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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10)화 (110/292)
  • 110화 

    요르문은 호들갑을 떨며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 누님거리면서 시아에게 바싹 붙더니 뒤를 보며 라크시스에게 혀를 날름 내밀었다.

    약이 오르면서도 이상하게 서글펐다. 바뀌어버린 시간대의 기억이 시아에게도 온전히 있었더라면, 지금 그녀와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건 저기 짜증 나는 가짜 친척 동생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텐데.

    그러나 라크시스는 이내 여느 때처럼 여유를 되찾았다. 시간이라면 누구보다 많았으니까.

    그녀에게 허락받을 수만 있다면 칠십 년은 물론, 몇 세기도 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할 것도 아니었지만.

    모양 좋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요르문, 왜 라크만 두고 온 거야. 친척 동생을 타박하는 시아에게 가까워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라크시스는 태연하게 웃으며 일행에 합류했다.

    속마음은 전혀 태연하지 못한 채였다.

    * * *

    쇳소리 같은 경적이 쨍하니 역사를 울렸다.

    이윽고 시커머니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다무스발 아르카나행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섬과 대륙을 잇는 철교 위로 새하얀 증기가 꼬리처럼 궤적을 그렸다. 검푸른 파도에 삼켜지기를 반복하는 암초 사이로 하얀 햇살이 보석처럼 부서져 쓸려간다.

    단조로울 만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잔잔한 파도 소리와 규칙적인 기차 소리를 곁들인 시간을 보내며 라크시스는 책장을 넘겼다.

    “라크, 그거 재밌어요?”

    “글쎄요. 보다 보니 계속 읽게 되긴 합니다만.”

    시아의 불만 가득한 시선이 시야 바깥에서도 느껴졌다. 라크시스는 책으로 입가에 띤 미소를 가리며 시아의 반응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제 편을 들어줄 줄 알고 책을 보여줬겠지만, 라크시스는 이번만큼은 시아의 편을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무능해 보여도 나름 재주가 있었군. 라크시스는 메이덜린 경찰서에서 근무하던 배불뚝이 경감을 떠올렸다. 기껏 공로를 넘겨주었더니 훈장 수여식에서 로렌 허슬러를 언급해 시아 켈튼을 차탈의 표적이 되도록 했던 자였지.

    ‘경찰보다 작가가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겠어.’

    라크시스는 피식 웃었다.

    그가 읽고 있는 것은 앨런 어셔의 연작, 즉 자신과 시아가 연인으로 나오는 미래의 소설이었다.

    “그러다 다 읽겠네요.”

    시아가 투덜거렸다. 슈나이더의 자기애적 자서전이나 다름없는 소설에 같이 화내줄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오만하고 잘난 성격에 라크시스가 화가 나서 슈나이더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걱정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재미있게 읽는다고?

    이건 배신이었다.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했다 하니까요. 내용을 알고 있으면 앞으로의 시간 여행에 도움이 될 수도 있잖습니까.”

    “그런 것치곤 너무 재미있게 읽고 있는 거 알아요?”

    “조금 허무맹랑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봐줄 만합니다.”

    라크시스가 터무니없다고 한 부분은 고독한 사나이를 자처한 소설 속 슈나이더를 말한 것이었지만, 시아는 다른 부분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죠? 아니, 어떻게 라크를 저랑 연인인 것처럼…….”

    “시아, 저와 얽히는 게 싫은가요?”

    말문이 막혔다. 내가 또 뭘 잘못 말한 거지. 중세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계속 이런다.

    그 예쁜 얼굴로 눈꼬리를 늘어뜨리는 건 진짜 반칙이야.

    매번 도도하고 여유로운 표정만 봐와서 그런 표정이 가장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얼굴이 명화 같으니 무슨 표정을 지어도 다 예술적으로 어울렸다.

    중요한 건 라크시스는 마법만큼이나 제 얼굴이 잘났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봐라. 한순간에 눈동자에 물막을 씌우고 반쯤 시선을 내리깔았다. 거기다가 끝까지 채워 잠근 목깃 너머로도 선명한 턱선이며 목울대가 일부러 드러나도록 창밖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파도 위로 쏟아지는 햇살만큼이나 그의 은발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끝 모를 망망대해라도 담은 것처럼, 푸르던 눈이 수심에 잠겨 짙게 가라앉았다.

    마치 내가 그에게 뭐라도 잘못한 것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죄책감이 들 만큼 청초하고도 슬픈 얼굴로.

    그러면서도 아주 살짝 보조개가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저거저거, 웃고 있는 거지?’

    요망하다, 정말. 인간 홀리는 악마가 따로 없었다.

    “됐어요. 라크가 이긴 걸로 해요.”

    시아는 혀를 내두르며 토라진 듯 의자에 푹 기대버렸다.

    “제가 뭐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전 단지 당신과 남이 되는 게 싫었던 건데.”

    “이쪽이야말로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거든요. 남이라니, 우리가 봉인 찾는다고 얼마나 많이 같이 다녔는데.”

    잔뜩 삐져버려서 구시렁거리고 있었는데, 라크시스가 나지막이 물어왔다.

    “…남이 아니면, 뭡니까?”

    “뭐긴 뭐예요. 친구죠.”

    그는 여전히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창가에 턱을 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만이 슬며시 굴러 시아에게 향했다.

    “친구?”

    “네.”

    “왜 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럼 뭐라고 해요? 설마 이제 와서 나이 가지고 뭐라 할 건 아니죠?”

    친구라는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것 같더니, 라크시스는 어느새 길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느슨하게 낀 팔짱 위로 흐음, 하는 콧소리가 났다.

    라크시스는 언제나처럼 능글맞은 표정이었으나,

    “분발해야겠군요.”

    “뭘요?”

    그 위에는 얇게 저민 사랑이 내려앉아 있었다.

    “당신에게 친구로 남지 않으려면.”

    뭐?

    순간 객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얼마나 세게 열었는지 직원을 부르는 용도의,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얇디얇은 유리창에 부딪혀 딸랑딸랑 울려댔다.

    시아는 빨개진 얼굴을 식히느라 손부채질을 해댔다. 라크시스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척 애먼 창밖을 바라보다 들어온 사람들의 정체를 깨닫고 단박에 미간을 구겼다.

    요르문과 루드윅이었다.

    “자네들 객실은 이곳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알아, 안다고. 나도 방해해서 미안한데 급한 일이 있어서 온 거야.”

    요르문은 시아와 단둘이 보내던 시간을 방해받아 예민해진 라크시스를 대충 달래며 몸을 구겨 의자에 앉았다. 그러다 보니 얼떨결에 라크시스 옆에는 요르문이, 시아 옆에는 루드윅이 앉게 되었다.

    분리된 객실에 차별화된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는 일등석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좁디좁은 삼등석처럼 느껴졌다. 자리가 없어서 이런 식으로 앉아야 한다니.

    이곳에 올 때처럼 갈 때도 아예 열차량 한 대를 통째로 이용할 수 있는 특등칸을 예매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아르카나행 3025 열차의 특등칸은 매진되었습니다.’

    매진되었다는데 별 수 있나. 그렇지만 좌석을 고민하며 제국으로 돌아갈 시기를 늦추기엔 시아의 이번 시간 여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라크시스는 하는 수 없이 일등석 객실 두 개를 예매했다. 요르문과 루드윅을 아예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려는 심산이었다.

    “그토록 급한 일이라는 게 뭐지?”

    “고대 마법사님, 저 봤어요! 그, 그…….”

    루드윅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떨고 있었다. 괴담 수집가가 이렇게 긴장하는 건 처음 본다. 시아는 하얗게 질린 루드윅을 보며 물었다.

    “뭘 봤다는 건데요?”

    “제 친구요! 브라이던힐 동기 발자크 로스요!”

    루드윅이 손가락을 쫙 펼쳤다. 그 한가운데에서 굵직한 루비 알을 뽐내는 임관 반지가 번쩍이고 있었다.

    “객실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저 멀리서 너무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거 있죠. 녀석이 어떻게 그대로, 아니 그대로가 아니라…….”

    루드윅은 이제 공포에 질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시아는 당황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누군데요?”

    그렇게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 빼고 모두 얼굴이 굳어있었다. 브라이던힐은 제국육군사관학교가 위치한 제국 중남부의 도시였다. 그 말인즉 발자크 로스는 루드윅의 사관학교 동기라는 소린데.

    아직 뭐가 뭔지 정리가 안 된 상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라크시스가 나직이 불렀다.

    “시아.”

    “라크는 로드 젤마니가 뭐라고 한 건지 알겠어요?”

    라크시스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재키 레이븐의 사칭범, 기억하십니까?”

    시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두 번째 시간 여행에서 메이슨 비렌체를 찾아와 역병 의사 마스크에서 봉인 조각을 가져간 정체불명의 검은 남자. 파리스 맨틀러 교수를 공격하다가 붉은 임관 반지라는 단서를 흘리고 간 범인.

    재키 레이븐 사건 당시 시아와 라크시스가 카얄로 의심했던 가장 유력한 용의자.

    루드윅은 이제 눈물이 고여 충혈된 눈으로 더듬거리고 있었다.

    “…녀석이 사도 카얄이었어요. 그저 괴담이라는 취미를 함께 즐기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씨즐턴의 고성에 죽은 백작의 유령이 나온다는 괴담도 녀석이 알려준 거였어요. 왜 몰랐을까, 왜…….”

    “로드 젤마니, 다시 말해봐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브라이던힐 동기 녀석인 발자크 로스가 중세에서 만났던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라고요. 똑같아요, 분명 똑같이 생겼어요. 그 화려한 금발이며 발자크라는 이름, 군인답지 않은 외모까지 모두 똑같단 말이에요…….”

    루드윅은 백삼십 년 전, 왕성 기습 작전의 날을 떠올렸다.

    모든 증거를 손에 넣고 중세의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루드윅은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자신과 요르문이 열어둔 통로로 중무장한 아스타가 돌진해 들어올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까지 느꼈으니까.

    ‘우리도 어서 가요, 로드 켈튼! 이 성서를 당장 에드먼드 3세에게 보여줘야 한다고요!’

    ‘호들갑 좀 떨지 마, 루드윅. 침착하라고. 백작이 상황을 정리하면 들어갈 거야.’

    왕궁 중앙홀로 이어지는 수 개의 아치형 통로 너머로 잔뜩 모인 귀족들과 이자벨라의 사병, 그리고 그 바깥을 둘러싼 아스타의 군대가 보였다.

    주저앉은 에드먼드와 백마를 탄 아스타, 그 뒤로 황금빛 술이 매달린 창이 벽에 박혀있는 게 기둥 뒤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사방에 파편이 튀어있는 걸 보니 보통 힘으로 창을 날린 게 아닌 모양이었다.

    루드윅은 숨죽여 역사적인 광경을 지켜보았다.

    ‘참 잘들 한다. 너희들은 어떻게 단 한 번도 너희들의 왕을 믿어주지 않는 거냐?’

    크으.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이지 가슴을 저릿하게 한다. 저런 주군이 있다면 당장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세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아스타의 포효에 루드윅은 곰 같은 덩치로 주먹을 삼키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만큼은 루드윅도 제국인이 아닌 슈테르베슈테크의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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