시되어 있었다.
“설마…….”
해부학의 어머니, 파리스 맨틀러의 사진이었다. 학부 내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워왔던 의술학의 시초 중 하나였다. 그 옆의 훈장은 의술인 최고의 영예인 히포레스 훈장이잖아.
그 말인즉 여기가 대머리 독수리, 아이작 맨틀러 교수의 오피스란 뜻이었다.
‘미쳤어!’
망할 놈의 시간 여행! 시아는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욕을 소리 없이 왁왁 내질렀다.
하필 도착해도 여기냐고! 왜,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편해하는 직장 상사의 사무실로! 왜, 왜, 왜!
때마침 아이작 교수가 자리를 비운 게 천운이었다. 시아는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와그르르 쏟아졌다.
그녀와 같이 현재로 온 마법 가방이었다. 제대로 안 닫혀있었는지 슈트 케이스 안의 물건들이 수습하기도 힘들 정도로 난리가 나있었다. 재키 레이븐을 속일 때 입었던 붉은 드레스며, 부품을 떼고 남은 오토마톤에 투명 망토까지. 둘 곳 없어 가방 속에 숨겨두었던 마도 시대의 물건들이 죄다 나와 있었다.
“아, 정말 이러기야?”
언제 교수님이 올지 모르는데! 시아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다급하게 물건들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가방 안 공간은 무한대라며! 증기 마차가 들어가도 남을 거라던 라크시스의 말과 달리 새빨간 드레스는 마지막까지 시아를 괴롭혔다. 여길 누르면 저기가 튀어나오고, 입을 땐 풍성하니 모양 하난 예뻤던 치맛자락이 이렇게까지 골칫덩어리가 될 줄이야.
복도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내가 도착한 시기가.
“로건.”
마리를 달래주러 급하게 시가지로 가던 중에 폭발에 휘말렸었지. 로건이 날 감싸주고는 대신 다쳐서…….
시아는 블라인드 틈을 벌려 바깥을 살폈다. 간호사며 의술사 할 것 없이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상자가 많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