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와, 향이 좋네요.”
시아는 감탄했다. 도기도 도기였지만 이런 차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의술원에서 일할 땐 워낙 커피만 마셔댔던 터라 차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긴 했지만, 마도 시대에서 라크시스를 만나곤 그의 추천으로 차를 마시기도 했었다.
나름 유명한 거 꽤 마셔봤다고 생각했는데. 라크 취향이 아니라서 지금까지 못 마셔봤던 걸까?
라크시스는 뜨거운 찻물에 우유를 조르륵 부으며 설명했다.
“이 차의 이름은 레이디 마거릿입니다. 마거릿 1세가 황녀이던 시절 가장 즐겨 마시던 조합이라고 알려졌지요.”
여인이 푸근하게 웃으며 빈 소파에 앉았다.
“마거릿 황제가 다무스에 준 선물이지. 이젠 아예 다무스 명물이 되었고.”
“마거릿 황제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공부를 소홀히 해왔던 편은 아니라 어지간한 역대 제국의 지도자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황제라 했으니 왕국 사람도 아닐 것이고. 황녀라 했으니 몇 없었던 여자 황제였단 소린데. 시아는 난데없는 지식의 공백에 당황하며 우두커니 생각에 잠겼다.
왜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 이것도 시간 여행의 여파인 걸까.
“시아. 그러다 찻잔을 놓치겠어요.”
“…아. 고마워요.”
골몰히 생각하다가 손가락에 힘이라도 빠졌는지 정말로 찻잔이 손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라크시스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쏟을 뻔했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있잖아요, 이런 질문 하는 거 좀 없어 보일 수도 있긴 한데.”
라크시스가 별걱정을 다한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마거릿 황제가 누구인가요?”
찰나 정적이 흘렀다. 라크시스와 요르문이 시선을 주고받고 루드윅이 당황해 시아를 쳐다보았다. 시아는 기묘한 의사전달의 상황 속에서 제 질문이 뭐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지금 이 상황 뭐예요? 나만 뭔갈 모르는 것 같은데.”
“누님, 설마 아무것도 기억이 안…….”
역설적이게도 시아의 질문에 가장 먼저 대답한 건 이 집의 주인이었다.
“제국인인데 마거릿 황제를 모른단 말이우? 그 유명한 이자벨라의 딸이잖어.”
“…네?”
루드윅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레이디 켈튼, 혹시 블러디 마거릿 못 들어보셨나요? 마거릿 1세가 국교회 세력을 숙청한 사건, 모르시겠어요?”
정말로 모르겠다. 뇌가 새하얗게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시아는 결국 솔직하게 토로했다.
“모르겠어요. 마거릿 1세니 뭐니, 전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 * *
마거릿 1세 혹은 블러디 마거릿.
제국 역사상 그토록 가십이 많았던 황제도 없을 것이다. 마거릿은 케르딕 7세와 그의 이복동생인 이자벨라 황녀 사이의 자식으로, 다무스 왕국과 이단 황혼 국교회까지 얽힌 희대의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그럼에도 마거릿은 언제나 당당했다. 누가 제게 음란한 여인의 자식이라 욕하면 너도 같은 행위의 결실이라 응수했고, 황녀는커녕 사생아조차 못 되는 신분이라고 비난하면 이렇게 말했다.
‘제국에서 나보다 푸른 피를 가진 이가 있느냐?’
혹자는 어떻게 반역자인 이자벨라의 딸이 무사히 에드먼드의 손에서 살아남아 제국의 황제까지 되었느냐 의문을 표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역사가들은 마거릿이 황제가 된 후 가장 이득을 본 쪽은 저주 사태의 최대 피해자인 다무스 왕국이라 말했다.
원수의 자식을 레이디 마거릿이라 칭하며 공주나 다름없이 길러준 에드먼드 3세와 그의 비 아스타 덕에 다무스는 식민 전쟁 시대에 인근 국가 중 유일하게 제국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 게다가 외교적으로도 두 나라는 언제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진 제국과 왕국 사이에 웨스턴체스터 철교가 세워지고, 사증 없이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두 나라를 오가게 된 것도 마거릿 1세가 다무스를 모국과 다름없는 곳이라 불렀기 때문이었다.
다만 마거릿 1세는 즉위 직후 생물학적 친부이자 숙부인 케르딕 7세를 처형시키고, 국교회 세력을 모조리 숙청한 탓에 블러디 마거릿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이단 황혼 국교회의 잔존 세력을 추적하기 위함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국교회가 부정하게 축적해 온 재산 등이 드러나 함께 처벌받으면서 국교회가 마거릿 1세와 완전히 갈라서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자벨라 황녀는 어떻게 된 거죠.”
“평생을 탑에 갇혀 살았어요. 마거릿이 간청할 때 종종 에드먼드 3세가 외출을 허용해 준 게 다였죠.”
루드윅은 시아의 모든 질문에 천천히 답을 주었다.
“그 당시엔 어지간해선 왕족들을 처형하지 않았거든요. 워낙 각국 여러 왕실들과 결혼으로 복잡하게 이어져 있다 보니 자칫하다간 외교 문제로 번질 수가 있어서.”
“케르딕 7세는요?”
“저급한 표현이긴 하지만 희대의 개자식라 불리게 됐죠. 아니, 이건 제가 쓴 표현이 아니라 당시 신문에서 정말로 그렇게 헤드라인을 띄웠어요. 권력을 위해 동생을 강간하고 누명을 씌웠으니까요.”
케르딕 7세는 처형당하기 직전까지도 억울해했다. 황좌를 위해 손을 더럽히는 자가 지금껏 자신 하나밖에 없었겠느냐며, 마거릿에게 너도 똑같이 될 거라 악담을 퍼부었다.
시아는 낙담하듯 중얼거렸다.
“…황제의 관이 대체 뭐라고.”
“하하, 저희 같은 사람들이야 그렇게 말하겠지만요. 막상 손 뻗으면 닿을 곳에 황제의 관이 있다면 사람이 어떻게 변하게 될진 아무도 모르는 거죠.”
그렇게 말하곤 루드윅은 시아가 라크시스 옌의 연인이자 켈튼가의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만약 그녀가 황좌에 앉고 싶다 말하면, 저 두 마법사는 정말로 그녀의 발밑에 황좌로 향하는 붉은 카펫을 깔아줄 수도 있는 자들이었다.
지금까지 친구처럼 다녀서 잊고 있었지만 라크시스 옌과 시아 켈튼, 요르문 켈튼은 여러 의미로 거물급 인사였다. 루드윅의 등골에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뜻밖에 이어진 긴 대화에 루드윅의 찻잔이 끊임없이 비었다. 마른 목을 축이려고 식어버린 차를 물처럼 마셔대자, 여인이 아예 물을 주전자에 담아 가져오며 물었다.
“그런데 학자님들은 조사할 게 있어서 여기까지 오신 거 아니우? 궁금한 게 있으면 어서 물어봐요.”
“아, 그게.”
루드윅은 사람 좋게 웃으며 얼른 나섰다. 미리 생각해 둔 대로 인터뷰를 진행하려고 죽은 론다니의 아들 사진이 담긴 액자를 가져왔다.
“이분 말이에요. 돌아가신 아버님에 대해서 여쭈어보려고 하는데요.”
그러자 여인이 이상한 소리를 다 들어본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당황한 루드윅은 얼떨결에 물었다.
“제가 혹시 말실수한 거라도…….”
그런 건 아니고. 여인은 액자를 받아 들며 옛이야기를 하듯 대답했다. 사진은 매일같이 닦는지 먼지 한 톨 없이 잘 관리되어 있었다.
그 사진 속에서 집사 론다니가 나이 들면 이런 얼굴일 것 같은, 론다니와 꼭 닮은 노인이 중세풍의 복식을 갖춰 입은 채 온화하게 미소를 피웠다.
“이 분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 이 가문의 선조 격이 되는 분이여. 론다니 N. 루소. 냉혈의 사자라 불리던 백작님을 평생 보필하신 대단한 분이라지.”
* * *
“그럼 우리가 만난 건 집사 론다니의 유령이었던 거예요?”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시아는 팔뚝을 마구 문질렀다.
과거가 바뀌기 전 루드윅이 괴담을 물어보러 찾아갔던 어르신이 론다니의 후손이 아니라 론다니 그 자신이었다니.
시아는 어떻게 백삼십 년 전 사람이 사진으로 남을 수 있냐며 의문을 제기했지만, 론다니의 증손녀인 여인은 이렇게 답했다.
‘이 분은 돌아가시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우.’
[사진기라는 게 발명되면 이 필름을 현상해 보거라.]
이후 제국에서 사진기가 발명되고 다무스에도 사진기가 들어오자 론다니의 손자는 현상소를 찾았다. 그러나 사진사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조그만 필름은 처음 보는데. 이런 건 저희 쪽에서 현상 못해요.’
시간이 한참 더 흐르고 마침내 제국이 마도 공학으로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론다니의 증손녀인 여인은 제국에서 온 신사들이 종종 지팡이의 끝에서 이상한 장치가 튀어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철컥, 하더니 자그마한 간이 사진기 같은 기계가 저절로 조립되면서 빛이 펑 터지는 것이다.
신사들을 붙들고 물어본 덕에 여인은 론다니가 남긴 필름이 현시대의 마도구였다는 걸 알아냈다.
여인은 떨리는 마음으로 사진을 현상했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봉투에 담긴 사진을 열어보는 순간, 루소 가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우린 정말로 론다니 N. 루소의 후손이었어.’
사진에 찍힌 백삼십 년 전의 조상과 여인의 가족이 기가 막히게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만큼은 요르문도 놀란 눈치였다. 여인의 집에서 나오는 길에 내내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님,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에 이 지팡이 사진기가 있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요르문은 라크시스가 소환해 온 지팡이의 손잡이를 열어 보였다. 태엽이 자그르르 돌아가더니 철컥철컥 펼쳐지며 렌즈와 자그마한 마정석이 박힌 간이 사진기가 나타났다.
라크시스는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했다.
“마도 시대의 물건이 과거에 있다, 라. 그렇다면 답은 시간 여행밖에 없군요.”
“라크, 하지만 우리가 두고 온 물건이 아니잖아요.”
“우리 말고도 슈테른베슈테크에는 이방인이 있었지요. 과거 고성에 괴담을 찾으러 갔다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던 수많은 괴담 수집가들 말입니다.”
루드윅이 끼어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사진기가 아니에요. 아니, 사진기도 사진기 나름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요. 우리가 만난 할아버지가 중세의 집사 론다니라니!”
“하긴 생각해 보면 우리가 고성에서 만난 집사는 백삼십 년 전 사람이었잖아요. 그 당시에도 론다니에겐 아들이 있었으니, 그의 아들이 살아있다면 적어도 백삼십 살은 넘었어야 된다는 소리고요.”
“하지만 그 집사는 마법사가 아니었지. 평범한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긴 힘들고.”
루드윅은 이제 날아갈 것처럼 붕붕 뛰었다. 혹시나 싶어 론다니의 아들, 손자, 증손자의 초상이며 사진을 있는 대로 보여달라고 했지만 시아 일행이 이 집에서 만난 노인은 흑백 사진 속 더블릿 차림의, 나이 든 론다니였다.
기묘하고 괴이한 이야기를 사랑하는 그에게 론다니의 유령이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짜릿한 선물이었다.
“이거야말로 진짜 괴담이었어요! 어쩌면 집사 론다니의 유령이 악마 숭배자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백작을 구해달라고 괴담이 있던 고성으로 저희를 이끈 게 아니었을까요?”
“로드 젤마니! 앞, 앞에 선로 있어요!”
얼마나 신이 났는지 앞도 안 보고 걷다가 느릿하게 운행하는 트램에 치일 뻔했다. 시아는 황급히 루드윅을 잡아 세웠다.