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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09)화 (109/292)
  • 109화 

    “아무리 괴담이 좋아도 앞은 보고 걸으셔야죠!”

    “레이디 켈튼은 신기하지 않습니까? 전 역시 괴담과 언제나 함께 할 운명이었나 봅니다!”

    “하, 진짜 못 말린다니까. 일단 가요. 똑바로 보고! 얼른!”

    와하하하! 시아의 타박에 곰 같은 덩치를 움츠리면서도 루드윅은 덩실덩실 걸었다. 불안한 시아가 루드윅을 어린아이 돌보듯 살피며 멀어져갔다.

    요르문과 라크시스는 시아를 곧바로 따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시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벌어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요르문은 나지막이 대화를 시도했다.

    “라크. 자네 괜찮나?”

    “안 괜찮을 이유가.”

    또 거짓말이네. 라크시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지만 그를 오랫동안 보아왔던 요르문은 라크시스가 애써 태연한 체하려 한다는 걸 금방 눈치챘다.

    “누님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잖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을 만큼 딱히 달라진 것도 없지.”

    “라크, 난 자네 친구야. 나한테는 솔직해도 된다고.”

    라크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아 일행이 다무스에서 한 일은 일국의 역사가 바뀌어버릴 정도로 엄청난 일들이었지만, 놀랍게도 바뀐 시간 속에서 시아와 라크시스의 만남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아르카나 중앙역의 기공식도, 알리나 황제의 화폐 개혁도, 발명가 메이슨과 공동묘지에서 만난 것도, 놀라운 호흡으로 재키 레이븐을 검거한 것도 그대로였다.

    한 박자 늦게 오토마톤의 심장을 놓친 것까지도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몇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는데, 하나는 중세에서 아스타를 만나고 봉인과 시간 여행자의 존재를 알게 된 라크시스가 일찍부터 마류 이상 현상을 연구하면서 카얄이 선수 쳤던 봉인들을 한발 먼저 손에 넣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가 그녀에게 고백했다고.’

    라크시스는 또 다른 자신이 저지른 그날의 고백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사실 그러라고 그 옛날의 나에게 금단추 따위의 힌트를 보냈던 건 아니었는데.

    그녀에게 처음으로 고백할 기회를 빼앗아간 것이 자신이라니. 스스로를 향한 질투라는, 말도 안 되는 감정에 헛웃음이 났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시아에게 고백을 했던 경험은 정말이지 지금까지도 아찔하리만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켈튼 저택에서 오토마톤의 심장이 폭발하는 것을 온몸으로 막아낸 라크시스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샤샤리아를 피우러 도망쳤을 때였다.

    얼떨결에 공간이동에 시아가 휘말려 따라왔었다. 푸른 연기에 파묻혀 몽롱하게 취해있을 때, 그녀가 찾아왔다.

    어둑한 방 안에서도 그녀는 별처럼 빛이 났다. 미련과 집착으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온 자신과 다르게, 시아는 매 순간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내가 만약 시간 여행의 당사자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다친 메이슨 비렌체와 릴리 알펜을 보고 몸이 먼저 움직였을까?

    시아 켈튼은 그런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사람이었다.

    한 세기도 훨씬 전, 폐허가 된 다무스 신전에서 제 것이 아닌 긴 은발을 발견했을 때부터 시간 여행자라는 그 여자에게 관심이 있었던 건 맞다. 사라진 제 기억과 초상화 속 정체불명의 은발 여인. 은발 여인의 망령은 시시때때로 나타나 그로 하여금 이유 모를 그리움과 애정, 원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했다.

    시아 켈튼과 가까워지려고 했던 건 그녀가 은발의 여인일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녀가 초상화 속 은발 여인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제게서 등 돌린 시아의 뒷모습에서 은발의 여인이 더는 겹쳐 보이지 않았으니까.

    밤에 핀 장미처럼 검붉은 머리카락에 나비 같은 눈매. 살짝 패인 보조개와 언제나 빛나고 있는 또렷한 눈동자.

    라크시스는 결국 인정했다.

    자신이 백삼십 년을 기다려온 건 빛바랜 초상화 속의 이름 모를 은발 여자가 아니라.

    ‘시아.’

    그래서 그녀를 붙잡았다.

    ‘…샤샤리아가 진통 효과가 있는 풀인 건 알겠네요. 그래도 너무 피우진 말아요. 이런 풀은 원래 극소량만 약으로 쓰는 거니까요.’

    조심스레 잡아든 손은 보드랍고 단단했다. 그녀가 자꾸만 빠져나가려고 움찔거리자 왠지 모르게 초조해졌다.

    ‘…갈 겁니까?’

    ‘생각해 보니 스크롤도 안 들고 왔네요. 당신 정신 차릴 때까지 옆 방에 있을 테니까 나중에 불러줘요.’

    아, 샤샤리아 때문인가. 라크시스는 기껏 피워둔 연기를 날려 보냈다. 시아가 싫어하는 것 같았으니까. 상처가 아물어도 고통스러운 감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었는데, 시원한 밤바람과 함께 열기 어린 손을 느끼고 있으니 다쳤던 것도 잊어버릴 만큼 몸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 라크시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든 감정을 겨우 뭉그러뜨려서 입 밖에 냈다.

    ‘…여기에 있어줘요.’

    그래. 여기까진 똑같았다. 배고파하던 시아를 위해 테이블을 준비하고 음식을 가져온 것까진 그대로였다. 그런데 중세의 다무스에서 과거를 바꿔버린 탓이었을까.

    원래 시간대에서와는 다르게 시아가 질문을 덧붙였다.

    ‘라크, 저쪽 방에 걸려있던 초상화 말이에요. 그, 은발을 한 여자 그림이요.’

    딱 한마디가 더해졌을 뿐이었는데.

    ‘…혹시 그거, 저인가요?’

    그 한마디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고 말았다.

    라크시스는 애써 이를 악다물며 머릿속을 지배하는 그날의 기억을 견뎌냈다. 또 다른 시간선의 자신이 시아에게 저질렀던, 엉망진창의 고백 때문에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라크, 지금 뭐라고 했어요?’

    복부의 상처 때문에 몰골도 엉망이었고,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낭만 어린 정원이나 잔느 강이 흐르는 다리, 하다못해 크고 작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무도회장도 아니었다.

    달빛만 겨우 비쳐드는 어둑한 제 저택에서, 준비해 둔 보석이나 꽃도 없이 이루어진 고백이었다.

    ‘시아. 당신과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그렇게 갑자기 여기서…….’

    그럼에도 또 다른 시간선의 라크시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질 지 모르는 시간 여행자를 붙잡으려면 뭐든 해야 했으니까.

    그답지 않았다. 라크시스는 스스로에게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성장하던 신사도, 언제나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하던 귀족적이면서도 오만한 고대 마법사도 아니었다.

    왜 이러는 건진 자신도 몰랐다. 온몸 가득 넘칠 정도로 차오른 감정은 간지럽고도 이상했다.

    문득 시아와 했던 내기가 떠올랐다.

    그녀가 내게 나답지 않다고 했던 건 뭘까.

    라크시스는 이제 어렴풋이 그 뜻을 알게 되었다.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의, 충동적이되 충동적이지 않은 이 감정을 따르는 자신이야말로 가장 라크시스답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스스로에게 솔직한 라크시스였다.

    뜨거운 것이 울컥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까마득하게 많은 단어가 열기를 품고 혀끝에서 돌아다녔다.

    라크시스는 그것들을 삼키는 대신, 문장으로 만들어 꺼냈다.

    ‘당신이 초상화 속 은발 여인인지 궁금해서 접근했던 건 맞습니다. 미래의 당신이 중세로 시간 여행을 해서 이런 머리카락을 남기고 갔다더군요.’

    ‘미래의 제가 중세로 시간 여행을 했다고요?’

    ‘당신이 불쾌하다 말씀하시면 그림은 치우겠습니다. 어차피 이제 더는 의미 없는 그림이 되어버렸으니까.’

    이제 멈출 수 없다. 당황한 시아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발갛게 물드는 게 보였다.

    ‘시아. 당신이 제안했던 내기를 기억하십니까?’

    발그레한 볼이 예뻤다. 사랑스러웠다. 라크시스는 지금껏 자신이 애써 부정해온 감상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답을 알 것 같습니다. 바로 지금의 제가 가장 저답지 않은 것이겠지요. 당신으로 인해 흐트러지고, 여유를 잃어버린 이 모습이요. 당신을 놓칠까 봐 초조해하고, 그러면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당신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자꾸만 이성을 놓아버리는 제가 바로 당신이 말한 ‘라크시스답지 않은 사람’일 테지요.’

    ‘맞긴 맞는데 그게 왜 저 때문인…….’

    ‘아니요, 당신 때문입니다. 시아 켈튼.’

    풀어 헤친 셔츠 바람으로 라크시스는 무릎을 꿇었다. 고대 마법사의 마력이 주인의 의지에 반응해 테이블을 밀어내고 반딧불이처럼 아름다운 빛무리를 하나둘 띄워냈다.

    ‘당신을 만난 후로 전 비로소 살아있게 되었으니까요. 지금까지 당신이 만났던 사람은 아득한 세월을 살아오며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마법사에 불과했어요.’

    열린 창문으로 장미 향기가 실려 왔다. 덩굴장미가 가득 핀 저택의 정원에 데려온 사람도 시아 켈튼이 처음이었다.

    이제 시아는 황금빛 은하수 속에 있었다. 시아는 자그마한 마력 알갱이들이 신기한 모양이었지만, 라크시스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한 밤하늘을 보는 것처럼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당신 덕분입니다. 시아. 당신 덕분에 전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의 손에 마력들이 모여들어 작은 고리를 이루었다. 어쩔 줄 모르고 멀거니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들었다.

    그러곤 새하얀 손등에 입을 맞추듯 뜨거이 고백했다.

    ‘레이디 시아 켈튼. 제가 당신과 정식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 *

    “라크, 어디 아픈 건가?”

    “…신경 쓰지 마.”

    퍽이나 신경 안 쓰이겠다. 요르문은 시아의 뒷모습에 내내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라크시스를 보고 어이가 없어 피식거렸다.

    시아가 트램에 치일 뻔한 루드윅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 영 거슬리는 모양인데, 거슬리는 것 못지않게 머릿속이 복잡해 둘 사이에 끼어들 정신조차 없는 것 같았다.

    “나한테는 솔직해도 된다니까. 자네 지금 식은땀이 나는 거 알고 있어? 애써 고백한 게 누님에겐 없던 일로 돌아갔으니 그러는 건 이해하지만…….”

    “제발, 요르문. 내게 신경 꺼. 자네 아니라도 미칠 것 같으니까.”

    그 대단한 고대 마법사 라크시스 옌을 쩔쩔매게 하는 사람이라니. 어쩌다 생긴 친척 누님은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느새 시아를 가족처럼 여기게 된 요르문은 오랜 친구가 친척 누나에게 반해버린 걸 중간에서 구경하는 입장으로 키득거리며 라크시스를 놀려댔다.

    “내가 누님한테 말해줄까? 라크시스 옌이 누님에게 고백했었다고?”

    “요르문 켈튼.”

    주변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사방의 마력이 빼곡한 가시처럼 요르문에게 향해있었다.

    “어이구, 무서워라. 알았어, 안 한다고. 안 말한다니까? 나 아직 죽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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